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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12월 13일 방송에서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최근 사건 중 하나인 12. 12 군사 반란과 관련한 막전 막후 이야기를 다뤘다. 12. 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 장성들이 주도한 사건으로 이들은 각 휘하의 부대를 서울로 진입시켜 국방부와 육본 등 군 지휘부를 장악하고 당시 계엄 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이었다. 

12. 12 군사 반란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이후 군 요직을 장악하며 군권을 장악한 데 이어 국가 권력을 차지하고 또 다른 군사정권의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시작한 제5공화국의 집권 세력은 그 기간 내내 민주화 운동을 힘으로 억압하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인권유린 행위를 저질렀다. 군부 독재의 시즌 2라 할 수 있는 제5공화국은 1987년 시민들의 주도한 6월 혁명으로 붕괴됐다. 하지만 제5공화국의 흔적인 여전히 현재까지 그 잔상을 남기고 있다. 

12. 12 군사 반란의 표면적 이유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한 박정희 대통령 관련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사건을 주도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밀접한 관계였고 사건의 공범 여부를 수사하기 위한 연행 과정에서 당시 수사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 사령관과 그를 따르는 군부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군부세력 간의 충돌에 있었다. 

 

 



실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10.26 사건 발생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요청을 받고 사건이 발생한 궁정동 안가 인근에 있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사건 직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그와 함께 중앙정보부로 향했지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요청으로 육본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자리에서 정부 관료들과의 회의가 열렸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 유고와 비상계엄 선포를 주장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이후 사건의 전말을 인지하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채포를 지시했다. 일련의 과정은 그가 10.26 사건을 공모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한 수사를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에게 일임했다는 점이었다. 보안 사령관 전두환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고 있었고 하나회 세력은 막강했다. 끈끈하게 얽힌 하나회 조직은 영남 출신 육사 출신 장교들이 주류를 이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충성해야 할 군대에서 사적 이익을 공유하는 사조직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회의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속에 그 세력을 공고히 했다. 

전두환은 5.16 쿠데타 당시 이를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거리 행진을 주도한 이력이 있다. 이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든 그는 이후 군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는 그가 주도한 하나회가 군내 중요한 파벌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군의 움직임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군내에서 자신의 영향을 유지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하나회는 이런 박정희 대통령이 군을 장악할 수 있는 눈과 귀가 되어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고 대통령의 비호로 세력을 더 키울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3군데 중요한 권력 기관이 있었다. 대통령 경호실은 자신의 신변을 직접적으로 지키는 기관이었고 중앙정보부는 정권 유지에 필요한 각종 공작을 수행했다. 전두환이 이끄는 하나회 조직은 군 장악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는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권한과 역할을 넘는 월권을 초래했고 왜곡된 군내 조직 문화를 만들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통치 시스템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 속에서 세력을 키운 하나회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큰 위기였다.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다면 하나회 조직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안 사령부의 10.26 사건 수사는 큰 기회였다. 수사를 주도한 전두환은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알릴 수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두환은 이를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그 시작은 군권 장악이었다. 전두환의 하나회 중심은 육사 11기로 이들은 전후 최초로 4년제 육사 과정을 마친 인물들이었다. 그전에는 전쟁과 이후 혼란을 겪으면서 장교 교육이 속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였다. 남다른 자부심이 있는 육사 11기는 강한 결속력이 있었다. 이는 12. 12 군사 반란 시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이런 하나회 세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는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전출시키는 방향으로 하나회 세력 약화를 위한 군 인사개편을 준비 중이었다. 하나회 멤버들에게는 이보다 큰 위협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정승화의 10. 26 연루 혐의를 이용해 군내 정승화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윗선의 재가가 필수적이었다. 즉,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유신헌법 체제 속에서 새롭게 대통령이 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전두환의 하나회, 신분구 세력은 12월 12일을 거사 일로 정하고 군부대의 서울 진입과 이후 행동 등을 결정하고 준비과정을 거쳤다. 12월 12일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얻기 위해 그가 있었던 삼청동의 총리 공간으로 향했고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위한 부대는 별도로 그가 머물던 육본으로 향했다. 재가 즉시 연행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동시에 서울 외각의 하나회 군부대는 서울로 향했다. 그 안에는 전방을 지키던 9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계획과 달리 최규하 대통령은 재가를 미루고 전두환과 대치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연행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국방부 장관과의 통화를 주장하며 전두환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 국방부 장관은 신군부의 세력의 군사행동이 발생한 직후 몸을 숨기고 피신하면서 연락이 두절됐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신군부 세력은 무력 충돌 속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와중에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연행과 육본, 국방부 장악에 성공했다. 

12월 12일 늦은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통령의 재가가 없는 불법이었다. 이는 그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잃게 하는 일이었다. 신군부로서는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압박했다. 마침 신군부 군인들에 의해 붙들린 국방부장관이 새벽시간 최규하 대통령과 면담했다. 군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의 재촉에 최규하 대통령은 재가를 했다. 하지만 그는 재가 서류에 날짜와 시간을 명시했다. 이를 통해 사후 재가임을 명확히 했다. 훗날 최규하 대통령의 이 서명은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과정에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을 단죄하는 증거가 됐다. 다만, 훗날 신군부에 의해 대통령 자리에서 사실상 밀려난 최규하 전 대통령이 그와 관련한 증언을 일체 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12. 12 군사 반란으로 군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은 이후 권력을 하나하나 장악했다. 전두환은 소장으로  보안 사령관으로 있었지만, 이후 1년여의 시간 동안 별 2개를 더 달고 대장으로 예편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고 보안 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면서 정보기관을 모두 손에 넣으면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신군부의 야욕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의 확대와 함께 사실상의 쿠데타로 이어졌고 민주주의 회복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요청을 힘으로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활동은 금지되고 다수의 정치인들이 투옥, 구금됐다. 비극적인 현대사 광주민주화 운동의 비극도 이때의 일이었다. 광주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는 이후 국보위라는 초법적 행정기관을 만들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 결과 전두환은 유신 시절과 유사한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의 봄이라 불리며 기대감을 높였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고 새로운 군사정권에 의한 철권통치가 뒤를 따랐다.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12. 12. 군사 반란과 광주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등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은 김영삼 정부 시절 법의 심판을 받았다. 군의 하나회 역시 와해됐다. 역사도 12. 12를 군사 반란으로 광주사태로 불리던 광주민주화 운동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과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노태우는 김영삼 정부 시절 죄악에 대한 처벌을 받고 법의 심판까지 받아야 했다. 이후 국민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얼마 안 가 사면을 받았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 등은 박탈됐다. 이들에게 전직 대통령이라는 명칭은 이제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를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진실된 사과는커녕 과거 악행을 부정하며 호화롭게 살고 있다. 그때의 주역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들 상당수는 여전히 우리 정치, 사회, 경제계 등 전반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들에게서 피해를 입은 이들은 여전히 그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또한, 두 번의 군사정권 시절 굳어진 사회의 잘못된 구조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 시대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그때는 불가피했다는 논리로 자기 변호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친 이들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혜택을 받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

이는 우리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현대사에 대한 교육이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지금의 독일이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악행을 사실대로 교육하고 끊임없는 반성과 배상을 하면서 유럽을 이끌어가는 국가로 거듭난 점은 우리와 일본의 관계에서만 참고할 부분이 아니다.  

분명한 건 현대사를 바라볼 때,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지켜지고 지금으로 모습으로 만들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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