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65회에서는 1970년대 유신 체제의 몰락 과정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프로그램 시작은 여의도 공원이었다. 여의도 공원은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그 용도와 명칭이 변했다. 일제시대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여의도에 비행장을 설치했다. 해방 후에도 여의도는 공항으로 사용되었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귀환하는 비행기가 착륙한 곳이 여의도공항이었다.
이후 여의도 공항은 5.16 쿠데타를 겨치면서 5.16광장으로 면모하여 국가의 중요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됐다. 장년층들이라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넓은 광장에서 롤러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며 즐겼던 기억이 있다. 이후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1년 국풍 81이라는 국가 주도의 관제 축제를 열기도 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장악했다. 국풍 81은 부정적인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다.
정권의 필요에 의해 활용되던 여의도광장은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관제 행사가 사라지는 변화 속에 공원화가 진행되었고 지금의 도심 속 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과 그 변화가 함께 한 여의도 공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방송에서는 여의도 공원에서 멀지 않은 버스 환승센터에서 비밀의 장소가 공개됐다. 지하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내려간 곳은 과거 귀빈이 사용했던 것을 추정되는 지하벙커였다. 이곳은 그동안 그 장소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관련 부처의 기록에도 없는 장소였다.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 공사 과정에서 이 장소가 발견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견 이후에도 이 벙커를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사시 대통령의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지금의 장소는 과거 여의도 광장에서 국가 행사를 할 때 대통령이 있었던 단상 위치와 동선이 겹친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활용되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이 벙커는 유신 체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유신 체제의 몰락 과정을 하냐 하나 짚어갔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은 이후 정치세력으로 변신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박정희는 이후 재선에 성공해고 3선 개헌을 강행하며 세 번째 대통령 도전의 기회를 얻었고 3선에 성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 성공 후 얼마 안 가 유신헌법과 이를 근거로 한 유신 체제로 영구집권의 길을 걸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 고도성장을 이끌며 지지를 이끌어냈고 민주주의를 크게 퇴보시키고 그에 부수되는 인권탄압 등의 문제에도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신헌법에 근거한 간선제 선거로 치러진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유신 체제는 크게 흔들렸다.
그해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전국 득표수에서 야당인 신민당에 밀렸다. 여당은 득표율은 31.7%에 불과했다. 여전히 관건선거가 크게 작용했음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결과였다. 물론, 대통령이 다수의 국회의원을 지명할 수 있는 유신 체제에서 여당은 절대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민심 이반이 심각함을 느낄 수 있는 결과였다.
원인은 정권 유지의 중요한 근거였던 경제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과 함께 수출주도 성장전략으로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켰다. 1960년대 경공업 위주 산업구조를 1970년대 중화학 공업으로 재편하면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심화된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의 문제는 내부에서부터 경제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대외 상황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체력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동전쟁으로 파생된 오일쇼크는 경제를 더 어렵게 했다. 마침 중화학 공업으로 산업의 중심을 옮긴 대한민국에는 1차 오일 쇼크를 넘는 위기였다. 1차 오일쇼크 당시 이를 극복하는 원동력이었던 중동 건설 붐마저 사라지면서 경제침체 현상이 더욱더 심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커지는 상황이 겹치면서 정권이 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민주화 요구를 강경책으로 억누르는데 집중했다. 1974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에서 피격되어 서거한 사건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차지철은 정권의 강경책을 주도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최 측근으로 자리했다. 여기에서 육영수 여사의 피격 서거 사건을 재조명할 수밖에 없다.
육영수 여사의 저격범은 재일 동포 출신 청년 문세광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해 자란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저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청년이 되면서 일본 공산당 인사들과 교류했고 그 사상에 빠져들었다. 그는 일본 공산당과 가까운 북한이 후원하는 재일 조총련 인사들과도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 저격을 권유받고 이를 실행하기로 한다. 그는 위조된 일본인으로 여권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는 저격에 사용할 권총을 라디오에 숨겨 반입했고 광복절 행사 당일 외국인 귀빈으로 위장해 검문을 통과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는 순간 단상 앞으로 뛰어들어 수차례 총격을 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격을 피했지만, 그 유탄 중 한 발이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육영수 여사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서거했다. 이는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사건은 문세광의 단독범행으로 결론나고 그는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후 이 사건과 관련하여 탄두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또 다른 공범 가능성 등등 몇 가지 의문점들이 제기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더 이상 밝혀진 사실은 없었고 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혔다.
이는 유신 체제의 큰 변곡점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우자이기도 했지만, 직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중요한 정치 파트너를 잃었다 할 수 있었다. 추후 관련된 인사들의 저서 등에서 실제 그 충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진술도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등장한 차지철은 결과적으로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5.16 군사정변 당시 대위로 박정희 소장을 지근거리에서 수행했던 그는 대통령의 다른 측근들에 비해 경력이나 나이가 크게 부족했지만,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저격의 위기에서 벗어난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신변을 지켜줄 더 충직한 인물이 필요했고 충성심 가득한 차지철은 그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할 범위를 넘어 국정까지 관여했다. 차지철은 대통령의 신임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활용했다. 그는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월권 행사를 서심치 않았고 사실상 정권의 실세로 자리했다. 이는 또 다른 권력의 한 축인 중앙정보부를 이끌던 김재규 정보부장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둘 사이의 충성경쟁을 유도하고 상호 견제토록 해 권력기반을 더 단단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둘 사이의 갈등은 훗날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1979년 경제 위기와 함께 흔들리는 유신 체제는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을 강조하는 미국 카터 대통령과의 갈등이 커지면서 더 큰 위기로 빠져들었다. 강력한 우방인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건 정권에 치명적이었다. 1979년 카터 대통령은 한국 방문에서도 수차례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이는 야당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세력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지만, 유신정권에는 아프게 다가왔다.
대외적 여건의 변화와 함께 유신 체제를 흔드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당시 대표적 수출 기업이었던 YH 무역 사건은 유신정권을 더 궁지로 몰아갔다. 개발 생산 업체였던 YH 무역은 사세를 크게 확장했지만, 경기 불황과 수출 부진이 겹치면서 회사를 갑자기 폐업을 결정했다. 이 회사의 생산직 근로자들은 대부분 어린 여성 근로자들이었고 이들은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은 어렵게 유지하던 생계마저 위협받게 했다. 여성근로자들은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고 보다 안전한 장소로 여겨진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이에 유신정권은 해결책 대신 경찰력을 동원한 강제진압으로 이에 맞섰다. 야당 당사에 난입한 경찰들은 무자비한 진압을 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야당 인사들이 부상당했다. 또한, 여성 근로자 중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야당 당사에 경찰이 무난 침입한 사건에 사망사고까지 발생하면서 정권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커졌다. 그 과정에서 야당 당수였던 김영삼은 강도 높게 유신정권을 비판했고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화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김영삼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 제명을 명령했고 국회는 그의 제명을 처리했다. 졸지에 야당 당수가 제명되는 초유의 사태였다. 이는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부상 경남지역의 민심을 자극했고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당시는 부마사태, 이후 부마민주화 항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유신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그 중시에는 차지철이 있었다. 하지만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는 현지에서 이반된 민심을 확인하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함을 간언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의 강경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차지철에 대한 편애는 차지철과 큰 갈등에 있었던 김재규의 또 다른 결심을 불러왔다. 부마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진다면 상황은 더 걷잡을 수 없었다. 김재규는 정권의 운명이 다했다는 판단을 했고 이는 대통령 암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를 즐기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스스로 저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서거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의 일인자 자리에 올라 18년간 그 자리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정권이 최측근에 의해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후 김재규는 친밀한 관계였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로 향했지만, 돌연 육군본부로 방향을 틀었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군권을 장악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정권까지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와 정승화가 중앙정보부로 향했다면 그의 의도대로 상황이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정승화의 권유에 따라 육군본부로 향했다.
정승화는 암살 현장에 있었지만, 살아남은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들었고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일을 보안사령부에 맡겼다. 공교롭게도 당시 보안 사령관은 전두환 소장이었다. 정승화의 선택은 또 다른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역시 대통령 암살에 함께 했다는 죄목과 함께 체포되고 불명예 제대라는 비운을 겪었다. 역사적 유턴이라고도 불리는 이 선택으로 김재규는 얼마 안 가 체포되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그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가 주도한 10.26은 아직 그 평가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분명한 건 불행한 현대사의 장면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그로 인한 유신 체제의 붕괴로 서울의 봄이라 불렸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부활 가능성이 열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전두환이 주도한 12.12 사태로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격동의 1979년이었다. 견고하던 유신 체제가 하나씩 그 한계를 드러내며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이어졌다. 모두가 우연히 일어난 일로 보이지만, 어쩌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사건들이었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그때 이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또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민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방송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유신 체제의 몰락 과정은 한 편의 대서사시 같았다. 이어지는 12.12 사태와 신군부의 등장까지 또 다른 현대사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문화 > 미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저널 그날 292회] 절대 권력의 어두운 이면, 김형욱 실종사건 (6) | 2020.12.16 |
---|---|
[역사저널 그날 291회] 유신정권 몰락의 단초가 된 YH 무역 사건 (7) | 2020.12.09 |
[역사저널 그날 290회] 대한민국 고도성장 이끈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명암 (6) | 2020.12.03 |
[선을 넘는 녀석들] 대몽 전쟁의 끝,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 (4) | 2020.11.30 |
[선을 넘는 녀석들] 고려 시대 최악의 암흑기, 무신정권기 (5) | 2020.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