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장면들을 다시 살피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1회에서는 1979년 8월 발생한 YH 무역 사건의 과정과 그 의미를 다뤘다. YH 무역 사건은 당시 대표적 가발 수출 기업이었던 YH 무역 187명의 노조원들이 신민당사에서 회사의 일방적 폐업과 불합리한 처우 등에 항의하던 농성장을 경찰이 급습해 이들을 연행하고 그 과정에서 노조 간부였던 김경숙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유신정권에 대한 야당과 국민들의 강한 저항을 불러왔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 제명, 부마 민주화 항쟁, 10.26을 거치며 유신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사건의 과정은 이랬다. 한때 무역 관련 공무원이었던 장용호가 설립한 YH 무역은 작은 규모의 회사였지만, 1960년대와 70년대 대표적인 수출 종목이었던 가발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사세를 크게 키웠다. 한때 이 회사의 종업원은 4000명에 이르렀다. YH 무역의 장용호는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꽤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 일가가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한때 권력의 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공동으로 미국에서 농장을 소유하기도 했었다.
권력과의 친분과 함께 그는 사업적 수완도 뛰어났다. 그는 가발산업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애초 가발산업을 주도하던 이탈리아는 중국산 원재료를 사용했는데 중국의 핵실험 성공 이후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경제재제가 이루어지면서 원재료 수급이 어려워졌다. 이는 다른 가발 생산국도 다르지 않았다. 그 틈을 대한민국 기업들이 파고들었고 점유율을 높였다. 무역 관련 일을 하던 장용호는 이를 인지하고 공무원을 퇴직 후 가발 생산업체를 창업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친분도 사업을 조기에 발전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침 정부의 수출 주도 정책과 맞물리며 YH 무역은 대표적 수출 기업으로 발전했다.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수출 기업 포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장용호는 YH 무역의 성공을 발판으로 미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미국에서도 성공한 사업가로 도약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YH 무역의 제품을 미국법인에서 매입해 그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부도덕하게 이루어졌다. 그는 당시 돈으로 YH 무역의 자금 15억 원을 해외로 빼돌린 것으로 전해진다. 훗날 그는 자신이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평가되는데 반발하는 내용의 언론 인터뷰를 하며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가 YH 무역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미국에서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뉴욕한인회장 등을 역임하며 큰 성공을 이뤘지만, 그에 비례해 YH 무역의 부실은 커졌다. 그를 대신해 경영을 한 친인척들 역시 사적으로 회삿돈을 유용하면서 회사는 점점 어려웠다. 이런 경영진의 부도덕성과 함께 가발산업이 점점 쇠퇴하면서 YH 무역의 경영상태는 악화됐다. 급기야 대규모 감원에 이어 일방적인 회사 폐업으로 이어졌다. 졸지에 회사 직원들은 직장을 잃게 됐다.
당시 YH 무역과 같은 가발, 섬유산업 등 경공업 분야의 주 노동자는 여성들이었다. 여성 근로자들은 대부분 10대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들은 가정의 생계를 위해 교육의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했고 직장을 찾아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이들이었다. 어린 여성근로자들은 상당수는 소규모 봉제업체에서 일했다. 그 처우는 매우 열악했다. 최저임금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급여에 하루 15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10대 소녀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그들에 의지해 생활하는 시골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YH 무역은 그나마 업계에서 큰 회사였지만, 근로조건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악한 근무환경에서도 노동자들을 서로를 격려했다. YH 무역 여성근로자들이 야근때 간식으로 나오는 빵을 한 사람에 몰아주고 빵을 받은 이는 그 빵을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도록 했다는 일명 빵계는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렇게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경공업 분야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수출역군, 산업 전사 등으로 칭해졌지만, 실상은 여공, 공순이 등으로 불리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여성 노동자들을 포함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감수한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YH 노동자들에게 회사 경영진의 경영부실에 따른 회사 폐업은 큰 충격이었다. 당장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조를 중심으로 회사 폐업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동대문 섬유 단지의 노동자 전태일의 희생 이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노동환경은 그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유신정권은 노조활동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을 용공세력이 조정하는 공안사건의 시각으로 바라봤다. YH 노동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YH 노동자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제1 야당 신민당사에서의 농성을 선택했다. 신민당은 경찰의 당시 진입을 막고 이들을 지원했다. 경찰도 쉽게 노동자들을 어찌 할 수 없었다. YH 노동자 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여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후 신민당은 선명 야당을 주창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며 반독재, 반유신 운동을 더 강하게 이어갔다. 민심의 지지까지 얻고 있는 야당의 존재는 유신정권에 큰 위협이었다. 이런 신민당이 YH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원하는 건 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유신정권은 YH 노동자를 지원하는 신민당을 함께 와해시키려 했다. 이는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한 강제진압으로 이어졌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시간 1000명이 넘는 경찰병력이 신민당 당사에 진입했다. 그들은 폭력을 자행하며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고 그들은 지원하던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사에 있던 김영삼 총재로 강제 연행돼 자택에 구금됐다.
소위 101 진압작전으로 명령된 경찰의 강제진압은 20여 분에 만에 종결됐다. 그렇게 연행된 노동자들은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부 월급과 퇴직금을 받고 강제 귀향 조치됐다. 농성을 주도하던 노조 간부들과 그들을 지원하던 사회 각계 인사들은 구속됐다. 농성장이었던 신민당사는 전쟁터와 같을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연행한 장면은 유신정권의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는 당시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국내외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과정에서 노조 간부였던 김경숙의 사망 사실까지 알려지며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더 커졌다. 경찰은 사인을 김경숙이 동맥을 절단하고 스스로 투신했다고 밝혔지만, 사실은 그와 달랐다. 2008년 과거사 위원회는 당시 부검 기록들을 검토하며 동맥 절단의 흔적이 없고 시신에 외력의 위한 구타 흔적이 있는 점등을 들어 자살 가능성이 크지 않음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당시 사망한 노동자 김경숙은 물론, YH 노동자들의 명예 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사건 발생 후 30여 년이 흐른 후 그들의 외침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YH 무역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더 강력한 반유신 투쟁을 선언했다. 그와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당사에서 농성을 전개했다. 그는 외신과의 회견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한 비판을 했다. 미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유신정권을 자극했다. 유신정권은 김영삼 총재를 국회의원에서 제명하는 조치를 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지명할 수 있는 국회에서 여당은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야당의 강한 반대에도 김영삼 총재의 제명은 피할 수 없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김영삼 총재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을 남기며 국회를 떠났다.
그의 예언대로 유신정권은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 제명 소식에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부산, 마산 지역의 여론을 들끓었다. 이는 시민들의 정권에 대한 강한 저항을 불러왔다. 부마 민주화 항쟁이 그렇게 시작됐다. 유신정권은 이에 대해서도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민심은 갈수록 정권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그의 생을 마감했다. 유신 체제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YH 노동자들의 강제진압을 주도했던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이었다. 누구보다 박정희 대통령에 충성을 다했던 그였지만, 급변하는 민심과 유신 체제 대한 외적 여건 변화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대통령의 최 측근으로 유신 체제 유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앙정보부의 수장에 의해 유신 체제가 끝났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큰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유신 체제는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긴 했지만, 경제성장은 과실은 사회 지도층과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YH 무역 사건에서 보듯 대부분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빈곤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더 심화된 빈부격차 속에 또 다른 빈곤이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사회 불평등 구조는 국민들의 불만을 심화시켰다. 경제성장이라는 목표에 기업가들의 불법과 탈법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YH 무역의 사례처럼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잘 산다는 나쁜 관행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공정한 경쟁은 사라지고 정경유착의 혜택을 받는 기업이 부를 독점하는 현상이 커졌다. 우리 재벌들이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비판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신정권은 이런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외면했다. 분배와 사회 불평등 개선, 민주화 요구에 대해 힘으로 억압하기만 했다. 또한, 국민들의 생활 전반을 통제했다. 남성들의 두발을 제한한 장발 단속,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를 제한한 미니 스커트 단속, 다수의 대중가요를 금지곡으로 하는 조치 등이 대표적이었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권에 국민들의 마음도 함께 멀어졌다. 강력한 언론통제로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YH 무역 사태 역시 노사문제에 불과했다. 기업주의 탈법과 불법을 살피고 이를 처벌하고 근로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정부가 할 일을 했다면 여론을 좋은 방향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이를 외면함과 동시에 힘으로 제압했다. 유신정권은 YH 무역 노동자들의 농성을 정권에 대한 도전이나 체제를 위협하는 행동으로 여겼다. 유신정권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노동자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해석한 유신권이었다. 그만큼 유신정권은 통치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유신정권에게서 국민은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었고 국가의 목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져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유신정권의 경직된 사고는 사회 경제적인 발전 속에 국민들의 또 다른 욕구를 인정하고 변화를 꾀하지 못하게 했다. 유신정권은 정권 유지에 매몰되면서 무리한 정책을 연발했다. 언론을 통제하고 권력기관을 장악해 힘으로 변화를 막아내려 했지만, 이는 정권의 몰락을 더 빠르게 했다. YH 무역 사건은 정권의 초조함이 불러온 참사였다. 당장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더 깊은 수렁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YH 사건은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도 농성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정권도 몰랐던 유신정권의 몰락을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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