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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96회] 6.25 한국전쟁의 분기점 된 인천상륙작전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1. 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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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6회에서는 신년 특집으로 국난 극복의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했다. 이번 주는 지난주 임진왜란에 이어 6.25 한국전쟁,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주제로 막전 막후의 이야기를 다뤘다. 

1950년 9월 15일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 수세적 위치에 있었던 국군과 유엔군이 이를 극복하고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 몰려있던 북한군은 보급이 차단되는 한편 고립되어 괴멸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단시간 내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진을 단행했다. 개전 이후 6월도 안되어 일어난 반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중심인물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라 할 수 있다. 1880년생 맥아더는 미국에서 명문 군인 가문 출신으로 군인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젊은 시절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극동군 사령관으로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전후 일본의 미 군정을 이끌었다.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그가 6.25 전쟁 당시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군을 이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6.25 전쟁 개전 이후 얼마 안 된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반격 작전을 구상했다. 하지만 개전 이후 북한군은 한강 방어선을 뚫고 빠르게 남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개전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리고 말았다. 이후 전선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남한 전역을 장악하고자 했지만, 육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교착된 전선의 한편에서 유엔군은 전세를 뒤집은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상륙작전은 앞서 언급한 대로 서울 수복과 적의 보급로 차단, 후반까지 내려온 적의 포위 섬멸이 그 목적이었다. 이는 이전 전쟁의 경험도 큰 바탕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남태평양 섬의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섬을 순차적으로 장악하지 않고 섬 뛰어넘기 전략으로 배후 섬에 상륙해 일본군의 배후를 타격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그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사례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투입되는 물량과 전력을 뛰어넘는 효과와 높은 성공 가능성이 담보되어야 했다. 보다 높은 작전 성공을 위해 군산, 주문진 등이 거론됐다. 맥아더의 시선은 인천에 고정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인천의 높은 조수간만의 차와 좁은 수로 등으로 인해 대형 함선의 접근이 어렵고 작전이 가능한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문제로 작전에 대한 반대 의견을 극복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관철했다. 그는 작전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이는 전쟁의 양상을 한번에 바꿀 수 있음에 주목했다. 

이렇게 준비된 인천상륙작전은 치밀한 계획과 준비, 사전 준비 과정을 거쳐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또한, 북한군에 혼선을 주는 기만작전도 함께 진행했다. 그 일환으로 상륙작전 지역을 중심으로 첩보작전을 전개했다. 엑스레이 작전으로 명령된 이 작전에 17명의 우리 해군 첩보부대가 투입됐다. 그들은 지역의 민간인과 노무자로 위장해 지역 지형과 북한군의 동향 등 각정 정보를 수집 보고하여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미 극동군 소속의 첩보부대 켈로부대 역시 지역에서 활약했다. 이런 첩보전은 작전의 성공에 있어 중요했다. 작전 수행 과정에서 첩보부대 일부가 교전 중 전사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숨은 영웅들이었다. 

또한, 숨겨진 영웅들이 또 있었다. 최근 영화로도 소개된 소개된 장사리 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들이 그들이었다. 경북 영덕지역에서 단행된 장사리 상륙작전은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작전으로 큰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도 주목받지 못했다. 

장사리 상륙작전의 주축을 이룬 학도병은 모두 10대의 젊은 학생들로 국가의 위기에 자발적으로 입대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짧은 기간 군사훈련을 받고 최전선에 투입됐다. 장사리 상륙작전의 학도병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 누구보다 용맹했다. 고교생이 주축인 학도병들은 교육 기회가 크게 제한되어 있는 당시 현실에서 중요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 교복을 입고 전투에 참여하는 등 학도병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엘리트들의 자원입대는 우리 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역할을 했다. 이후 학도병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공부하는 학도병이 더해지며 국난 극복의 의지를 상징했다. 

이런 숨은 영웅들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는 슬픈 참전의 기록도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제주도민 3천여 명이 작전에 참여했다. 이들의 참전 배경에는 전쟁 전 일어났던 제주 4.3 사건이 있었다. 4.3 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 도민들이 희생됐다. 그중에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은 그들의 한과 억울함을 표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건 이후 빨갱이로 낙인찍히며 대대로 큰 불이익을 견뎌야 했다. 제주도민들의 참전은 빨깽이 낙인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승전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온 국민들의 희생과 헌신, 노력,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진 건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우리 국군과 그들과 함께 한 우리 국민들 있어 가능했다.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은 온 국민의 역량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런 승리에 대한 의지를 담은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명령된 인천상륙작전은 불리한 지형과 조건을 이겨낼 수 있는 막강한 화력과 물량공세가 더해지며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의 강력한 리더십은 물론 성공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이후 그에게만 인천상륙작전의 포커스가 맞춰지는 건 아쉬움이 있다. 그는 분명 전쟁영웅이고 이후 장기화된 전쟁에서 확전을 주장하는 등 전쟁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 건 분명하다. 전후 그를 모시는 사당이 곳곳에 만들어지고 과거 외국산 담배를 유통하고 피는 게 불법이던 시절, 다수의 외국산 담배 단속 시 무속인들에게서 외국산 담배가 다수 압수된 사례는 맥아더에 대한 한국인들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6.25 전쟁은 우리 민족의 큰 비극이었다. 전쟁을 통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우리 삶과 함께하고 있다. 이제는 승전의 역사에 자긍심을 가지는 한편에 그 안에 포함된 아픔을 보듬어야 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분명한 건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6.25 한국전쟁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나라의 위기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었다. 이는 전후 국가적 위기에서도 계속 발휘되어 왔다. 6.25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은 우리의 국난 극복 DNA가 함께한 역사였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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