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 운동은 1997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민주주의 발전과 연결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이 사건은 발생 당시부터 오랜 세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었다. 당시 광주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있었다는 정도가 알려진 사건의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촉진되고 군사정권이 그 막을 내린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당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에 저항한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재평가되었다. 또한, 유혈 충돌의 내용 역시 광주지역에 진입했던 계엄군에 의한 무차별적인 무력진압과 민간인에 대한 총격에 의한 희생이 대부분이었음이 밝혀졌다. 사건의 가장 큰 피해 지역이었던 광주는 광주사태의 틀 속에서 사건의 진상을 말하거나 진상 규명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지역감정의 덫이 더 덧 씌워지면서 강한 차별의 그늘에 오랜 세월을 갇혀있어야 했다.
최근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들이 밝혀지고 계엄군의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의 증거들이 더해지면서 국민들은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하고 심지어 북한군 개입설, 불순분자들에 의한 폭동이라는 주장이 여전하다. 그 주장이 지역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오래전 일을 지금에 다시 꺼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존재하다. 당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더 많은 이들이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00회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그 10일의 기록을 되짚어 보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발단은 1979년 12월 12일, 12. 12 군사 반란을 통해 권력 장악의 음모를 드러낸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야욕이 보다 노골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12. 12 군사 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는 이후 K 공작으로 알려진 정권 장악 공작을 치밀하게 진행했다. 언론을 장악해 자신들에 유리한 언론환경을 만들고 정보기관을 독점하면서 권력 기반을 더 강화했다. 신군부가 조정하는 언론은 안보위기, 유신 체제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과정을 사회혼란이라는 프레임 속에 가두며 서서히 정치적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높여갔다.
이후 전두환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올라 기존의 군 보안 사령부와 함께 국가 정보기관을 그의 발아래 두었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정권 유지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던 군과 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하면서 전두환은 사실상 나라의 권력을 손에 넣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전두환의 검은 야욕을 외면했던 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은 뒤늦게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내려진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주의 헌법 개정 등 민주주의 촉진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뒤늦은 일어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제주까지 포함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하려던 국회를 폐쇄하는 한편,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와 구금, 대학교의 휴교령으로 신군부 반대 운동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이로써 신군부는 나라의 정치, 행정, 입법을 모두 장악하며 또 다른 군사정권을 길을 걸었다.
이에 대항해 대학가를 중심으로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불꽃을 되살리려는 시위와 저항이 있었지만, 그 힘을 미약하기만 했다. 이미 안보위협과 국가 혼란 일소라는 명분을 내세운 신군부는 그들이 장악한 언론을 통해 유리한 정보만을 내보냈다. 이는 분명한 사실 왜곡이었다.
1980년 초반 남북은 총리 회담을 위한 준비회담을 진행 중이었다. 군과 미군의 정보망은 북한군의 이상 동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회혼란 역시 긴 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었다 오히려 국가 안보를 내세운 신군부 세력을 12.12 군사 반란 당시 북한군을 남침에 대비해야 한 전방 부대를 서울로 이동해 안보 공백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언론이 통제되고 정보가 일방으로 흐르는 상황에서 상당수 국민들은 신군부의 주장에 동조하는 흐름이었다. 뜻있는 국민들 역시 힘으로 신군부에 대한 저항을 제압하는 서슬 퍼런 신군부의 힘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신군부는 그들에 반대하는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중심으로 충정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진압훈련을 1980년 초부터 진행하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유가 통제된 채 시위 진압 훈련에 내몰린 군인들은 극도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 속에 시위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후 공수부대를 중심으로 한 계엄군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급파해 반대 시위를 제압하고자 했다.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발생한다면 유혈사태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 신군부 시위대는 이런 유혈사태 등을 우려해 스스로 해산하는 결정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게는 정권 장악을 위한 더 이상의 걸림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광주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광주지역에 진입한 공수부대는 5월 18일 전남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 시위대에 무차별적인 무력 진압을 했다. 그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민간인을 포함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특히, 전시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대검을 착장한 계엄군의 시위대에 대한 위해는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불렀다. 당시 시위대 규모는 대학생들 중심이었고 경찰력으로 충분히 제어가 가능했다. 강력한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이들의 행위는 계엄군에 대한 지역 여론을 악화시켰고 시위 양상을 바꾸게 했다.
광주의 민주화 시위는 시민들까지 참여하면서 그 규모가 천명 단위에서 수만 명의 단위로 훨씬 커졌다. 그때라고 무고한 희생이 발생된 무력진압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이 있었다면 상황은 또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계엄군은 병력을 더 증파하고 중화기로 무장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더 강하게 압박했다. 5월 20일에는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상황은 더 악화됐다. 광주시민들은 더 분노했고 더 강하게 뭉쳤다. 5월 21일 전남도청에 집결한 시위대 규모는 10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였다.
이 시위대는 계엄군과 대치했다. 계엄군으로서는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이 필요했지만, 무차별 발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 됐다. 시위 과정에서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자 하는 일부 시위대의 시도가 있었고 과격한 행동도 일부 있었지만,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발표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전시에도 발포와 관련해서 지휘권자의 명령과 승인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계엄 상황이었지만, 민간인에 대한 발포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에 당시 계엄군은 불가피한 상화에서 발생한 자위권 행사 차원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무력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발포권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이나 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인사가 누구였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유력한 이도 다른 이들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런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시위대는 두려움에 물러서기보다는 더 강하게 맞서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경찰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들고 무장을 했고 계엄군과 맞섰다. 이에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했다. 계엄군이 떠난 광주는 잠시 평온을 되찾았다. 민간인들 다수가 무장을 한 상황에서 각정 사건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지만, 광주시민들은 자체적으로 질서유지 활동을 하고 이에 호응하면서 안정을 유지했다. 우려했던 강력 범죄도 없었다. 시민들은 부상자를 위한 헌혈에 적극 나서는 등 질서유지를 위한 고도의 시민의식을 발휘했다. 위기에서 더 강하게 뭉치고 결속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계엄군과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의 폭도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시 외각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부대를 더 증원하고 무장을 강화하면서 광주를 압박했다. 광주는 계엄군에 포위되 고립됐다. 통신마저 두절되어 현지의 상황을 외부로 알릴 수 없었다. 고립된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큰 공포감과 도 싸워야 했다. 시 외각에 자리한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함과 동시에 그 지역의 민간들에 대한 총격과 무력 사용으로 희생자를 더 늘리는 일을 했다. 희생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마치 전시상황에서 적을 사살하는 듯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거나 하는 일이 발생한 상황은 아니었다. 계엄군에게 광주시민은 싸워서 섬멸해야 할 대상이었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사실상 적의 기세를 꺾고자 하는 일이었다. 이성이 마비된 이런 행동은 무장을 했다고 하지만, 무장의 정도에서 큰 차이가 있고 전투의 숙련도가 떨어지는 광주 시민들, 국민들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계엄군 간 오인 사격으로 인한 군인의 희생을 광주 시민군과의 교전으로 인한 전사로 둔갑시키거나 그 분풀이로 인근 지역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지옥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있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다. 계엄군의 광주 시내 재 진입을 시간문제였다. 그에 따른 유혈 충돌도 예상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시민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시민 군 내부에서도 강온파의 대립이 있었다. 온건파는 무기를 반납하고 질서유지에 협조하자는 입장이었고 강경파는 계엄군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 시민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광주지역 저명인사들을 중심으로 더 이상의 희생을 막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계엄군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할 뿐이었다. 이에 일부 시민 군들은 도청에 남아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를 중심으로 한 계엄군은 도청에 진입해 잔류하고 있었던 시민군을 제압했다. 애초부터 싸움이 될 수 없는 진압작전이었다. 그렇게 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계엄군에 총탄에 사망하거나 체포됐다. 그렇게 광주민주화운동은 종료됐다. 광주를 장악한 계엄군은 이후에도 일상의 삶을 이어가던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추가적인 사상자가 늘었다. 계엄군은 그들의 진압작전 성공이 자랑스러운 기억일 수 있었지만, 광주시민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이후 거침이 없었다. 이후 전두환은 정치인으로 변신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7년간 집권했다. 이 기간 그는 절대권력자로 자리했다. 그에게는 그 7년의 최고의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우리의 민주주의 후퇴했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저항과 투쟁 과정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컸다. 또한, 군사독재의 잔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단적으로 신군부의 수장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을 초래한 전두환은 법적인 단죄를 받았지만, 여전히 안락한 여생을 즐기고 있다. 그와 협력했고 추종했던 세력들의 입지도 여전히 든든하다.
이런 현실에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화와 왜곡이 끊이지 않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일 수도 있다. 당시 계엄군의 자료를 그들의 입장에서 크게 왜곡되고 불리한 부분이 삭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과거사 위원회 활동으로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가 재정립되고 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과 그 의미가 국민 모두에게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은 그 지역의 문제이고 피해자들에 대한 특혜가 지나치다는 인식이 곳곳에 남아있다. 특별법 등으로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고 있지만, 여전히 광주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 역사의 자랑스러운 한 부분이고 중요한 교훈이 되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진실을 끊임없이 밝히고 알려야 한다. 정당하지 못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국민들의 희생은 절대 정당화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광주 시민들은 그런 정권에 맞서 싸웠고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광주가 아니었다면 또 다른 곳이 그 대상이 될수도 있었다. 이런 광주의 희생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자양분이 됐고 민주화 세력들이 뭉칠 수 있었다. 고통의 역사 이전에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이기도 한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 또는 지역의 이해로 재단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려 하는 이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은 소중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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