얼마 전 TV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우리에게 아직 멀기만 제국 발해에 대해 다뤘다. 멸망하 고구려를 계승하고 그들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에 대한 이겨기는 마음을 뜨겁게 했지만, 이후 우리 민족에서 만주 지역이 남은 땅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만주 지역은 과거 요동, 요서라 불리던 곳으로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었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는 이 지역을 근거지로 중국의 대제국과 당당히 맞서며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고 주변 이민족들을 지배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췄다. 이런 고구려가 중국 통일 왕조에는 눈엣 가시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신흥 제국 당나라와 신라의 지속적인 공세와 함께 지도층의 내분이 겹치며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다. 고구려가 사라지면서 요동은 우리 민족에게서 멀어졌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 차지하는 것에 만족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오려가지 못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부흥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 지역의 유민들을 자신들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구려 유민들은 삶은 터전을 잃고 낯선 곳에서 힘든 삶을 영위해야 했다. 패망국 국민의 삶이었기에 그 삶은 비참하고 열악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대륙경영 희망이 희미해져 갈 무렵, 대외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요동지역에서 자리하고 있던 거란족들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곳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고 요동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권이 느슨해지는 계기가 됐다. 이는 숨죽여 살아온 고구려 유민들에게는 큰 기회였다.
이들은 혼란을 틈을 타 당나라를 탈출했다. 그 중심에는 과거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있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통합해 당나라에 맞설 수 있는 독자 세력을 만들었다. 대조영은 당나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이동해 나라를 건국하려 했다. 당나라는 군대를 파견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대조영은 이를 물리치며 건국에 탄력을 받았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계승을 천명하며 만주 지역에 새 나라를 세웠다. 발해의 시작이었다. 발해는 고구려계 유민들이 지배층을 구성했지만, 말갈족과 여타 주변 여러 이민족을 통합한 국가였다. 발해는 건국초기 당나라의 계속된 침략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를 강하게 맞받아치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수군을 활용한 중군 본토 공격은 우리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결코 중국 통일 왕조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발해는 외교적 고립을 막기 위해 왜와 통교를 강화하고 주변과의 교역을 통해 나라의 부를 축적했고 군사력 또한 한층 강화됐다.
발해를 힘으로 제압할 수 없음을 느낀 당나라는 발해에 유화책을 제시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꿨다. 발해는 당나라와 사회 문화적 교류를 확대하면서 나라를 더욱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문물을 더해 독창적인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었다.
나라가 안정되자 발해는 주변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했고 지금의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전성기의 발해는 과거 고구려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발해의 건국과 융성은 우리 민족에게 잃어버린 대륙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 영역을 지금의 러시아 지역까지 확대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발해를 두고 중국에서 해동성국이라 극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역사 학계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공존하는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발해였지만, 다민족 국가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국가의 내분이 심화되고 지도층마저 분열되면서 나라가 쇠약해져 갔다. 결국,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혼란해진 국가 사정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했고 발해는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다. 발해 유민 중 일부가 당시 새롭게 건국한 고려에 흡수되기는 했지만, 대륙의 영토는 잃고 말았다.
이후 대륙 경영에 대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고려 시대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은 위화도 회군을 불러오며 고려왕조의 몰락을 불러왔고 조선 초기 정도전이 주도했던 요동 정벌 시도 역시 이방원이 주도한 정변에 정도전이 희생당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후 조선이 명나라에 철저히 사대외교를 펼치면서 우리 민족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지 못했다.
당연히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대륙 경영의 역사도 묻히고 말았다. 남북, 분단의 현실 속에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 있는 고구려, 발해에 대한 역사 연구고 충실히 진행될 수 없었다. 중국이 고구려 발해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시도를 노골화하고 했음에도 그 사실을 뒤늦게 알 수밖에 없었다. 최근 고구려,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부족함이 있는 건 사실이다.
과거 찬란했던 역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과거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재현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기록들을 재현하고 우리 역사로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이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중요한 무형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는 발해에 대해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사진, 글 : 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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