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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정부 주도의 수출을 중심으로 한 경제발전 정책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초반 대표적인 빈곤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이 기간을 거치며 전후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신흥 국가로 떠올랐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갖춘 국가로 발전했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 국가로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화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3회에서는 이런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해외 파견 근로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명과 암을 함께 다뤘다. 이를 통해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시절을 견디고 이겨낸 지금은 희미해진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을 다시 한번 재조명할 수 있었다. 

해외 파견 근로자들의 시초는 1960년대 당시 서독이었던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이에 필요한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특히, 국가 신인도의 한 척도라 할 수 있는 외화보유액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195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미국의 무상원조에 기대고 있었지만, 1960년대 들어 미국은 개발도상국 들에 대해 무상원조 대신 유상원조로 그 방향을 전환했다. 원금 상환 능력과 계획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외화보유액을 늘려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이런 배경은 수출주도 경제정책을 더 필요하게 했다. 하지만 당장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산품의 수출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제조비용이 없는 해외로의 근로자 파견은 외화 획득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마침 1960년대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서독은 산업 각 분야에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각했다. 서독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저임금 국가인 터키나 포르투갈 등에서 산업인력을 대규모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산업인력은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의 인력으로 채워졌다. 

당시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서독에 파견할 광부와 간호사 인력 모집에 나섰다. 지금도 극한 직업 중 하나인 광부일이었지만, 당시 국내 임금 수준과 비교가 안되게 높은 임금 수준에 수많은 지원자가 나섰다. 그 안에는 교사, 공무원과 명문대를 나온 고학력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 제한 탓에 청년들이 주도 포함된 지원자들은 쌀가마니 들기 등 별도의 체력검정 등을 통과해야 했다. 그렇게 파견이 결정된 근로자들은 더 나은 미래의 삶과 가족들의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의 근무 여건은 열악했다. 사고 위험이 큰 탄광의 최 끝단에서 우리 근로자들은 최 일선에 배치됐다.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지하 갱도에서 우리 근로자들은 언제든 생길 수 사고의 공포와 뜨거운 지열 등 현장의 악조건과 싸웠다. 이 과정에서 많은 근로자들이 사고로 희생되고 진폐증 등 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탄광 근로자들이 지하 갱도로 향하며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일하는 당시 목숨마저 위협받으려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근로자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독일 병원에서 일했던 파독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도 열악했다. 당시 우리 간호사들은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병원에서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았다. 근무 강도는 여성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와 더 나은 삶을 위해 간호사들은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했다. 이런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노력의 대가로 얻은 돈은 대부분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되었고 그렇게 들어온 외화는 수출로 벌어드린 외화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또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근면 성실한 근무 태도는 현지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다. 독일의 차관이 제공되는데도 일정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또 다른 민간외교사절이었다. 

이렇게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해외 인력 파견의 양상은 1970년대 베트남전 참전과 함께 민간주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30여만 명의 전투병력을 파견한 대한민국은 그와 함께 전투에 필요한 지원인력을 다수 파견했다. 그 인원은 6만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건설을 비롯한 기술 일력이 대부분이었던 베트남 파견 근로자들은 미군의 발주하는 공사를 하거 군수물자 수송 등의 일을 했다. 민간영역의 일이었지만, 전후방의 구분이 모호하고 전국 각지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베트남전에서 군 관련 일을 하는 우리 근로자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일례로 군수물자 수송에 있어 우리 근로자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전투와 일을 병행하는 위험한 일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닷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임금 수준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보수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베트남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베트남 파병과 그와 관련한 민간영역에서의 수익은 그대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또 다른 동력이 됐다. 실제 그 규모는 수출 총액과 비교해 상당한 수준이었다. 모두 생명이 위험을 고려하지 않았던 이들의 노력의 결정체였다. 이런 해외 파견 근로의 역사는 1970년 중반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 붐 속에서 다수의 중동 파견으로 이어졌다. 베트남 전쟁 종식 후 베트남 특수가 사라진 상황에서 중동은 새로운 기회의 장이었다. 

마침 다수의 우리 건설기업들이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곳곳에서 공사 수주에 성공했고 이에 필요한 기술인력들의 중동행이 이루어졌다. 뜨거운 사막의 기후를 이겨내며 우리 근로자들은 건설 대한민국의 최일선에서 온 힘을 다했다. 대한민국의 건설은 중동에서 큰 위상을 높였고 막대한 수익으로 연결됐다. 이 역시 우리 경제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부터 시작한 해외 파견 인력들의 노력과 헌신은 우리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였다. 이들은 더 높은 보수도 중요했지만, 그들 마음속에서는 나라를 대표한다는 애국심이 함께했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성과는 1달러가 아쉬웠던 대한민국 경제에는 가뭄 속 단비였다. 또한 국내에서 수출역군으로 불리긴 했지만, 저임금 장시가 노동을 견뎌낸 근로자들의 노력이 더해지며 대한민국은 신흥 개발국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우리 경제의 체질은 허약하기만 했다. 수출 주도의 경제정책은 기업들의 규모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됐지만, 빚으로 연명하는 부실기업을 함께 양산했다. 과도한 부채는 기업에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었고 경기 상황 악화에 대한 대응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몇몇 대기업 사주들은 자신과 가족, 친척들의 이름으로 자신의 기업의 사채를 제공하고 막대한 이자 수익을 챙기기도 했고 기업의 수익을 부동산 투자나 비생산적인 일에 사용하는 등 개인적 부를 축적하는데 활용하기도 했다. 이는 기업 발전을 위해 필요한 기술 개발이나 근로자들에 대한 임금수준 향상은 기업의 중요한 목적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이에 대한민국은 수출과 해외 인력 파견 등으로 외화를 벌어들였지만, 나라와 기업의 채무가 늘어가기만 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에 손꼽히는 채무국이었다. 기업 수익의 선순환이 이루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유신시대 박정희 대통령은 두 차례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기업들의 채무를 동결하는 등의 시장경제에 반하는 조치로 기업들의 도산을 막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조차도 기업들의 도덕성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기업이 크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신화와 함께 하는 왜곡된 경제구조는 개선되지 않았고 누적된 문제는 경제주권을 상실하는 IMF 외환 위기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외환위기는 극복되었지만,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 경제와 국민들의 삶 속에 상처를 주었고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초래한 이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신 우리 국민들은 나라의 위기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위기 극복에 힘을 모았다. 

이러한 모습은 경제발전의 성과가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세계 10위권이 됐고 이제는 순 채권국이 되었다. 국민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중산층의 비중도 늘었다. 하지만 빈부 격차는 한층 더 커졌고 경제 부분에서 정의가 제대로 구현되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은 여전하다. 

이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살핀 해외 파견 근로자들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은 특정한 누군가의 영웅적인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우리 국민들의 피, 땀, 눈물이 함께하며 이뤄낸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다. 해외 파견 근로자의 역사는 우리 경제발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회, 경제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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