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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물줄기를 바꾸는 사건이 발생했다. 10.26 사태 이후 비상계엄 체제에서 계엄사령관과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있었던 정승화 대장이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에 의해 체포됐기 때문이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군내 하극상이었고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이 재가를 득하지 않은 군사 반란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방을 지켜야 한 군대가 서울 중요 시설에 진출했다. 

12월 12일 밤과 다음날 새벽 사이에 발생한 이 사간은 국민들은 혼란스럽게 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민주주의의 복원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신군부 세력이 권력 중심에 서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2. 12 군사 반란에 대해 세심하게 다뤘다. 

12. 12 군사 반란은 이를 주도하고 이를 발판으로 1981년 3월 3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우선 필요하다. 12. 12 군사 반란 당시 보안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전까지 그는 국민들에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안 사령부는 박정희 정권을 유지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차지철의 경호실과 함께 각종 정보 수집을 관장하는 보안 사령부의 역할은 매우 컸다. 보안 사령관은 권력의 중심에 근접한 자리였다. 이미 전두환은 박정의 정권에서도 큰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은 쿠데타 이후 있었던 육사 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주도했다. 최고 엘리트 집단 중 하나였던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는 쿠데타 세력들에게는 큰 호재였다. 당연히 이를 주도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력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력의 사적 행사에도 동행하는 등 박정희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체제에서 군 요직을 두로 거치며 군내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군장악에 있어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두환에 대한 신뢰는 전두환이 주도하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크 세력을 키우는 데 있어 결정적 요인이었다. 하나회는 육사 졸업생 중 성적이 우수한 영남 출신을 선별하여 가입을 받았다. 육사라는 학연과 영남이라는 지역기반으로 뭉친 하나회는 강한 결속력으로 뭉쳤다. 그들은 군 요직을 독점했고 진급과 보직에서 큰 혜택을 받았다. 군내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조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군 지휘체계를 무너뜨리고 인사와 군의 운영과 관련한 공정성을 저해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하나회의 힘은 군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나회를 주도한 전두환과 육사 11기는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로 개편되고 장교 육성 기관으로 자리 잡은 시기 초초 입학한 인문들이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남북 대치의 상황과 군사정권의 지원 속에 가장 우수한 교육 시설과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 졸업생은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이런 엘리트 의식을 하나회를 조직을 통해 결집했다. 하나회 조직원들에 대한 각종 보상은 조직에 대한 강한 충성심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충성해야 할 엘리트들이 그들의 조직에 충성하면서 강력한 이해집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군사 반란을 위해 그들을 뭉치에 하는 원동력이 됐다. 훗날 하나회 출신들은 전두환 정권 체제에서 권력의 실세로 군림했다. 

박정희 대통의 총애와 하나회라는 막강한 조직을 관장하는 전두환은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군 경력을 쌓았고 권력과 지근거리를 유지했다. 유신 체제는 그와 그를 추종하는 하나회 인사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10.26 사태와 함께 박정희 유신 체제가 붕괴되면서 하나회 조직은 큰 위기를 맞이했다. 든든한 배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군내 부정적 기류가 터져 나올 수 있었다. 10.26 사태 이후 계엄사령관 자리에 오른 정승화 대장은 하나회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고 전두환의 보직을 지방으로 변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권력에서 멀어지는 건 전두환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또한, 10.26 사태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대통력 자리에 오른 최규하 대통령은 스스로를 과도기 정권으로 규정하고 민주화와 함께 개헌 이후 정권 이양을 약속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선포된 긴급조치를 해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민주화 운동 인사들 대부분이 석방되기도 했다. 민주주의 복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변화는 전두환과 하나회 인사들에게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전두환은 자신에게 껄끄러운 상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제거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시기만을 저울질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를 위한 명분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보다 상관인 대장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사유가 있어야 하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재규의 관계를 이용하기로 했다. 알려진 대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10.26 사태 당시 김재규의 저녁 식사 요청으로 사건이 발생했던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는 이후 안가에 머물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서 대통령 유고를 알리고 그와 함께 중앙정보부로 향했다. 김재규와의 동행은 사전 공모의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김재규를 설득한 육군 본부로 함께 이동하도록 했고 사건의 내막을 인지한 이후에는 김재규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의 대응은 김재규와 사전 모의를 했다고 할 수 없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언론을 통해 직접 발표한 중간 수사 결과에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재규의 연관성은 부인됐다. 이런 수사 결과를 뒤집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체포는 분명 명분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의 체포를 위해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과정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전두환과 하나회 세력은 상황 반전이 절실했고 군권 장악이 필요했다. 군대를 동원한 무력 사용도 서심치 않았다. 실제 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회 세력의 존재는 군사 반란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됐다. 조직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이들에게 민주주의 가치와 대통령 유고에 따른 나라의 안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은 스스로 최규하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삼청동 총리공간으로 향했고 반란 세력들은 서울의 모처에 모였다. 또 한편으로 그들에 저항할 수 있는 장성들을 비밀 요정으로 초청해 접대하면서 반란에 대한 대응을 무력화했다. 보안 사령부의 체포조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공관으로 향해 체포 작전을 전개했다. 그 계획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거부로 흔들렸다. 사전 재가 후 체포는 할 수 없었고 체포조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부관 등을 사살하고 강제 연행을 단행했다. 

이후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었던 전방의 9사단 병력 일부와 하나회 세력의 군대가 서울로 진입해 육군본부 등 주요 기관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움직임도 있었지만, 군사적 충돌에 따른 유혈사태 우려와 북한군에 대한 안보위협 등으로 진압군의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을 지휘해야 할 국방부 장관은 사태 발생 후 몸을 피신하면서 실종 상태가 되어 사태 해결을 더 어렵게 했다. 

최규하 대통령 역시 군사 반란에 대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군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에 대통령 또한 무력했다.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13일 새벽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체포 안을 재가하면서 군사 반란은 마무리됐다. 최규하 대통령은 재가 과정에서 서명일자를 함께 써놓아 사후 재가임을 명확히 했다. 이는 훗날 군사 반란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됐다. 

12. 12 반란 성공으로 신군부 세력은 군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권력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재판을 통해 내란 방조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되는 수모를 겪었고 신군부의 반대편에 있었던 장태완, 정병주 등의 장성들도 예편당했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 주요 요직을 차지했다. 이들은 군사 반란 성공 직후 연예인들까지 동반한 축하 파티를 열며 그들의 성공을 자축했다. 그들의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파티 장면은 방송을 통해 화면으로 볼 수 있었다. 소위 작전명 생일 집 파티로 명령된 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은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이후 신군부 세력은 나라의 권력을 하나하나 장악했고 떠 다른 군사정권을 창출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국민들의 저항은 무력 진압을 통해 무력화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의 유혈 진압은 신군부 세력의 부도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유신체제 붕괴 후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들의 뜻과는 거리가 먼 정권이었다.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 속에 하나회 인사들이 권력을 핵심을 차지했고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사실상 유신 체제의 연장과 다름없었다. 이는 민주주의 시계를 다시 거꾸로 돌리는 일이었다. 

정당성을 잃은 권력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과 미디어 장악, 우민화 정책을 추진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권력기관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다수의 희생이 발생했다. 또한, 정치와 돈이 결합하는 정경유착의 폐습을 그대로 답습하며 건강한 경제체제로의 발전을 저해했다. 그 과정에서 축적한 부정 축재 재산을 기반으로 신군부 세력들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반성과 진솔한 사과 역시 없다. 신군부 세력의 중심인 전두환의 최근 행보가 이를 대표하고 있다. 그는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노태우와 함께 김영삼 정부 시절 특별법을 통해 군사 반란과 재임 시 각종 비리에 대한 단죄를 받았다. 이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는 모두 박탈됐다. 보통의 경우라면 자신의 일에 대한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이들에게 대한 사과 역시 없다. 

그는 돈이 없이 각종 추징금을 내지 못하지만, 전 재산의 전부라는 29만원 무한 리필 통장을 통해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의 일가친척 역시 엄청난 부를 과시하고 있다. 한때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사로서의 책임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에 대한 사면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권력을 사유화했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고 이것만으로도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이들에게 동조하여 각종 이익을 얻었던 이들 역시 이에 자유로울 수 없다. 이들은 이후에도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강한 카르텔을 이루고 있다. 신군부 세력들이 여전히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힘이 있어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 민주주의는 신군부 세력들과 같이 민주주의 파괴한 이들에 의해 위협받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발전해 왔다. 이제는 군에 의한 정권찬탈 등의 위협을 걱정하기 않아도 될 정도로 성숙된 민주주의 시스 템을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더는 용납되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는 성숙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신군부 세력들에 대한 큰 복수일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의 현대사에서 그들의 잘못을 명확히 하고 그 죄상을 쉼 없이 알리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그 점에서 12.12 군사 반란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장면이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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