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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은 또 다른 10년인 1980년을 앞둔 시점이었거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날이었다. 그날 청와대 인근 궁정동이 안가에서 수차례 총성이 있었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사상자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최측근 인사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10. 26 사태로도 불리는 그 사건으로 1970년대 우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했던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다. 이로써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고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선포로 종신집권을 길을 갔던 박정희 대통령은 허무하게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7회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부른 1979년 10월 26일 그날의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다시 살펴봤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는 그날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 자리에서 권총을 휴대하고 참석했다. 당시 그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경호실장 차지철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권력의 핵심 인사들이 함께 한 그 자리에서 이들은 당시 중요한 현안인 김영삼 당시 야당 대표의 국회의원 제명으로 촉발된 부산 마산 지역의 부마 민주화 항쟁에 대한 대응과 각종 정치 현안과 관련한 말들이 오갔다. 

 



그 자리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부마항쟁의 대처를 두고 강한 의견 대립이 있었고 결국, 거친 언사가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은 강경한 대응을 주장했다. 그는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국민들에 대한 무력진압도 불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가 과거 수백만 명의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된 과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례까지 거론하며 무력 진압의 당위성을 박정희 대통령에 건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에 동조하면서 김재규와 대립했다. 그는 부마민주화 항쟁이 국민들의 정권에 저항하는 민란으로 규정하고 민심을 달랠 수 있는 유화책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배척되었고 큰 질책을 받았다. 순간, 김재규는 가지고 있던 권총을 발사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사망케 했다. 이후 그는 미리 저녁 약속을 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대기하던 인근 안가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알렸고 함께 육본으로 향했다. 이후 김재규는 비상계엄의 선포 등 수습책을 그 자리에 온 정부 각료들에게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재규는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 비서실장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리면서 체포되었다. 곧이어 구성된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등을 거쳐 그는 재판을 받았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그는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동기와 함께 우발적 사건이었는지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첫 번째 이유로는 가장 많이 알려진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갈등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은 여러 가지로 큰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육사 2기 출신에 구미 출생으로 고향도 같다. 이런 배경과 인연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근 시절부터 요직을 두루 거쳤고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그는 건설부 장관에 이어 중앙정보부장으로 기용되며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권력의 핵심 기관인 중앙정보장은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이기도 했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각종 공작으로 국내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고 사회, 경제, 문화 등 국가 운영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권력의 2인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지철 경호실장의 등장으로 그의 위상을 크게 떨어졌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한참 적은 나이에 군 경력도 중령이 마지막 계급이었다. 그나마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대위에서 급격히 진급한 경우였다. 군 예편 이후에도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무게감에서 그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다만,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지근거리에서 당시 박정희 소장을 수행했다는 경력은 그가 박정희 대통령과 강하게 연결되는 고리였다. 이후 그는 육영수 여사의 천거로 중용됐지만, 권력자의 최측근까지 가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발생한 육영수 여사의 피격 사망사건은 차지철이 급부상한 계기가 됐다. 영부인의 피격 사망에 박정희 대통령의 상실감을 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측근 정치를 한층 더 강화하는 원인이 됐다. 그 와중에 차지철은 경호실장으로 발탁됐다. 화려한 이력은 없었지만,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행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불안감을 덜어주었다. 

그가 경호실장이 된 이후 차지철의 입지는 나날이 강해졌다. 그는 각하의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대통령과 각 부분 인사들의 만남을 통제했다. 대통령과의 대면은 모두 차지철의 거쳐야 했다. 각종 보고서류도 그의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지철은 대통령의 총애를 바탕으로 월권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정보를 독점했고 정치와 행정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대신한 그는 소위 문고리 권력으로 군림했다. 사실상 차지철은 권력의 2인자였다.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한 일이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도 명령을 하는 등 그를 지속적으로 자극했다. 대통령의 마음이 차지철에 기운 상황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불만은 쌓여만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집권기 강력한 2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2인자 층의 경쟁과 충성 경쟁을 유도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하지만 차지철에 대한 편애는 이런 권력 2인자들의 균형추를 무너뜨렸다. 문제는 차지철이 명석한 판단력과 국가 경영의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차지철에 대한 불만은 김재규뿐만 아니라 정치, 행정 전반에서 커졌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일이었다. 이런 불만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통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날이 커지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갈등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뇌관이었다.

이후 10.26 사태 이후 사건을 수사한 합동수사본부의 발표에서도 2인자간의 갈등이 사건의 큰 원인이었음을 밝혔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용인술의 실패이기도 했다. 유신 체제의 균열이 심화되던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 정치는 더 극에 달했고 그 와중에 2인자들의 균형을 스스로 깨뜨린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결국, 비정상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 속에서 이런 비극은 내재되어 있었다. 

다른 시각도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사건 이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로 그의 행동이 개인적 원한이 아난 대의를 위한 일이었다 주장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역할을 하면서도 유신 체제에 대한 문제점과 변화의 필요성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는 김영삼 야당 총재의 국회의원 제명으로 파생된 부마민주화 항쟁의 현장을 직접 조사하면서 대통령과 경호실장의 야당의 사주와 조정에 의한 일이 아닌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저항의 표출, 민란으로 판단했다. 

그는 강압적인 진압보다는 국정쇄신이 우선임을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배척됐고 대통령의 뜻을 거스른 그의 입지는 더 흔들렸다. 결국, 그는 유신 체제를 스스로 끝내는 방법을 찾았고 이는 대통령의 암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이를 통해 부마민주화 항쟁의 강제진압으로 파생될 국민들의 다수 희생을 막았고 민주주의 회복의 길을 열었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유신 체제를 수호하고 지키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79년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여성노동자들을 폭력 진압한 YH 사건을 주도한 인물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정치공작을 이끌었던 것도 그였다. 그의 선택이 순수한 의도였을지에 의문이 드는 이유다. 

또한, 사건 직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행동도 사전 계획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암살 시도 직전에서야 그의 결심을 중앙정보부 최측근들에게 알렸다. 또한, 암살 이후 행동도 치밀하지 않았다. 그는 사건 현장을 보존하지 않았고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맡기고 자리를 떠났다. 각종 공작에 능한 중앙정보부라면
사건을 충분히 조작할 수 있었고 차지철에게 암살 혐의를 뒤집어 씌울 수 있었다. 당시 차지철은 대통령의 최 측근 인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수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던 차지철이었다. 그가 육본으로 향하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향했다면 공작은 한층 더 용이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와 박정희 정권의 불편한 관계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을 얻는 노력을 할 수도 있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암살 후 일처리는 서툴고 어설펐다. 대의를 위해 계획된 일이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그가 군을 장악하기 위해 자산의 측근 인사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은 우발적 사건이라 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여러 가지로 10.26 사태는 원인과 전개 과정 등 사건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프로그램에서도 이를 언급했다. 사건과 관련한 내용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진술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고 실체적 진실을 다 밝히지 못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 

사건을 수사했던 합동수사본부의 수장이 신군부 세력의 중심 전두환이었다. 권력에 대한 야망이 컸던 그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되면서 권력 상층부의 은밀한 부분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군을 장악하는 것이 권력을 잡는 가장 중요한 일일을 충분히 인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얼마 안 가 전두환의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으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런 신군부에게 10.26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기대하는 건 애초 무리였다. 

10.26 사태는 헌정 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통해 유신 체제가 붕괴되고 잠시나마 민주주의 부활 가능성을 볼 수 있어다. 체제 붕괴의 위기 속에 폭력성이 극에 달했던 정권의 상황은 엄청난 희생을 불러올 수 있었다. 자칫 부마민주화 항쟁이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의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는 최근 들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아직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고 10.26에 대해서는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더 명확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사건과 관련한 더 많은 사실이 알려져야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10.26 사태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정치권력이 비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붕괴됐다는 점이다. 더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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