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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191회] 대미 보빙사 파견, 조선의 국제 외교무대 데뷔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18. 10. 18.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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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191회는 조선이 최초로 국제 외교무대에 나선 그 뒷이야기를 다뤘다. 1883년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조선이 당시 조선 주변국인 일본과 청나라를 제외한 서양 국가에 최초로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보빙사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미국으로 파견된 조선의 외교 사절단은 1882년 체결된 조미 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에 파견된 미국 공사 푸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고종의 명을 받아 미국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구성원의 고위 관리들의 자재들로 젊고 당시 조선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에 긍정적인 이들이었다. 고종은 이들로 하여금 외교관의 역할뿐만 아니라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몸소 체험하고 이를 토대로 이들이 개화정책을 이끌어가기를 기대했다. 

보빙사 일행의 미국행은 험난했다. 당시 배편을 이용해야 했지만, 조선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배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들은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넜고 미국 서부에서 미국 대통령이 있는 뉴욕까지 긴 기차 여행을 거치는 몇 달간의 여정을 견뎌내야 했다. 통역이 가능한 조선인이 없었던 탓에 영어가 가능한 일본, 청나라 통역관을 함께 대동해야 했다. 

한 마디로 산 넘고 물 건너 찾은 미국은 이들에게는 신세계였다. 당시 미국인 남북 전쟁 이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고 국가 발전에 가속도를 붙이는 상황이었다. 국제적으로도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강대국으로 자리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미국을 찾은 조선 외교 사절단에게 미국은 조선이 오랜 기간 사대 관계를 유지했던 중국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당연히 젊은 조선 외교사절단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보빙사 일행은 당시 미국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미국 역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상황에서 화려한 한복에 갓을 쓰고 등장한 이들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이들이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왕에게 행하는 큰 절을 올리는 장면은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조선 보빙사 일행의 행보는 언론에 연일 보도됐다. 이 점에서 조선의 보빙사는 조선을 미국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은 큰 관심만큼이나 조선 보빙사 일행을 환대했다. 이렇게 조선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긍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조선과 미국의 수교에는 복잡한 안팎의 사정이 있었다. 조선과 미국의 수교에는 청나라의 입김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당시 청나라는 그들의 위협하는 러시아 세력과 맞서기 위해 외적인 힘이 필요했고 강대국으로 자리한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청나라는 조선을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기 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았다. 

청나라는 적극적으로 조선과 미국의 수호 통상조약을 주선했다. 숨은 의도가 있었기에 그 조약은 조선에 절대 유리하게 체결되지 않았다. 청나라는 조약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임을 명시하려 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청나라로서는 외교 무대에서 조선의 지배권을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고 청나라의 의도는 관철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에게 미국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됐다. 

조선으로서는 청나라가 주도하는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기 어려웠다. 서양 국가와의 수교 필요성은 있었지만, 자주적인 외교는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불가능했다. 당연히 청나라가 조선의 속방이라는 조약 문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미국은 이런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미국의 힘을 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은 조약 내영에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인정받았다. 이래저래 조선으로서는 불공정한 협상이었지만, 중국만을 바라보던 조선에게 미국의 존재는 새로운 희망이었을 수 있다. 

이후 조선은 미국과의 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보빙사 파견에 이어 공사관 설치를 적극 추진했고 상당한 예산을 이에 쏟아부었다. 조선의 미국과의 호의적 관계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으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방해가 있었지만, 조선의 미국에 대한 호의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었다. 미국은 철저히 자국 이익에 따른 외교를 했다. 미국에게 조선은 자신의 상품을 팔고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외교적 신의는 그들에게 크지 않았다. 이후 미국은 조선이 그들에게 경제적 이익에 큰 보탬이 안된다는 판단을 한 이후 외교 관계를 공사에서 영사로 격하했다. 미국은 조선보다는 일본과의 관계가 그들의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다. 결국, 미국과 일본과의 외교적 우호관계를 조선의 미국에 대한 선의를 일종의 짝사랑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는 과정에 조선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미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 미국인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맞교환한 상황에서 조선의 이런 노력은 의미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 조선은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자국의 이익에 따른 변화하는 국제 외교의 흐름에 둔감했다. 조선의 미국에 대한 외교는 또 다른 사대외교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즉,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청나라를 끌어들인 조선이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를 이용하려 했다는 점은 분명 자주 외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미국과의 외교에 있어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더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 그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국제 외교무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노력도 분명했다. 근대 국가로 나가려 하는 시도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었다. 

이렇게 조선의 미국에 대한 보빙사 파견은 역사적으로 평가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만, 당시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했던 일행들의 운명이 크게 엇갈렸다. 이들은 이후 개화파의 중심세력이 됐지만,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온건 대화파와 홍영식,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개화 정책을 점진적으로 진행하려 했고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개화정책 시행을 원했다. 

급진 개화파는 이후 일본 세력을 끌어들인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으로 3일 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홍영식,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개화세력 전체가 큰 타격을 받고 말았다. 내부의 동력으로 개화를 하고 나라는 발전시키지 못하는 조선의 상황이 낳은 비극이었다. 이후 조선은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며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미국에 대한 보빙사 파견은 또 다른 비극적 역사의 한페이지였다.  





사진 : 역사저널 그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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