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사망한 이후 정국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종신 집권을 위한 유신 체제 속 20년 가까이 절대 권력을 지켰던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의 부재로 인한 일이었다. 권력 공백기였지만, 한편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도 가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최규하는 긴급조치를 해제했다. 이를 통해 가택연금 등으로 정치 활동이 불가능했던 김영삼, 김대중 등 야권 지도자들이 정치 일선에 복귀했고 투옥 중이던 민주화운동 인사들도 풀려났다. 최규하 대통령은 1년 내에 개헌과 함께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차기 정부 이양을 약속했다. 멈췄던 민주주의 시계가 다시 작동했다.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 한편에서는 권력을 향한 큰 야욕을 가진 군부세력이 있었다. 군내 대표적 사조직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내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군대를 서울 중심부로 진입시키고 유혈사태를 촉발한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군 요직을 독점했다.
이는 신군부의 권력 장악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이는 일이었다.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까지 권력 찬탈을 위한 작업을 서서히 치밀하게 전개했다. 소위 K 공작이라 불리는 이 과정을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9회에서 이야기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10.26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독재의 시대를 끝내고 민주주주의 시대로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야권 지도자와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리더라 할 수 있는 김종필은 차기 대권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후 이들은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이어가며 우리 정치사를 이끌었다. 이른바 3김 시대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차기 대권에 대한 경쟁에 집중한 탓에 눈앞의 위협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에 대해 충분히 의구심을 가지고 경계를 해야 했지만, 이를 위한 움직임이 없었다. 또한, 군 통수권을 가진 최규하 대통령과 행정부 관료들도 전두환의 위협에 대한 선제적인 조치가 없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전두환의 세력이 그만큼 강하기도 했지만, 군사 반란 세력의 정권에 대한 야욕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치권과 행정부는 향후 정치일정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개헌과 관련한 공방과 차기 권력을 위한 경쟁이 더 중요했다. 함께 맞서 싸워야 할 적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이 상황에서 전두환의 신군부는 보안사령부를 통해 여론 동향을 파악하고 정치 전면에 나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는 K 공작이라는 그들의 프로젝트로 본격화됐다. K 공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언론장악과 이를 통한 우호적 여론 조성이었다. 지금과 달리 언론의 보도가 정보 제공의 절대적 수단이자 통로였던 상황에서 언론장악은 여론의 향방을 자신들에게 돌릴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신군부는 야권의 대선 주자들에 대한 부정적 기사를 싣게 하고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도록 했다. 여기에 안보 불안과 사회혼란의 이슈를 부각시켜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 환경을 만들었다. 또한, 신군부에 비판적인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그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인들을 포섭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기자 출신의 언론인 허문도는 신군부 편에서 큰 역할을 했고 훗날 전두환 정권에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했다. 이런 언론 공작을 통해 신군부는 그들에게 유리한 언론 지형을 만들었다.
또한, 전두환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몸을 낮추며 정치에 관심이 없을 천명하는 방법으로 그에 대한 의구심을 희석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후 사회혼란 상황과 함께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과정에서 전두환은 서서히 언론 노출 빈도는 높였다. 이를 통해 그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로서 이미지메이킹을 했다.
언론공작과 함께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중심으로 일명 충정훈련을 통해 시위 진압 훈련을 지속했다. 이 훈련은 실제 시위 상황을 재현하며 실전과 같은 훈련을 했다. 신군부는 그들에 반대하는 세력의 움직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시위 진압을 위한 준비를 사전에 하고 있었다. 실제 공수부대는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투입되기도 했다. 정작 북한의 위협이 커지는 안보 위기라는 논리를 펼치면서도 신군부는 군사 반란 과정에서 전방부대를 활용하고 시위 진압 목적으로 훈련을 하도록 했다. 그들의 권력 찬탈을 위해 군을 사적으로 이용했다.
이렇게 우호적인 여론 조성과 군사적 대비를 한 신군부는 점차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1980년 4월 전두환은 자신의 의지대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일종의 중앙정부부장 대리를 맡았다. 그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장기간 공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이미 또 다른 정보기관인 보안사령부의 수장이었던 그의 중앙정보부장 임명은 겸직 금지 등을 규정한 법률과 배치되는 일이었다. 이에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라는 편법을 활용했다. 이를 통해 나라의 양대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은 사실상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런 전두환의 움직임은 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는 여론의 반발을 피하는 기법을 활용하면서 서서히 권력을 장악했다. 정치권과 행정부는 전두환의 위협에 함께 맞서야 했지만, 차기 권력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 다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을 학생회 조직을 재건하는 한편, 이를 중심으로 조속한 민주화와 유신헌법 철폐와 개헌, 비상계엄의 해제 전두환 퇴진을 주장하며 가두시위를 지속했다. 대학가는 전두환의 야욕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에 맞섰다.
하지만 학생회 조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체계적인 투쟁을 할 역량이 부족했다. 또한, 이런 학생시위에 대한 언론들의 부정적 보도가 지속되면서 학생 세력들과 일반 국민들의 괴리가 커졌다. 학생들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 명분이 충분했다. 언론은 대학생 시위대 주장의 내용 대신 시위의 과격성을 크게 부각했다. 사회불안과 안보 불안을 앞세운 언론 보도는 국민들에게 학생시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었다.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대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신군부 반대를 위한 대규모 시위로 그 세를 과시했다. 이에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서울 시내로 진입시키면서 강경 진압 가능성을 높였다. 이미 외출 외박, 휴가를 통제하면서 강도 높은 시위 진압 훈련을 지속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에 대한 적대감이 최고조에 있었다. 만약 이들이 시위 진압에 나선다면 유혈사태도 우려됐다. 이는 시위대 내부에서도 우려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학생 시위 지도부는 시위 지속 여부를 고심했고 해산을 결정했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계점과 불리한 언론 지형에서 그들의 주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상황, 공수부대와의 유혈사태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훗날 서울역 회군이라 불리는 이 결정으로 신군부에 대한 반대 투쟁은 동력을 더 잃고 말았다.
대학생 시위대의 움직임이 둔화된 상황에서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전격 발표했다. 그전까지 비상계엄 지역이 아니었던 제주가 포함되면서 계엄사령부의 권한이 한층 커졌다. 이는 군부의 힘이 대통령과 동급이 되는 일이었다. 계엄사령부가 이미 신군부 인사로 채워진 상황에서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신군부의 정권 찬탈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된 신군부는 권력 장악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강행했다. 대학 휴교령을 통해 대학생들의 시위를 원천 봉쇄했다. 5월 20일 소집되어 비상계엄을 해제하려 했던 국회를 봉쇄했다. 또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 지도자들을 구금하거나 가택 연금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비상계엄의 해제, 민주화 촉진에 대한 합의를 하고 협력을 약속했지만, 뒤늦은 일이었다. 나라의 정보와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는 한발 빠른 조치로 정치권 움직임을 무력화했다. 최규하 대통령 체제의 행정부 신군부의 움직임에 무력하기만 했다.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로 신분구는 군과 행정부를 장악했고 정치 작동을 중지시켰다. 얼마 전 붕괴된 유신 체제와 같은 또 다른 독재 정권의 탄생이었다.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거칠게 없었다. 그들은 헌법을 그들 입맛대로 바꾸고 유신 체제와 같은 또 한 번의 체육관 선거로 전두환을 대통령 자리에 올렸다. 제5공화국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유신 체제 붕괴 이후 찾아왔던 서울의 봄은 봄이 한창이었던 1980년 5월 차가운 겨울 속으로 사라졌다. 신군부의 용의주도한 공작이 있었지만, 당시 신군부 세력의 야욕을 감지하지 못한 당시 사회 지도층들의 실책이 큰 원인이었지만, 유신 체제 속 정보기관과 군을 장악하며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왜곡된 권력 구조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도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그 과정이 중요하고 이를 방해하는 요소들들 법과 제도로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시계는 가만히 놔둔다고 흘러가지 않는다. 당시 정치권을 차기 권력에 대한 경쟁 이전에 민주주의 시계가 빠르게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시급했다. 민주주의 제도가 완성되지 않는 상황에서 권력을 위한 경쟁을 무의미했다. 이는 신군부가 권력을 향해 파고들 수 있는 틈을 내주는 일이었다. 최근 군사 쿠데타로 문민정부가 무너진 미얀마의 모습을 많은 시사점이 있다.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많은 이들의 희생과 국민적 노력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는 국민들이 의식수준도 높아졌다. 다양성이 보장된 다원화된 사회에서 정보 획득의 수단이 다양화되고 국민들의 여론이 빠르게 정치, 행정 분야에 전달되고 있다. 그 어느 세력도 섣불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 운영의 시스템을 파괴할 수 없다. 얼마 전 우리 국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사유화하고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한 권력을 법치에 의해 탄핵했다.
그만큼 우리 민주주의 더 발전했다. 민주주의는 획일적인 의사결정이 아닌 치열한 토론과 여론의 지지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 복잡하고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 국민은 이런 민주주의 과정을 기다릴 수 있을만큼 성숙했다. 이제는 자유롭게 권력을 비판할 수 있고 정치적 성향에 따른 불이익도 없다. 심지어 헌정을 파괴한 독재세력들과 신군부 세력들조차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건 민주주의를 파괴한 과거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단죄는 분명히 이루어져야 하고 현대사에서 이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은 반드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는 보수, 진보 등 이념과 이해관계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이런 아픔의 역사는 결코 미화되어서도 안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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