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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27일 이날은 우리 스포츠사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프로스포츠 리그인 프로야구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은 프로야구 출범에 따른 기념식을 겸했고 프로야구 구단 선수들이 모두 참여했다. 큰 관심 속에 1982년 시작한 프로야구는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역사 저널 그날 302회에서는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문화, 스포츠 정책을 재조명했다. 

프로야구 출범에 대한 시도는 1970년대 이미 있었다. 재일 동포 사업가의 제안으로 논의가 있었지만,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다. 프로 스포츠가 출범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여론의 관심도 크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1979년 12. 12 군사 반란을 시작으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이어진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은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여론과 학살 정권이라는 오명을 지워낼 방안을 모색했다.

스포츠는 정권의 이미지를 바꿀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과거 고대 로마가 콜로세움을 만들고 그곳에서 검투사들의 대결을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정권에 대한 지지를 얻는데 활용하거나 나치 독일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라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얻어낸 예에서 보듯 스포츠는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전두환 정권은 당시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을 고려 프로야구 출범을 추진했다. 1981년 5월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된 프로야구 출범 작업은 정권 차원에서 강력하게 진행됐다. 당시 대통령의 지시가 곧 법이나 다름 업는 상황에서 이에 반대할 이는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체육부를 신설하며 스포츠 육성을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 수장에 정권의 실세인 노태우가 임명됐다는 점은 체육부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런 정권의 의지와 함께 정권 친화적인 방송을 쏟아내며 대통력에 소위 충성경쟁을 하던 방송국의 역할도 컸다.

 



특히, MBC는 1981년 5월 직접적으로 프로야구단 창단을 천명했고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이끌었다. 미디어를 주도하는 방송국이 적극 주도하는 프로야구 출범은 큰 탄력을 받았다. 이런 MBC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KBS는 국풍 81이라는 관제 행사를 주도해 맞대응했다. 국풍 81은 전 국민적인 문화축제를 표방했고 여의도 일대에서 1주일 정도 진행됐다. 연인원 1,000만 명이 이에 참여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그 규모는 엄청났고 역사상 없었던 거대한 놀이마당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이 주도한 프로야구 출범과 국풍 81 행사는 공교롭게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와 그 시기가 겹쳤다. 정권에 의해 진상이 은폐되고 왜곡되긴 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은 대학가와 종교계, 야권을 중심으로 알려져 있었고 상당수 국민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이는 정권에는 큰 부담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반정부 투쟁으로 번지는 일을 막아야 했다. 프로야구와 국풍 81은 이런 정권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이런 정권의 필요에 방송사들이 앞장 섰다는 점은 씁쓸함으로 다가온다. 

이런 정치적 배경과 함께 프로야구 출범은 속도를 냈다. 프로야구단 창단에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정권은 재벌들에게 프로야구단 창단을 사실상 활당했다. 그 결과 각 지역을 연고로 6개의 프로야구단이 창단했다. 서울에는 LG 트윈스의 전신 MBC 청룡, 인천, 경기, 강원지역에는 삼미 슈퍼스타즈, 대전충청은 두산 베어스의 전신 OB 베어스, 호남지역은 KIA 타이거스의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 대구 경북에는 삼성 라이온즈, 부산 경남은 롯데 자이언츠가 창단했다. 

지역 연고제는 당시 고교 야구의 인기 기반이었던 지역민들의 향토애를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다. 프로야구단은 지역을 대표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는 해당 지역민들이 프로야구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야구단은 지역민들의 깊은 관심과 응원 속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정부는 프로야구단 창단에 있어 기업들에 세제지원을 하거나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선수들의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단기사병으로 복무하는 선수에 대해 홈경기에서는 군 복무와 경기 출전을 하도록 허용하는 특혜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지속적인 홍보를 하면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바탕으로 프로야구 구단은 어린이 회원제를 만드는 등 저변을 확대했다. 

이렇게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원년 리그를 시작했다. 그 경기에서 전두환은 직접 마운드에 올라 시구를 하며 큰 관심을 직접 보여주었다.  개막전은 연장 10회까지 이어지는 접전이었다. 그 경기에서 MBC 청룡은 연장 10회 말 터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극적인 승리를 했다. 당시 최강 전력으로 평가되던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한 MBC 청룡의 연장 끝내기 승리는 야구의 묘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경기였다. 이와 함께 방송국이 프로야구 경기 중계 편성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프로야구의 미디어 노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프로야구는 출범과 함께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국민 스포츠로 빠르게 자리했다. 프로야구의 흥행 성공은 축구, 농구, 배구 등 프로스포츠의 영역이 확대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프로야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정권의 필요에 의해 출범했다는 점에서 밝은 면만 가진 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은 프로스포츠뿐만 정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3S 정책이라 불리는 소위 우민화 정책을 전두환 정권은 문화, 스포츠를 활용했다. 

섹스, 스포츠, 스크린의 약자를 합한 3S 정책은 1981년 야간 통행금지제 해제 함께 유흥, 향락 산업의 발전과 스포츠의 활성화, 성인 영화에 대한 검열 완화 등으로 이어졌다. 통금 해제와 함께 도심에는 유흥시설이 크게 증가했고 다수의 성인 영화들이 상영됐다. 유신 시절 성인 영화 상당수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전두환 정권 시절은 달랐다. 하지만 사회고발이나 비판적 시각의 영화는 강력한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정권의 부도덕성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는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한편에서 나온 국민들을 향한 유화책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통해 국민들의 정치 현안에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권에 대한 불만을 희석시키려 했다. 이는 일부 효과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스포츠와 관련하여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대형 이벤트를 유치하며 스포츠 중흥을 위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기간 엘리트 스포츠 역시 큰 발전을 보였다. 정권의 관심과 강력한 지원은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이 스포츠 강국이 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런 정권의 스포츠 등을 활용한 우민화 정책은 완벽하게 성공한 건 아니었다. 특히, 프로야구 초창기 최강자 해태 타이거즈의 선전은 호남인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지역차별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호남인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그들의 울분과 설움을 덜어주는 존재였다.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는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은 덜어내는 공간이었다.

1980년대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5월 18일 기점으로 하는 시기 광주에서 경기 일정이 없었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정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당시 정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추모 열기가 운동장에서 표출되는 걸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역의 아픔을 품고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는 가난한 구단이 가지는 재정적 상황속에 열악한 지원에도강한 훈련과 조직력으로 1983 시즌 우승을 달성한 이후 최강팀으로 자리했다. 

또한, 프로야구의 열기는 국민들의 결집된 힘과 에너지가 모이고 표출되는 하나의 장이고 상호 소통의 통로로 작용했다. 프로야구의 응원 열기는 독재 정권에 대응하는 1987년 6월 항쟁과 닮아있다.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의도대로 우민화되지 않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마음 가득 담아두고 있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과거의 일을 되짚으며 그 시대의 상황을 함께 조명했다. 

이렇게 프로야구의 출범은 스포츠사적인 관점으로만 볼 수 없는 당시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는 프로야구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정권이 주도한 프로야구는 자생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모기업에 절대 의존하는 구조는 리그의 자생력을 약화시키고 모기업의 상황에 따라 프로야구단의 운명이 달라지는 취약한 구조를 만들었다.

출범 당시 6개 구단이었던 프로야구는 10개 구단 체제로 발전했고 외형적인 규모도 크게 확대되는 든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리그 산업화는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고질적인 적자구조는 프로야구단의 독자적인 운영을 어렵게 하고 프로야구 발전을 저해하는 제도도 여전하다. 프로야구 구성원들의 잇따른 일탈행위는 리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외형적 성장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경기력 저하 문제와 야구에 대한 저변 확대 문제도 등한시 되는 문제가 있었다. 앞으로 내실을 다지고 프로야구가 홀로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다면 1982년 출범 당시 정권 주도로 시작한 프로야구의 태생적 한계를 그대로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이제 프로야구는 시대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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