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를 토크 형식으로 풀어가는 장수 프로그램 역사 저널 그날, 190회 주제는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임오군란이었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은 당시 신식 군대에 비해 홀대를 받았던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궁궐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일반 백성들의 최고 권력의 상징인 궁궐을 습격한 사건으로 당시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조선의 정치는 물론이고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를 불러온 사건이었다.
사건의 직접 발단은 앞서 언급한 대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이었다. 조선은 1876년 불평등 조약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이후 쇄국 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부국강병을 기조로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는 아버지 대원군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대원군은 10년간 권력에서 멀어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고종과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쥔 명성황후와의 관계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이 중심이었던 척사파가 내준 권력의 빈자리는 중전이었던 명성황후의 친인척들로 채워졌다. 고종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긴 했지만, 실제 국정을 주도하는 세력을 명성황후가 중심된 민씨 정권이었다. 문제는 민씨 정권 역시 조선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민씨 정권하에 조선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 역시 힘겹기만 했다. 일반 백성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 이후 자리를 잃은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13개월 동안 급료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쌀로 지급받은 급료에는 모래가 다수 섞여 있었다. 이에 구식 군인들은 그동안 누적된 불만이 폭발시켰다. 민씨 정권은 이들의 불만은 힘으로만 제압하려 했고 무력 충돌을 불러왔다.
구식 군대의 봉기는 당시 권력의 중심부를 겨냥했고 민씨 정권의 중요 인물이 이 과정에서 살해됐다. 이들은 또한 신식 군대의 교관으로 있었던 일본군마저 살해했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또한, 구식 군인들을 궁궐에 난입하여 민씨 정권의 중심이었던 명성황후를 잡으려 했다. 명성황후는 급히 몸을 피해 충주까지 피신해야 했다.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지만, 무장봉기 세력은 사태의 수습을 위한 역량이 없었다. 궁궐을 난입하고 관리들을 살해한 행동은 큰 범죄 행위였다. 중전에서 위해를 가하려 한 행동은 사실상 왕에 대한 역모와 같은 일이었다.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일본군을 살해한 행위는 큰 외교 문제를 불러올 수 있었다. 사태가 수습된다면 임오군란의 주도 세력들은 큰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무장봉기를 정당화하고 신변을 보호해줄 정치적 배경이 필요했고 이는 칩거 중이던 대원군의 복귀를 불러왔다.
대원군은 임오군란을 일으킨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정치적 동반자 명성황후가 실종되고 무장봉기 세력에 일반 백성들 까지 가세하며 여론의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한 카드로 대원군을 다시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났던 대원군의 화려한 복귀였다.
대원군의 복귀는 10여 년간 이어진 개화정책의 폐기를 불러왔다. 각종 제도와 군사제도의 개편은 본래 대로 돌아갔고 관리들의 구성은 척사파로 채워졌다. 임오군란은 어려운 생계에 따른 불만이 그 원인이었지만, 권력 구도의 변화까지 불러온 셈이었다.
권력을 다시 잡은 대원군은 실종 상태인 명성황후의 국장을 선포하며 그의 정치적 재기를 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한편,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사태 수습을 위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불안정했고 개화의 물결을 거부하는 외교 정책은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원군이 복귀할 수 있었던 건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여론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여론의 지지는 내적으로 대원군에게 큰 힘이 됐지만, 대원군은 대외적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다.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는 그들을 만나러 청나라군 진영에 들어온 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이후 대원군은 긴 세월 청나라에서 범죄자로서 취급받으며 억류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일국을 대표하는 인사에 대한 납치 감금은 상식 이하의 일이었다.
이런 청나라의 행동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그들의 의도가 숨어있었다. 조선은 오랜 세월 중국 통일 왕조에 사대 정책을 이어왔다. 청나라에도 병자호란 이후 이런 기조를 이어왔다.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조선의 개화 이후에도 지속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배는 외교와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일종의 속국으로 삼으려 했다. 청나라로서는 조선을 지렛대로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에서 미국 등 서양의 지원을 받으려 했고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권을 극대화하려 했다.
임오군란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청나라로서는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원군이 그들의 조선 지배력 강화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청나라로서는 대원군을 제거하고 명성황후 및 민씨 정권이 권력을 되찾는다면 조선에 대한 지배가 한층 더 수월해질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더 노골적으로 변했고 이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이는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한 갑신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청나라 세력의 확대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세력 확대를 함께 불러왔고 조선은 이후 외세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개화정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역량과 준비가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임오군란은 잠깐 동안의 태풍과 같았지만, 그 파장은 너무가 컸다. 조선은 이로 인한 직접적인 손실은 물론이고 미래를 위해 쏟아야 할 역량마저 소모하고 말았다. 당시 집권층의 무능과 부정부패 등의 문제가 불러온 이 사태는 조선의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의 책임은 집권층에 있었다. 임오군란은 조선 근대사의 큰 전환점이었지만, 그 변화는 조선을 지극히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했다.
사진 : 역사저널그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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