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2일은 우리나라 독립 운동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의 일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이사건은 일제의 우리 민족 탄압의 중심이었던 종로경찰서를 직접 공격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 거사를 실행한 김상옥 열사는 젊은 나이에 그 삶을 다하고 말았다.
우리 독립 운동의 큰 전환점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었다. 우리가 3.1절이라고 부르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 강제 합방으로 인해 나라를 잃었던 조선의 국민들이 성별, 계층, 종교를 망라해 일제에 맞서 항거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에 따른 여러 의혹으로 촉발된 국민들의 분노는 주춤하고 있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동력이 됐다. 민족 대표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위한 비밀 움직임은 조직화됐고 마침내 지금의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운동으로 폭발했다. 이 만세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된 3.1 만세 운동은 한계가 있었다. 일제의 무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은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무고한 국민들이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만세 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해 강압적 수단으로 이에 맞섰다. 결국, 3.1운동의 기운은 우리나라의 독립이라는 염원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온 국민의 독립의지를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갔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3. 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제의 탄압에 주춤하던 국내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힘을 잃어가던무장 독립운동도 다시 이어졌다. 만주를 기반으로 한 독립군이 일제와 맞섰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의사들의 의거도 이어졌다.
이런 독립운동의 전개에 있어 김상옥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김상옥은 앞서 언급한 1923년 1월 12일 일어난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홀로 결행했던 인물이다. 당시 종로 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 모진 고문으로 악명이 높아 일제 강압 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다. 이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제애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김상옥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었다.
1890년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난 김상옥은 어려서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근면 성실함으로 바탕으로 자신의 가게를 열고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됐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에 귀의하고 야학을 통해 지식을 쌓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상옥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만의 치열한 삶 속에서 일제 통치하 힘겨운 우리 국민의 삶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청년 김상옥은 자신의 부를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고 여러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는 신물을 제작하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곧바로 일제에 발각되었고 더는 이어갈 수 없게 됐다. 김상옥 역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김상옥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더는 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움을 인지하고 상해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김상옥은 여러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무력투쟁의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김상옥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일제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활동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1920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조사하기위해 방문하는 미 의회 방문단의 방한을 즈음해 독립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거사를 추진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됐고 김상옥은 다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중국 상해에서 자금을 모으는 등 준비 과정을 거친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 폭파와 일본 총독 암살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 폭발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전의 폭탄 의거와 달리 해외에서 치밀하게 준비한 폭탄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가 사용한 폭탄은 일제의 수사 기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거사를 성공시킨 김상옥은 이후 일본 총독 암살을 시도했지만, 거사 전 조선인 순사들의 밀고로 은신처가 일제에 파악되며 뜻을 이루지 못 했다. 그는 수백 명 일제 경찰과 홀로 맞서며 항거했다. 그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지붕을 오가며 고군분투했다. 그의 신출기 몰한 움직임에 일제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수백명을 홀로 상대해야 하는 그의 무기는 얼마 안 가 바닥을 드러냈다. 사방이 포위돼 더는 항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김상옥의 선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하는 것이었다. 삶은 마무리하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김상옥은 일제 경찰에 잡혀 굴욕을 당하는 대신 조선 독립의지를 그의 죽음으로서 보여줬다. 우리 민족의 기백을 보여준 의로운 죽음이었다. 이후 그는 가족들과 소수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다. 독립 영웅의 쓸쓸한 최후였다. 이후 독립이 되었지만, 김상옥은 1962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을 추서 받을 수 있었다. 독립영웅에 대한 뒤늦은 예우였다.
김상옥은 사후 그의 공훈을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을 뉴스로 접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빈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계속 듣고있다. 그 반대로 일제에 협력에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광복 이후에도 요직에 등용되고 부를 더 축적해 나라의 지도층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에서 일제의 잔재가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도 당장 급한 현실의 삶 속에 갇혀 정작 중요한 역사에 대해 무감각할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앞으로 누가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해마다 3.1절, 광복절만 되면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고 그 후손들에 대한 처우가 관심을 가지지만, 불합리한 현실은 매 년 반복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제2, 제3의 김상옥과 같은 인물이 앞으로 나오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앞으로 이런 씁쓸한 현실이 나아지길 기대해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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