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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두 편의 역사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장영실의 공통된 배경은 고려말 조선 초기다. 육룡이 나르샤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를 그리고 있고 장영실은 건국 초기 조선을 그리고 있다. 그 안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조선건국과 조선 최고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 시대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조선의 역사에서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창업과정과 권력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한 인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함께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방원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악역이 되는 걸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무리한 과정도 피하지 않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악업을 쌓았지만, 그의 사후 조선은 상당한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이방원이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건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피살을 주도하면서라 할 수 있다. 당시 정몽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강경파 사대부들에 맞서 온건 사대부를 이끌고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강경파는 당시 사대부들과 젊은 유생들의 큰 지지를 받있는 정몽주를 새나라 창업에 참여시키려 했지만, 정몽주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정몽주는 강경파들에 맞서며 고려 왕조를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양 세력이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 강경파의 구심점인 이성계가 말에서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병상에 있는 사이 정몽주를 비롯한 강경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것이 성공했다면 역사가 바뀔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성계는 병상에서 일어났고 정몽주의 계획은 실패했다. 고려의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던 이성계의 존재는 그만큼 크고 넘기 힘든 벽이었다. 


정몽주의 불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계획의 실패하고 얼마 후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피살되며 그의 생을 마감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한 일이었다. 이방원은 고려 왕조의 마지막 명줄을 쥐고 있던 정몽주를 제거하여 조선 창업의 걸림돌을 완전히 제거했다. 드라마에서도 이방원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그리고 있지만, 강경파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를 통해 벼슬을 했던 인물로 학문적 정치적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런 이방원을 이성계가 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는 정몽주 피살이 개인적인 행동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정몽주의 죽음은 고려 왕조의 몰락을 가속화 했고 강경파 사대부들은 이성계를 창업 군주로 새나라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다방면에서 개혁안을 시행했고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통치 이념과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로 변모했다. 문제는 이과정에서 개국 공신 세력과 왕권의 충돌이 심화됐다는 점이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들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조정 대신들이 중심이 되는 재상 정치를 추구했다. 이 정치 시스템 속에서 왕은 군림은 하지만, 이중 삼중의 견제 장치에 막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런 상황은 어려서부터 정치 참여에 관심이 많았던 이방원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서 이방원을 왕권의 중심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방원은 조선 초기 이성계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공신세력에 크게 밀리는 상황에 처했다. 정도전은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한 편 사병철폐 등을 통해 왕족들의 힘을 무력화하려 했다. 그러면서 세자 책봉에 있어 계승 순위에 있어 한 참 아랫 순위에 있는 방석의 세자 책봉을 주도했다. 이를 통해 정도전은 신권을 더욱 더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이방원을 비롯한 왕족들의 강한 불만을 불러왔다. 


특히, 이방원은 조선 개국 당시 그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의 정치적 야심을 알고 있는 정도전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이방원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 변화가 결국 자신의 입지를 크게 좁아지게 하는 한편, 언젠가 자신이 숙청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이방원은 정도전 세력에 반감을 품고있던 왕족들과 일부 공신 세력들을 규합해 정변을 일으켰다. 이성계가 병중에 있는 틈을 탄 기습 공격이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이 정변으로 세자 방석은 살해되고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 공신 세력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를 옹립했다. 하지만 사실상의 권력은 이방원의 것이었다. 이방원은 이후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발생한 2차 왕자의 난에서도 승자가 되며 권력 기반을 단단히 했다. 


이후 태조 이성계에 이어 2년간 제 2대 왕 정종의 통치기를 거처 이방원은 마침내 조선 제 3대 왕으로 보위에 올랐다. 긴 권력 투쟁을 거쳐 이룬 결과였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권력 권력구조를 만드는 과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가리지 않고 숙청했다. 그가 왕이 되는데 일조했던 공신 세력 상당수도 이에 포함됐고 외가와 세자의 장인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세자가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교체되는 일도 함께 발생했다. 알려진 바로는 장남으로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의 각종 기행이 문제가 됐다거나 양녕대군의 각종 기행이 이버지 태종에 대한 반발과 등의 이유에 의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방원의 통치 방식을 고려하면 그의 선택에 의해 왕으로서 더 적합하다 판단되는 아들로 세자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이방원은 충녕대군에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군권을 손에 쥐고 왕권 확립을 위한 노력을 쉼없이 했다. 그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정치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이런 태종의 노력은 조선 제4대왕 세종이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중국에 의존하던 각종 천문기술과 문화적 콘텐츠를 자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고 우리 글은 한글창제를 할 수 있었다. 중국과의 사대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고에 젖어있던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도 가능하다는 논리는 무조건 정당화할 수 없는 역사적 오점이었다. 태종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쌓은 업은 훗날 세종 사후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의 업적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비례해 그가 만든 피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가질 필요가 있다. 최근 드라마 등에서 보여지는 태종 이방원의 모습이 너무 긍정적으로만 그려지는 건 경계할 필요가 있다.


긍정과 부정적 이미지가 공존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발전에 있어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살피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시각으로 살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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