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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95회] 임진왜란의 중요한 분기점,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1. 6.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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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신년을 맞이해 국난 극복의 중요한 역사 장면인 임진왜란과 6.25 한국전쟁을 1, 2부에 걸쳐 다룰 예정이다. 그 1부인 295회에서는 1592년 시작되어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 중 평양성 전투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았다. 

임진왜란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당시 일본을 통일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일본의 권력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시작된 전쟁으로 온 국토가 전쟁터가 된 조선은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다. 그 피해는 이후 청나라가 침략한 병자호란의 피해가 더해지며 조선 후기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이후 조선은 급속한 보수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을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하는 은둔의 국가로 만들었고 나라 발전의 기히를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는 이후 일본의 침략과 강제병합, 35년간의 식민지 시대라는 암흑기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은 그 점에서 조선의 역사를 그전과 그 후로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궁극적으로 원했던 대륙 진출에 이르지 못했지만, 조선의 앞선 문물이 유입되면서 나라를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 유입된 도자기 기술은 이후 일본에서 크게 발전했다. 

 

 



임진왜란의 초기 전황은 조선에 크게 불리했다. 조선은 일본의 전면전에서 대한 대비가 없었다. 조선 중기 이후 지속된 평화시기에 조선은 군사력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조세, 군역 등 국가 운영 시스템도 곳곳에서 허점을 보였다. 사람 세력이 수차례 사화를 겪는 어려움에도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정치 주류 세력이 됐고 이는 한정된 관직을 두고 정치세력 간 극심한 대결을 불러왔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된 정치권이 대립은 정치무대에서 신권의 강화와 함함께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 형태의 토론과 합의를 이루기보다는 국가 현안에 대한 빠른 결정을 어렵게 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사대를 기본으로 하는 외교정책은 일본의 위협에 대한 예측과 대응도 어렵게 했다. 

이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그 승부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부산을 장악한 이후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조선은 마지막 희망이었던 신립 장군의 중앙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제대로 일본군에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전쟁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했고 전국시대 오랜 내전을 거치면서 전투력이 크게 향상된 군대가 있었다. 또한,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들여온 신 무기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총은 사거리가 100~150미터 안팎이었지만, 조선군이 전혀 접하지 않았던 신무기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총알에 아군이 쓰러지는 상황은 조선군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군은 2달 만에 도성인 한양을 거쳐 평양성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일본군은 조선의 왕 선조를 잡으면 전쟁을 빠른 시일 내 끝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는 일본 전국시대 그 지역의 최고 수장을 굴복시키면 그 지역을 장악했던 그들의 전쟁 방식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예상과 달리 선조는 빠르게 몽진하여 평양에 이어 명나라 국경에 위치한 의주까지 이동했다. 조선은 한편으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임진왜란은 이재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닌 국제전이 됐다. 이는 일본의 예상과 달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었다. 

프로그램에서 다른 평양성 전투는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로 조명됐다. 평양성은 일본군의 최북단 전선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으로서는 평양성 탈환을 통해 수세적 흐름을 공세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평양성 탈환을 위한 시도는 수차례 있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평양성은 몇 겹의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면이 강으로 막힌 천혜의 요새였다. 고구려의 도성이자 고려 시대 북부의 요충지였던 평양은 단단한 성을 축조한 상태였다. 

하지만 1593년 1월 철옹성과 같았던 평양성은 조명 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다. 조명 연합군은 앞선 군사 숫자와 적절한 유인작전 등으로 일본군을 평양성에서 몰아냈다. 이후 일본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전선은 조선의 남부 지방을 변경됐다. 일본의 개전 조기 수세에 몰렸던 조선으로서는 공세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평양성 전투는 그만큼 임진왜란에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 

이런 전쟁 양상 변화를 프로그램에서는 몇 가지로 그 이유를 찾았다. 우선 무기의 우위를 들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은 사거리가 월등한 대포로 공성전을 펼치던 일본군을 공략했다. 500미터에서 1000미터로 추정되는 대포의 사거리는 조총보다 훨씬 길었고 파괴력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이는 병력 수를 초월하는 개임 체인저였다. 

대포의 위력은 오스만 제국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점령에도 위력을 떨쳤다. 콘스탄티노플은 동서 교역의 중심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위치의 중요성만큼이나 좀처럼 뚫기 힘든 철옹성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있어 역사상 최대의 대포를 동원했고 그 대포는 성벽을 파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장거리 대포가 전쟁에서 가지는 위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였다. 평양성 전투에서도 무기의 차이는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빛 나는 승리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승리의 요인이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수군은 접근전을 펼쳐야 했지만, 조선 수군의 배에 이르기도 전에 대포에 함선이 파괴되기 일쑤였다. 또한, 조선군은 이후 비격진천뢰 등 신무기를 활용해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이런 첨단 무기의 활용은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있었다. 

임진왜란의 또 다른 변수는 강력한 겨울 한파였다. 평양성 전투가 있었던 1월은 겨울 중 가장 추운 시기였다. 이는 일본군 병사들에게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추위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온화한 기후로 겨울 기온도 우리보다 크게 높다. 당연히 조선 땅에서 경험한 추위는 큰 고통이었다. 단기전을 예상한 일본군은 겨울에 대비한 피복 등 방안 용품을 준비하지 못했다. 이는 전투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기록에도 일본군 상당수는 전투 중 전사자보다 동상에 의한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조선과 명나라 군은 겨울에 대한 적응력이 상대적으로 컸고 나름의 준비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세 역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일본이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있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강력한 함포와 잘 훈련과 군사들을 바탕으로 일본 수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조선 수군은 일본의 수군과 육군이 동시 병진 작전을 좌절시키는 한 편, 남해안의 재해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대규모 수군을 투입했지만, 1592년 8월 이순신의 수군 연합함대는 한산도대첩이 승리로 남해안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행주대첩과 1차 진주성 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평가되는 한산도 대첩의 결과 일본군은 바다로부터의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수군의 활약과 함께 육지에서는 관군의 역할을 대신한 의병들의 활약이 있었다. 각 지역별도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은 지역을 지키는 것 외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뭉친 민간의 전투병이었다. 각지의 의병장과 함께한 의병은 소규모 전투로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한 편, 육로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미 조선의 북부지방으로 진출한 일본 주력군은 바다와 육지의 보급선이 불안해지면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보급은 현대전에서도 전쟁이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전쟁 수행을 위한 중요한 요소 하나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군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점령지를 약탈하는 등 방법으로 자체적으로 필요한 보급을 했지만, 전쟁이 장기전이 되면서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의병들의 존재는 자체 보급도 어렵게 했다. 수군과 의병의 존재는 개전 초기 어려움을 겪던 관군들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벌어주었고 명나라 원군과 함께 공세 전환의 발판이 됐다. 의병의 역사는 이후에도 이어져 조선 말기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으로 이어졌고 독립군으로 그 역사가 이어졌다. 의병은 관직이나 댖가를 바라지 않고 일어난 자발적인 군대로 국난 극복을 위한 국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당시 국민들은 전쟁 후 무기력했던 조선 정부에 대한 반감을 접고 침략자들을 응징하려는 마음으로 뭉쳤다. 이런 자발적인 민간의 군사조직은 일본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전쟁의 양상을 바꾼 또 한 가지는 리더 광해군의 등장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급히 세자 자리에 올랐다. 정실 자식을 후계자로 세우고자 했던 선조는 후공의 아들인 광해군에의 세자 책봉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후계자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다. 18세의 나이네 세자 자리에 오른 광해군은 변변한 세자 책봉식도 할 수 없었다. 선조는 이런 광해군에게 정부를 둘로 나눠 분조의 책임자 자리를 맡겼다. 광해군은 졸지에 최 전선에 나서야 했다. 아직 10대의 청년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일본군의 위협에도 분조의 위치를 수시로 변경하며 전쟁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냈다. 광해군은 과감함과 함께 필요한 조치를 과감히 했다. 각 지역의 수령들이 공백을 메울 인사권을 행사했고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을 독려하고 지휘권을 행사했다. 전투에서 공은 세운 사람에게는 지휘고하를 가리지 않고 포상을 하며 사기를 드높였다. 개전 초기 도성을 버린 임금과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컸던 백성들에게 광해군의 등장은 큰 희망과 같았다. 정부의 역할이 복원되고 전시 컨트롤 타워가 생기면서 전시 정부 기능이 복원됐다. 이 역시 조선이 반격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임진왜란의 과정은 여러 변수들로 인해 변화를 맞이했다. 조선에게는 운이 따른 부분도 있었고 명나라 원군의 영향도 있었지만, 반전의 변수는 의병과 이순신의 수군, 광해군의 등장과 같이 내부에서 나타났다. 상당 부분 자체적으로 변수를 만들어냈다. 

그 중요한 지분은 지도층이 아닌 그들의 지배를 받았던 일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조선시대 군역과 조세, 노동력을 수시로 제공해야 했지만, 철저한 신분제의 조선사회에서 그 권리는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은 그들의 희생에 기반해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지도층의 무능이 큰 원인이었다. 백성들이 임금이 떠난 궁궐을 방화하고 파괴했던 건 큰 분노의 표출이었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국난에 맞서 다시 침략자들과 싸웠다. 이런 국민적 역량이 모이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어려웠다. 

국난 극복의 DNA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상항에도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훌륭이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의 협조와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임진왜란의 재조명은 코로나 시대를 함께 극복하고 있는 국민들에 대한 응원의 의미도 있다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비극의 역사이고 교훈을 삼아야 할 역사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저력을 확인하는 희망의 역사이기도 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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