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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예능 프로그램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첫 번째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관련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당시 유럽의 정세,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가 될 수 있었던 환경과 그 과정,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의 뒷이야기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많은 이들이 영화나 다큐 등으로 그 내용을 알고 있지만, 프로그램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만행까지 더해지며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유대인 학살의 시작은 1935년 아돌프 히틀러가 당수로 있었던 나치당이 중심이 되어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 법은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규정했다. 유대인은 독일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고 상당수 기본권도 상실했다. 이 법을 통해 나치 독일은 독일 국민과 유대인을 철저히 분리했다. 이런 분리 정책은 1938년 11월 수정의 밤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에 대한 집단 테러와 함께 유대인 거주지와 생활기반을 파괴하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는 유대인 상가의 유리를 모두 파괴하면서 그 유리조각들이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모습을 비유했다. 무자비한 폭력은 과격한 독일 국민들이 주도했고 정권을 잡고 있었던 나치는 이를 묵인했다. 

 

 



독일에서의 기반을 모두 잃은 독일 내 유대인들은 이후 강제수용소로 이주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치하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로 확대되었고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유대인 대학살의 참상을 역사에 남겼다. 당시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유대인 강제수용소는 인원 유린의 현상이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가축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나치는 노동력의 유무에 따라 유대인 수용자들을 분류하고 활용할 수 없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나치는 학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극물을 이용한 집단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학살 대상이 된 유대인들은 목욕탕으로 쓰인 공간에서 영문도 모른 채 최후를 맞이했다. 

나치는 그들의 시신을 불태워 증거를 인멸했다. 나치는 학살 대상자들의 머리카락은 가발 재료로 그들의 살에서 짜낸 기름은 연료로 그들의 피부는 가죽제품을 만드는데 이용했다. 시신을 불타고 남은 재는 비료로 사용했다. 일말의 인간성을 상실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계속됐다. 나치의 만행은 주도면밀하고 비밀스럽게 행해졌고 수용소 인근에 거주하는 독일인들도 모를 정도였다. 전쟁 후 유대인 수용소의 만행을 확인한 인근 지역 독일인들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 일본이 전쟁 기간 우리 민족에서 행했던 각종 만행과 오버랩되면서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이런 나치의 만행을 주도한 인물은 나치당의 당수이자 독일 총통이었던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이런 광기 어린 통치는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과 함께 전 유럽을 파괴한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고 그 상처는 아직도 아픈 역사의 흔적으로 곳곳에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런 히틀러라는 괴물의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화가가 되기를 꿈꾸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가정 환경과 원만하지 않았던 부친과의 관계 속에화가가 될 수 없었다. 이후에도 히틀러는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만약 히틀러가 화가의 꿈을 이루고 살 수 있었다면 역사의 남을 괴물을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화가의 꿈을 버린 히틀러는 군 입대를 모색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 병약한 그는 군 입대를 할 수 없었다. 청년 시절 히틀러는 그의 고국에서 좌절의 시간을 계속 보내야 했다. 이는 그에게 성공의 욕구를 크게 하고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지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아픈 기억을 뒤로하고 히틀러는 독일로 향했고 그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독일에서 군 입대에 성공한 히틀러는 성공적인 군 생활을 그 입지를 키워갔고 성공한 군인으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전투 중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군대에서 그는 권력의 속성과 그 힘을 깨달았다. 그는 극우 성향의 나치당에 입당하면서 정치가의 길로 들어섰고 탁월한 연설 능력과 정치 감각으로 나치당의 당수 자리에까지 올랐다. 화가를 꿈꾸던 평범한 청년의 놀라운 변신이었고 이는 독일은 물론 전 세계를 비극 속으로 빠르리고 말았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점점 그 세력을 확장했고 독일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총통 자리에 올라 절대권력자가 됐다. 

이런 히틀러와 극우정당 나치당의 급부상은 독일의 특수한 상황이 만든 돌연변이었다. 나치당의 성장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 패망에서 그 원인이 있다. 전쟁 패전 후 독일은 얼마 없었던 식민지와 영토 일부를 잃었다. 승전국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도 지불해야 했다. 전후 복구도 힘겨운 독일은 전후 배상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계 대공황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독일 경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무분별한 통화 확대 정책을 지속했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전후 패전국의 설움과 함께 극심한 경재 불황은 극우 정당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여기에 타고난 웅변가이자 선동가인 히틀러와의 만남은 나치당의 급성장으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뛰어난 웅변 실력과 함께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정책으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극단적 상황에 몰린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는 구원자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어려움이 전후 독일을 옥좨는 베르사유 체제의 산물이고 독일 경제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대인 때문이라는 논리를 설파했다. 실제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금융업을 주도하는 세력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로 돌아가게 했다. 이런 히틀러에게 뛰어난 선전부장 괴멜스의 존재는 그의 연설과 선동의 정치를 더 돋보이게 했다. 히틀러와 괴멜스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뛰어난 무대연출과 선전 능력은 독일 전체를 집단 광기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히틀러는 이후 대규모 토목사업과 경기부양책을 펼치는 한편, 군비증강을 통해 힘을 키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크게 축소됐던 독일의 군사력은 유럽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실제 독일의 위협은 현실이 됐다. 독일은 주변국들의 영토를 강제 병합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세계대전의 발발이 그들에게는 더 큰 위협이었다. 주변국들의 미온적 대처는 히틀러가 더 큰 야욕을 가지게 했다. 

히틀러는 침략의 야욕을 인근 체코와 폴란드로 뻗어나갔다.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전쟁의 선포와 다름없었다. 독일은 훗날 조작으로 밝혀진 폴란드군의 독일 침공을 이유로 폴란드 침공을 강행했고 폴란드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이후 독일은 인접국을 차례대로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독일은 연합국의 유럽 대륙 최후 보루 프랑스와 영국,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극우 성향의 독재가 프랑코가 지배하고 있는 스페인,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럽을 차지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독일의 프랑스 침략을 대비했다. 프랑스는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 역사상 최고로 거대하고 긴 요새인 마지노선을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설치하고 그 외 지역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예측하지 못한 허점을 파고들었고 전차부대를 앞세운 전격전으로 저지선을 돌파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은 해안지대에 고립됐다. 이는 영화 덩케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독일군에 포위되어 괴멸 위기에 몰렸다가 민간들이 헌신적인 희생이 더해지며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이야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개전 초기 승승장구한 독일은 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독일의 위세는 얼마 가지 못했다. 독일은 돌연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던 소련을 침공했고 이는 그들의 패망을 이끌었다. 소련이 저항을 매우 끈질겼다. 독일은 소련의 추운 겨울을 피해 여름에 침공을 하는 등 나름 준비를 했지만, 소련은 지구전을 펼치며 빠른 종결을 원했던 독일을 괴롭혔다. 결국, 독일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성과 없이 소련에서 후퇴해야 했다. 소련 침공 실패 후 전세는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었고 독일은 패망의 길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전쟁 막바지 패망을 직감한 히틀러는 은신하고 있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그 생을 마감했다. 역사상 최악의 전쟁 범죄자의 최후였다. 

하지만 그의 죄상은 영원히 남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 집단 학살과 전쟁의 원흉이기도 했고 순수 혈통에 대한 집착으로 더 많은 아리아인들의 출생을 위한 인간 교배장을 만드는 등의 악행도 서슴지 않았고 여러 기행으로 절대 권력자의 어두운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악행의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대신 전후 독일은 나치 독일의 만행을 역사에 그대로 기록하고 끊임없는 교육으로 이를 알렸다. 또한, 전쟁범죄에 대한 지속적인 사죄와 배상을 계속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를 옹호하는 발언이나 행위에 대해서도 엄한 처벌을 하면서 나치의 망령이 다시 깨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런 전후 독일의 모습은 전범 국가임에도 그들이 유렵 경제의 중심 국가로 유로존을 이끄는 리딩 국가로 거듭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참혹한 기록과 기억들로 가득한 나치 독일 시대였지만, 지금 독일은 그때의 기억을 중요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 전쟁범죄에 대한 회피와 역사왜곡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광기로 가득한 시대가 시간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이 주는 진짜 교훈은 여기에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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