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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93회] 현대사 속 민주화 운동의 성지, 명동성당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12. 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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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찾아가던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3회에서 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명동성당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었다. 명동성당은 1898년 건축된 명동성당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서양식 건축물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을 보여준다. 명동성당인 이후 우리나라 천주교를 대표하는 곳으로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다. 

명동성당이 건축된 부지는 과거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그 교리를 연구하고 공부하던 천주교 신자의 집이 있었던 장소로 다른 나라와 달라와 일반 평신도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된 우리나라만의 특징을 담은 공간이이고 했다. 이후 천주교는 수차례 박해를 겪으면서도 그 교세를 키웠고 조선 후기 조선과 프랑스의 수교가 이루어지고 선교활동이 합법적으로 보장되며 이 땅에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했다. 명동성당은 달라진 천주교의 입지를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인 신부들이 주도하는 명동성당 건축은 그 입지와 관련하여 조선 정부와 갈등이 있었고 이전에 없던 서양식 건축물인 탓에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결국, 명동성당은 부지 매입 후 12년이 걸려 완공됐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는 명동성당이지만, 일제 강점기 명동성당은 대중과 분리된 섬과 같은 존재였다. 1910년 일제의 한일 강제병합 이후 천주교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를 용인하고 선교의 자유와 특권을 인정받았다. 

 

 



당시 천주교를 이끌던 프랑스인 주교들은 식민 지배의 심각성을 외면했다. 프랑스 역시 세계 각지에 다수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 나라의 현실이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일제시대 천주교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고해성사 요청을 거부하기도했고 교단의 결정에 반해 안중근 의사를 면담하고 고해성사를 진행한 신부를 징계하기도 했다. 또한, 1919년 3.1 운동 당시 천주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참여에 소극적이었고 민족대표 33인에 천주교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민족의 고통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외면하는 천주교의 모습은 대중들의 비판과 민심 악화를 불러왔다. 천주교는 그들만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 

이런 흐름은 1970년대 독재 정권 시기 큰 변화를 보인다. 그 중심에는 1969년 추기경에 오른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 그는 독재 철권통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천주교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1971년 전국에 생중계된 성탄 미사 당시 시국에 대한 비판 발언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는 큰 충격이었다. 당시 TV에서 이를 보던 박정희 대통령이 중계 중단을 지시했지만, 방송국 사정으로 조치가 바로 이행되지 않았고 김수환 추기경의 모든 발언은 그대로 전파를 탔다. 이후 방송국 관계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조사실로 연행되고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천주교와 독재 정권의 대립을 본격화했다. 1974년에는 정권에 의한 민주화 운동 탄압사건인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수한 추기경은 그의 구명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여 석방을 이끌어냈다. 지학순 주교는 석방 직후 양심선언을 통해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며 정권의 부도덕성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지학순 주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75년 명동성당의 3.1절 미사에서 천주교 주교들과 야당, 재야인사들이 함께 유신 체제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하기도 했다. 3.1 명동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천주교가 민주화 운동의 주요 세력이 되는 일이었다. 

이런 천주교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1960년대 가톨릭의 현실참여 흐름과 연결된다. 당시 가톨릭에서는 교회가 사람과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대의 속에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야 함을 역설했고 큰 공감을 얻었다. 이는 교회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한편, 사회적 약자와 불의에 고통받고 소외던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천주교 역시 이 흐름에 영향을 받았고 현실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이에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런 천주교의 움직임은 독재 정권과의 대립이 불가피했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다수의 주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천주교 교단의 민주화 운동은 계속됐다. 서슬 퍼런 독재권력에 의한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천주교의 움직임은 민주화운동에 큰 힘이 됐고 이를 지켜갈 중요한 버팀목으로 작용했다. 천주교 교단은 교회의 네트워크가 있었고 국제적인 공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는 정권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막아주고 우리의 상황을 대외에 알리는 통로가 됐다. 그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유신정권이 무너진 이후 등장한 신군부 세력의 철권통치 시대에도 천주교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서 역할을 계속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 당시 천주교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1987년 4월 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 의한 개헌 논의 중단과 함께 기존 헌법에 따른 정권 이양을 골자로 한 호헌 발표로 더 거세진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정국을 거센 회오리 속으로 몰고 갔다. 독재 정권은 이를 힘으로 제압하고 억압했다. 이 과정에서 그 해 1월 발생한 대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당시 공안 당국은사망의 원인이 돌연사라 하면서 탁 치니 억하며 죽었다고 했고 의혹을 더 크게 했다. 하지만 정권에 의해 언론이 통제되는 상황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있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하여 정권을 비판하는 미사를 강행하고 주교와 사제들이 거리에 나서 이를 항의하는 시위를 하면서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의 광주민주화운동 추모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사건의 양상을 크게 달라졌다. 이는 사건 발생 당시 투옥되어 있었던 신문기자가 이 사실을 비밀리에 교도관 등을 통해 제야 인사에서 알리고 이를 천주교 주교에 알리는 과정이 있었다. 이는 최근 개봉했던 영화 1987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명동성당에서의 폭로는 정권의 힘에 의해 억눌렸던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다시 불타오르게 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한 민주운동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국민적 저항은 6월 10일 전후로 한 6월 항쟁, 6.10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이를 힘으로 막아내려 했다. 유혈 사태의 발생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권력에 밀린 시위대는 명동성당에 집결했다. 명동성당은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다. 다수 경찰 병력이 명동 성당을 에워쌌다. 당장이라도 강제진압이 일어날 수 있었다. 정권은 시위대 연행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신변의 위험까지 무릅쓴 대치는 계속됐다. 명동성당은 6.10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후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화 요구를 정권이 받아들이는 승리의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헌법에 기초한 공화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 민주주의는 1960년 4.19 혁명, 1987년 6월 항쟁, 최근 촛불 혁명까지 민주주의를 역행하려는 세력들이 주도하는 정권에 대한 국민적 항쟁과 승리를 승리를 통해 지켜지고 발전되어 왔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세력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 구현을 외칠 정도로 보편적인 가치가 되었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절대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유지되고 있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 속에 만들어졌다. 

천주교는 이런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버팀목이 됐다. 성직자들의 진성성과 헌신은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힘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 있던 명동성당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성지였다. 또한, 명동성당은 현실의 현세에서 종교의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명동성당이 가치는 종교를 넘어선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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