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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의 여러 사건들을 따라가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92회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 권력의 핵심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중앙정보부 수장이었던 김형욱 실종사건과 그 비화를 다뤘다. 

김형욱 실종사건은 유신정권 말기였던 1979년 10월 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전직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홀로 파리를 찾았고 그곳에서 돌연 종적을 감췄다. 이후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없었다. 그의 실종은 긴 세월 미스터리로 남았고 여러 추측들이 남 무했다. 긴 세월이 흘러 김형욱은 법원의 사망선고가 내려졌고 법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실종 과정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2000년대 초반 국정원의 과거사 위원회에서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속 시원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하여 그가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이 유기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그와 관련하여 납치 후 파리에서 살해 후 시신 유기설과 국내 강재 압송 후 살해 후 유기설 등 구체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증거는 없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형국은 파리에서 납치되어 파리 근교의 양계장에서 피살된 후 사료 분쇄기에 들어가 사라지는 끔찍한 장면이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이를 시행했다고 주장하는 이의 증언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를 정설로 믿기도 했지만, 증언자는 이후 현장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기억해 내지 못했고 증언 곳곳에서 허점이 있었다. 

 

 



김형욱의 최후는 다시 미궁 속에 빠져들었다. 국정원의 과거사 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한 납치 공작이 실제 했고 그는 국정원 요원과 현지 외국인에 의해 파리 근교 숲에서 살해되고 시신이 숲에 유기되었다는 정황을 발표하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국정원 요원은 그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 김형욱을 숲으로 끌고 간 외국인들의 진술을 전해 들은 것이었다. 즉, 김형욱의 최후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건 당시 김형욱이 유신정권에 의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형욱은 왜 그 죽음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는 그의 행적을 되짚어 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김형욱은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쿠데타에 함께했고 이후 군사정권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김형욱은 바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상대적으로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육사 동기 김종필이 박정희의 브레인으로 5.16 쿠데타를 주도하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출발은 늦었지만, 김형욱의 저돌적인 성격과 강한 충성심은 점차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부족한 정통성을 강압적 통치와 중앙정보부 등으로 대표되는 정보기관을 통한 공작 등으로 채우며 권력을 강화했다. 당연히 각종 공작을 주도한 중앙정보부는 권력의 핵심 기관으로 자리했다. 중앙정보부장 역시 대통령과 바로 통하는 권력의 실세가 될밖에 없었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수장으로 간첩단 조작 사건 등 각종 공작을 주도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인들을 사찰하고 그들의 사생활에서 파생된 약점을 찾아 이를 정치공작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중앙정보부의 권한을 악용해 정권에 반대하거나 장애가 되는 인사들을 불법 연행하여 고문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각종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던 남산은 공포의 장소였다. 한때 정권에 비판적인 발언들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으로 끌려간다는 말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기도 했다. 그만큼 중앙정보부는 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다. 

김형욱은 그런 비난을 감수했다. 그는 대통령의 의중을 사전에 파악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다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으로 이어졌다. 그가 1963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가장 오랜 기간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하는 원동력이 됐다. 동시에 그는 권력의 사실상 2인자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김형욱은 권력과 함께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당시 해외 차관을 도입하거나 기업들의 공사 수주에 있어 막대한 리베이트가 관행이었다. 정격유착이 극심한 정치, 경제 구조 속에서 불법적인 자금이 권력에 전해지는 것도 공공연했다. 이 돈은 통치자금 명목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상당 부분 관리되었다. 김형욱은 이 자금을 관리하면서 개인적으로 유용했다. 그는 국내외에서 재산을 쌓았고 이는 훗날 그가 미국 망명 후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김형욱의 악행이 절정에 달한 건 1969년 3선 개헌과 관련한 정치공작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재선 이상이 불가능한 헌법을 고치고 세 번째 출마의 길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야당은 물론이고 차기 권력으로 주목받던 김종필을 따르는 여당의 김종필계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국회의 개헌한 표결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김형욱의 중앙정보부가 해결사로 나섰다. 

김형욱은 김종필계 의원들에게 범죄 행위를 뒤집어 씌우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헌 찬성을 하게 하는 방법으로 그 세력을 와해시켰다. 또한,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은 그동한 축적한 개인 사생활 자료 등으로 겁박해 찬성으로 돌아서게 했다. 그의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3선 개헌안은 야당의 결사 저지를 새벽시간 비밀 투표로 피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김형욱은 3선 개헌 성공에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김형욱이 권력에서 버림받는 일이 됐다. 그동안 누적된 김형욱에 대한 정치권을 반감은 극에 달했다. 각하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의 악행은 여당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3선 개헌 시 여당의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김형욱의 해임을 강력한 요청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3선 개헌안이 통과된 후 얼마 안 가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났다.

사실상 토사구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를 넘겼고 김형욱의 비대해진 권력을 우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에 대한 비난 여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형욱의 악행은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후임 중앙정보부장에서 김형욱과 같이 사람들을 팰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는 에피소드는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졸지에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 김형욱으로서는 변화한 상황이 큰 충격이었다. 이후 여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하긴 했지만, 권력의 2인자로서 가졌던 권세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그동안의 악행으로 쌓인 주변의 원한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다. 권력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공작의 대상이 돼 제거될 수 있다는 걱정도 커지는 게 당연했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3선에 성공하고 유신을 선포하면서 국회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그는 국회의원 직도 잃었다. 김형욱은 국회의원의 1/3을 지명하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외면했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불법을 마다하지 않고 충성했던 권력자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김형욱으로서는 국내에서의 삶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다년간 일했던 그로서는 절대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쓰임새가 다한 그에게 언제든 권력의 칼날이 다가올 수 있었다. 

이에 김형욱은 1973년 4월 돌연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김형욱은 그전에 그의 국내 재산들을 정리해 미국으로 보냈고 미국 유학 중인 자녀들에 이어 배우자를 먼저 미국으로 보냈다. 이후 김형욱은 대만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일을 계기로 대만으로 출국했고 그곳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김형욱은 축적한 재산으로 미국의 부촌에 저택을 구입하는 등 초호화 생활을 했다. 불법과 탈법을 자행하면서 모은 재산으로 얻은 결과였다. 하지만 김형욱은 항시 총을 소지하고 경호원을 배치하는 등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를 항시 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권력의 치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김형욱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이후 수차례 특사가 파견되어 그의 동향을 파악하고 귀국을 종용하는 조치를 하기도 했다. 또한, 김형욱을 겨냥한 특별법을 만들어 그의 남아있는 국내 자산 반출을 금지하는 등의 보복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형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내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등 반유신 발언은 서심치 않았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각종 불법, 탈법적 공작과 관련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특히, 1976년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정관계 인사들을 상대로 한 로비가 뇌물 살포 등 사실이 드러난 코리아 게이트 사건 시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과 관련한 미국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었던 박정희 정권에게 권력의 실세였던 김형욱의 반유신 활동은 정권을 흔들 수 있는 일이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과 김형욱의 갈등을 더 깊게 했다. 하지만 미국에 망명 중인 김형욱에게 할 수 있는 조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특사 파견을 통해 그를 회유하는 게 고작이었다. 

중앙정보부장 출신 김형욱이 이에 응할 리 만무했다. 이에 더해 김형욱은 회고록 출판을 강행하며 박정희 정권과 더 큰 대립각을 세웠다. 정권의 치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김형욱의 회고록은 큰 위협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막대한 금액을 제공하고 출판을 막으려 했고 원고를 회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형욱은 또 다른 원고를 바탕으로 회고록 출판을 강행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과 김형욱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중앙정보부는 그의 제거를 위한 공작을 본격화했고 그 과정에서 김형욱은 파리에서 실종되며 법적으로 사망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자신에 대한 신변 위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김형욱이 왜 파리로 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와 밀월 관계가 있었던 여배우가 유인했다는 설과 회고록 출판과 관련해 거래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지만, 김형욱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최후를 맞이한 건 분명하다. 

더 중요한 건 다른 곳에 있다. 김형욱은 불법과 탈법을 서슴지 않았던 권력기관이 수장이었고 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불법에 근거했다. 그의 미국 망명과 그곳에서의 반유신 활동 또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그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김형욱의 자신의 악행에 대해 진심어린 반성을 했다는 기록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 대부분이 당시 권력의 폭력에 의해 고통받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김형욱은 권력자의 지시에 따랐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그의 행위를 통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고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다. 왜곡된 정보기관의 역할을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고 얼마 전까지도 그 악행을 이어왔다. 그 잘못된 전통을 만들어낸 김형욱은 비판받아야 할 인물이다. 

또한, 김형국 실종사건은 국가를 위한 일과 먼 권력 내부 암투의 산물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형욱의 행위를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바라봤다. 당시 기울어가던 유신정권은 국내의 변화 요구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억압하며 권력을 지켜가고 있었다. 김형욱은 비리와 불법으로 점철된 인물이었지만, 그의 발언에 전전긍긍해야 했고 거래를 제안해야 했다. 범죄 혐의가 있다면 마땅히 그를 소환시켜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고 은밀한 공작으로 그를 제거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과 김형욱의 갈등은 절대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김형욱 실종사건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민주주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권력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하는 일이다. 김형욱의 실종과 관련하여 그 이면의 문제보다 그 과정과 결말에만 관심을 가지는 건 문제가 있다. 이는 그의 실종과 비참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최후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기 어렵게 한다. 역사는 권력의 폭력과 이를 주도했던 인물에게 관대함을 베푸는데 인색할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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