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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현대에 가장 가까운 시대로 현대들에게 친숙한 시기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드라마의 소재로 조선시대, 왕이 있는 궁궐의 이야기는 자주 사용된다. 상대적으로 많은 사료가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지만, 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향한 대결과 갈등, 그 안에서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보게 된다. 그것에서 파생된 왕권과 신권의 대립, 신하들 간 당쟁, 왕위 계승을 위한 왕자들의 대립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대결을 불러왔다. 그 대결에서 승리한 자는 역사의 중심에 섰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거나 그의 진면모가 왜곡되는 패배자의 역사를 감수해야 했다.

   

이는 권력의 2인자 세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왕위 계승 1순위 후보들이었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세자라는 직위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우도 있었다. 왕에게 세자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존재이고 했지만, 반대로 권력을 약화하는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세자는 항상 왕에 의해 견제되고 그 충심을 의심받아야 했다. 즉, 왕과 세자는 부자 간이 아닌 정적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이는 비극적인 역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군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비운의 세자들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아는 3인의 세자는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조선 초기 성군, 세종대왕의 형이었던 양녕대군, 병자호란이 혼란기의 왕이었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조선 왕조 최고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가 그들이다.





양녕대군은 폐세자의 비운을 겪긴 했지만, 대신 편안한 말련을 보냈다. 양녕대군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 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둬야 했다. 조선 초기 왕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태종은 악역을 자처하며 치열한 권력투쟁의 과정을 거쳐 승자의 자리에 올랐다. 피로 세워진 정권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희생을 불러왔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친, 인척이던 공신이던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태종의 맏아들로 일찍이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 역시 자신들의 처가 쪽 인사들이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역사서에서 나오는 양녕대군은 왕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행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도피의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자의 왕위 계승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던 태종이었지만, 세자의 계속되는 귀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양녕대군은 폐세자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권력을 내려놓은 댖가는 달콤했다. 양녕대군은 이후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의 보살핌 속에 왕실의 좌장으로 자리했다.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 사후에도 그는 왕실의 종친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주변의 친. 인척들도 더는 화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초기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도 권력의 달콤함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그는 세조의 권력찬탈때 상당 역할을 했었다. 이후 언급할 사도세자와 소현세자와 달리 살아남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어찌보면 스스로 군왕의 길에서 벗어난 양녕대군과 달리 사도세자와 소현세자는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 대립이 소현세자 역시 아버지 인조와의 불화가 그를 힘들게 했다. 공통적으로 두 세자의 아버지는 신권에 맞서 왕권 강화를 위해 고심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던 태종과 달리 그들은 왕권에 버금가는 신권과 힘겨운 파워게임을 해야했다. 여기에 붕당정치가 심화되던 시기에 왕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치력 발휘가 필수적이었다.  

 

영조는 집권 초기부터 선대 왕인 경종의 독살설에 휘말렸고 후궁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큰 컴플렉스가 있었다. 노론이라는 거대 정치세력과의 힘겨루기도 이겨내야 했다. 영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을 막고자 탕평책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신권의 약화를 노린 측면이 강했다. 영조로서는 자신의 후계자가 보다 안정적으로 왕권을 유지하길 바랐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의 아들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숨막히는 권력다툼에 부정적이었고 이는 마음의 병으로 이어졌다. 역사 기록에는 사도세자의 기행이 많이 실려있기도 하자. 이런 사도세자의 처지를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세력이 동정하고 동조하면서 신, 구 권력 간 다툼이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당장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자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집권층도 자신들에 비협조적인 사도세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금만 잘못해도 사도세자에게는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강경파는 사도세자를 탄핵했고 영조는 이에 동조했다. 영조는 더 나아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영조는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권력을 더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자신에 반하면 아들마저 피의 숙청을 하는 왕에게 대응할 수 있는 이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이 영조에 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당시의 억울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지만, 권력의 냉혹함을 마음 깊이 느끼며 생을 마감해야 하는 비운의 왕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 사도세자와 함께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또 한 명의 왕자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의 탐욕이 만든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인조는 조선의 가장 치욕적인 역사라 할 수 있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황제에 항복의 예를 했던 왕이었다. 임진왜란의 피해가 채 복구되기 전에 당한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선을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에 예속됐고 일반 서민들을 삶은 더 피폐해졌다. 왕과 집권층은 이런 현실을 극복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인조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전쟁에 패하고 적장에 항복을 한 왕이 그의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하긴 힘들었다. 그를 둘러싼 집권층마저 때에 맞지 않게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미 없는 대의 명분에 빠져 있는 강경파 뿐이었다. 패전국 조선에는 변화가 필요했지만, 인조를 비롯한 집권 세력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내던 시절 청나라에 유입된 발전된 서구의 문물과 기술에 관심을 보였고 조선을 지배하던 성리학적 사상과 다른 서양의 문화에도 개방적이었다. 그는 조선의 발전적 변화를 통해 나라를 부국강병에 이르도록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이와 별도로 청나라의 실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후 조선이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덜어내는데 힘 섰고 배우자인 세자빈과 더불어 직접 무역 등을 통해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조선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렇게 열린 사고를 가진 소현세자였지만, 이는 아버지 인조와의 불화를 불러왔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돼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할 수 있다. 소현세자는 병 치료를 받던 중 돌연 사망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의 죽음은 독살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아버지 인조는 석연치 않은 아들의 죽음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도리어 세자빈과 손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인조는 조선의 변화를 꿈꾸는 아들이 자신과 집권층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에게 권력은 부자 간의 정보다 더 소중했다.  


소현세자의 사후 조선은 변화의 동력을 잃고 영.정조때까지 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반응하지 못하면서 근대화된 서구와의 국력 격차가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의 지연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소현세자의 황망한 죽음이 아쉬운 이유다. 
 

 

이렇게  조선시대 왕의 후계자들은 결코 모두가 행복하지 못 했다. 아니 대부분이 세자가 된 이후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왕위를 이어받지 못한 세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앞서 언급한 3명 외에도 불운한 삶은 살았던 왕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희생의 기반 위에 조선은 그 역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패배한 이들의 기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양녕대군, 사도세자, 소현세자 이 세 명의 후대에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행운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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