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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는 조선 후기 암울한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세도 정치는 개혁 군주였던 정조 사후 그의 아들인 순조 임금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가문과 그와 관계된 특정 집단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정을 농단한 시기를 말한다. 


60년 넘게 지속된 세도정치 기간 조선은 이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에 시달리며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소수의 특정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됐고 과거제도와 같은 공정한 관리 등용 역시 무의미해졌다. 권력의 독점은 왕권마저 무력화시켰다. 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정도로 세도정치의 힘은 막강했다. 


세도정치가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기반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매관매직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행태는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의 백성들에 대한 극심한 수탈로 이어져 민생을 파탄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는 민심의 이반과 더불어 국가 경제를 위축시켰다. 국가 운영의 시스템이 왜곡된 상황에서 나라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영, 정조시대 어렵게 만들어 놓은 국가 부흥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들의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것도 모자라 개혁 정책들을 모두 후퇴시키는 반동 정치로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우를 범했다. 절대적인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 개혁과 변화, 새로운 문물의 도입은 그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뒤처지며 패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선을 병들게 한 세도정치의 기원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안동김씨 김조순에서 시작된다. 김조순은 조선 후기 집권층을 이루던 노론의 명문가 출신으로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영조가 왕위 오르는데 일조하면서 왕가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정조, 순조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노론 중에서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동정하는 온건 시파에 속했다. 이는 영조 사후 집권한 정조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조순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노론의 중심인물이었지만, 정조는 그를 신뢰하고 집권 말기에는 크게 의지했다. 김조순 역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처신으로 정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적을 만들지 않은 처세를 통해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치 9단의 면모를 보였다.


정조는 특정 정파의 권력 독점을 경계하고 두로 인재를 기용하는 탕평책을 국정 운영의 기조로 삼았지만, 이를 위해 자신을 뒷받침할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각 정치세력에 고루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김조순은 이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급기야 정조는 편법을 사용하면서까지 김조순의 딸과 세자와의 혼례를 강력히 추진할 만큼 김조순에 강한 신뢰를 보였다. 


정조는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고 그의 사후 세자의 든든한 뒷 배경을 만들어주려 했다. 문제는 정조의 특정인에 대한 편애가 결국, 세도 정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김조순도 정치는 위기는 있었다. 혼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찾아온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혼례 추진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김조순은 철저히 몸을 낮추며 위기를 벗어났고 정조의 유훈에 힘입어 순조의 장인이 될 수 있었다. 이후 김조순은 순조를 도와 국정을 사실상 주도했다.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시작이었다. 물론, 김조순이 권력을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 이면은 알 수 없지만, 그는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고 조력자 역할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그가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안동김씨 세력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됐다. 한때 풍양조씨를 비롯한 몇 몇 세도가와 권력투쟁을 겪기도 했지만, 고종 때까지 그들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중전을 연이어 배출하며 권력기반을 더 공고히 하는 한편 요직을 독점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반하는 왕족들을 죽음으로 내몰며 자신의 권력에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작용이 있었지만, 붕당정치를 통한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치의 기본은 옛말이 됐다. 결국, 정조의 김조순에 대한 깊은 신뢰가 결과적으로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앞서 밝혔지만, 세도정치의 폐해는 극심했다. 국가 운영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됐고 계속된 수탈에 참다못한 백성들을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동학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 등 신흥 종교의 급속한 세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런 백성들의 불만을 세도 정치는 힘으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당연히 나라의 혼란은 더 극심해졌다. 게다가 세도정치 세력은 지나친 수구 정책으로 발달된 서양의 문물 수용에도 소극적이었다. 나라의 발전 역시 더딜 수밖에 없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며 섭정을 한 대원군의 개혁정책과 이어진 개방정책으로 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지만, 한 때의 바람에 불과했다. 세도정치의 폐혜는 조선의 멸망에 결정적 원인이었다. 이런 세도정치의 시작이 개혁군주로 칭송받는 정조때부터라는 점은 반전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갑작스로운 죽음도 원인이었지만, 자신의 정치 세력을 이익을 우선시 하는 인물을 지나치게 신뢰하면서 새로운 독재 권력이 만들어질 빌미를 주었다는 점은 정조가 남긴 많은 치적이 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사진, 글 : 지후니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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