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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90회] 대한민국 고도성장 이끈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명암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12. 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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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내수 시장만으로는 성장을 대신할 수 없고 무역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우리 현실에서 수출은 경제 성장의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매월, 매 분기 경제 관련 뉴스에서 수출 실적과 그에 부수되는 무역수지, 경상수지 흑자와 적자 관련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더 절실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수출 증대는 국가 생존을 위해 작게는 정권의 생존을 위해 절실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반공과 경제성장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다. 전후 세계 최빈국 하나였던 대한민국에서 경제성장은 꼬 필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군사정권은 경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경제발전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이를 위해 국가적 역량을 집중했다. 그 한편으로 수출 증대를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단기간 내 놀라운 수출 증대를 이뤄냈다. 이는 경제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역사저널 그날 290회에서는 1970년대 대한민국 수출 증대를 위한 노력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다뤘다. 

수출 증대는 경제개발 5개년 초창기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당장은 각종 물자가 절대 부족한 시절 해외로 우리의 상품을 판다는 걸 쉽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대외 여건의 변동이 수출에 대한 정권의 관심을 불러왔다. 당장 대외 부채의 해결이 시급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의 무상원조에 경제 상당 부분을 의존했던 대한민국은 무상원조가 유상원조로 변화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외채 상환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이에 필요한 달러를 만들어낼 방법은 수출뿐이었다. 여기에 원화 대 달러 환율의 변화가 큰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초반 고정환율제를 사용하던 대한민국에 대해 미국인 원화 가치 상승을 요구했다. 이에 달러에 대한 가치가 배로 증가했다. 이는 같은 가격의 제품을 수출했을 경우 배의 이익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수출품에 대한 부가가치를 높이고 더 경제발전은 위한 재원 마련을 용이하게 했다. 이에 정부는 수출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하지만 산업기반이 전혀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수출품목은 제한되어 있었다. 주 수출품은 농산물과 광물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산업 고도화가 기회로 작용했다. 일본은 1960년대 경제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중화학 산업 위주로 고도화했다. 이에 경공업 산업은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으로 이전됐다. 대한민국은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품목을 다변화했다. 저임금을 기초로 한 노동집약 산업이 대한민국 수출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초기 상황은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엄청난 노동시간을 감수해야 했다. 그 희생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제품은 점차 세계 시장에서 존재를 알렸다. 

1960년대 대한민국 수출품에는 사람들의 생모로 만든 가발과 쥐를 잡아 그 털로 만든 옷 등이 있었다. 당시 각 마을에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사는 상인들이 있었고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부족한 물자와 여건 속에 수출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이렇게 수출이 증가하면서 정부의 관심은 한층 더 커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수출 관련 회의가 수시로 열렸고 각 부처는 수출 증대를 위한 목표를 할당받았다. 해외에 나간 대사와 영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수출 기업에 대한 무한한 지원도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수출 기업이 부실화되는 문제도 있었지만, 정부는 수출 드라이브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정책이 이어지면서 지금 재벌군을 이루는 대기업이 성장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 사이 수출은 1억 달러를 넘어 10억 달러로 계속 증가했다. 서는 쾌거를 이뤘다. 이는 대한민국 고도성장을 견인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980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천명하며 더 강하게 수출 증 드라이브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수출 100억 달러는 꿈의 숫자였다. 대부분이 허황된 목표로 여겼다. 유신시대 친 정부 성향이 가득한 기사를 양산하던 언론에서도 수출 100억 달러 목표가 3대 웃음거리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정권의 명운을 걸 정도로 매달렸다. 우선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중화학 공업으로 고도화하는 시도를 했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외채와 국가 재정으로 이를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재벌기업들의 덩치는 훨씬 커졌다. 또한, 해외무역을 전담하는 회사, 상사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수출입을 하는 작은 오퍼상에서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가진 대우의 신화도 이런 흐름 속에서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해외무역을 할 수 있는 상사가 설립 요건이 까다로운 탓에 상사는 모두 대기업이 주도했다. 정부의 지원은 그쪽으로 쏠렸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가 더 강해졌다. 대기업과 정부, 정부의 감독하에 있는 금융기관까지 더해진 정경유착, 관치금융의 고리가 생겨났다. 

여기에 1974년 아랍 국가들이 원유를 무기화 하면서 파생된 1차 오일쇼크의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수출 증대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당시 원유가는 급격히 오르면서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고 산업 전반에 큰 어려움이 발생했지만, 반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중동의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또 다른 기회가 생겼다. 현대건설로 대표되는 대형 건설사들은 저렴한 수주가격과 공기 단축을 장점으로 내세워 중동의 대형 건설, 토목 공사를 수주했다. 1976년 당시로는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우디 주바일 항만공사 수주가 대표적이었다. 

현대건설은 치열한 수주전을 뚫고 10억 달러 공사를 따냈다. 공사의 빠른 진행을 위해 대형 해상구조물을 국내에서 만들고 이를 해상으로 수송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위험부담이 큰일이었지만, 공기단축과 비용 절감을 위해 불가피했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이 시도는 성공했고 이는 중동 건설 붐에서 대한민국 기업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도록 했다. 당시 10억 달러 계약은 국내 총생산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규모였다. 건설공사는 수출에 또 다른 효자 산업이 됐다. 

이런 중동 건설 수주를 돕기 위해 정부는 국가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현장 지원이 곳곳에서 있었고 중동지역에 긍정적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태권도 시범단을 조직해 공연을 하는 등 노력도 병행했다. 1974년 건설부 장관에 박정희 대통령의 동기이나 훗날 중앙 정보부장이 된 김재규를 임명한 것도 정부의 중동 건설 수주 등 기업들의 해외활동을 돕기 위한 강한 의지의 한 단면이었다.  

이렇게 국가 주도의 수출 증대 드라이브와 국가 무한 지원하는 대표 선수 대기업군의 조합은 1977년 대한민국 수출 100악 달러 달성의 목표를 빠르게 달성하는 성과를 냈다. 유신정권으로서는 이런 경제적 성과가 정권 유지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믿었다. 실제 대한민국은 1970년대 고도성장을 통해 북한에 뒤져있던 경제규모를 역전시키고 체제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었다. 국민소득 또한 증가했고 올 국민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도 가지게 됐다. 

이를 통해 유신정권의 지속력은 더 강화되어야 했지만,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이후 얼마 안 가 1979년 유신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경제발전의 성과가 오히려 정권의 몰락을 빠르게 한 아이러니였다. 고도성장은 분명 경의적이고 세게 최빈국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었지만, 무리한 수출 드라이브의 후유증이 내적으로 커지고 있었다. 수출 증대의 주요 기반은 상대적으로 싸고 유능한 인력에 있었다. 

기업들은 점점 그 규모를 키워갔지만, 기업의 기반이 되는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사건이 당시 일어났다는 건 그만큼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해졌음을 의미했다. 또한, 기업의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지원한 탓에 부실기업 정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기업군을 형성하면 열악한 재무 상황에서 부채에 부채를 더해 그 생명을 다할 수 있는 소위 대마불사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금융권의 기업에 대한 여신은 과도하게 커졌고 정부지원으로 기업들이 도입한 해외차관 규모도 크게 늘어났다. 극심한 인플레이션도 뒤따랐다.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과 지원에 의존한 기업들의 부실화는 결과적으로 국가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업들은 정부와 관계 유지에 더 골몰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문제가 되는 정경유착과 그에 파생되는 권력형 비리 구조가 가 생겨났다. 건전하지 못한 경제구조는 대한민국 경제를 속에서 곪게 했다. 1979년 경제를 강타한 2차 오일 쇼크로 대한민국 경제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앞만 보고 권력자의 목표만 보고 달렸던 대한민국 경제는 내면의 부실함을 살피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은 대한민국 경제구조를 흔들리게 했고 민생에도 타격을 주었다. 

이는 민심의 이반을 급속화했다. 불평등한 노동조건과 부당한 기업 폐업에 항의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에서 농정을 벌이고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한 노동자가 사망하는 YH 무역 여공 사건,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의 제명으로 촉발된 부마항쟁으로 표출됐다. 유신정권은 이를 모두 무력으로 진압하는 강경책으로 일관했고 1979년 10월 26일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에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면서 유신정권도 몰락을 길을 걸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단기간의 경제성장과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이라는 영광의 트로피를 얻고도 유신정권은 그 영광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만약, 당시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경제적 분배와 복지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용했다면 정치와 사회의 선진화에도 힘썼다면 우리 현대사와 우리의 삶은 크게 변했을 수도 있다. 경제적 성과에도 여전히 그 공과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비극적인 최후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역사저널 그날 290회는 역사의 사건과 장면들을 한 면만 봐서는 안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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