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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대한민국은 유신헌법에 기초한 유신 체제 속에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사실상 행정, 입법, 사법부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고 종신 집권의 길을 가고 있었다. 초 헌법적인 대통령 권한에 근거한 독재 정권은 언론과 대중문화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삶까지 통제했다. 식자층을 중심으로 유신 체제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고 시간이 흐를수록 유신반대 운동은 더 거세졌다. 

이에 정권은 국가권력을 동원해 힘으로 유신반대 운동을 탄압했다. 1973년 8월에는 해외에서 유신반대 운동을 하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폭행, 감금하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훗날 지금의 국정원이 중앙정보부의 수행으로 밝혀진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르기도 했다. 야당의 지도자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유신시대였다. 특히, 대통령이 발동할 수 있는 초헌법적 권한인 긴급조치는 유신반대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1974년 4월 3일 발표된 긴급조치 4호 역시 유신반대 운동과 관련된 일이었다. 긴급조치 4호는 유신반대 운동의 중심이었던 대학가를 겨냥한 조치로 이를 주도하는 전국적인 학생조직인 민청학련의 활동을 반국가활동으로 규정하고 이와 관련한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통해 대학교에서의 정치적 활동은 사실상 금지돼됐다. 이를 어기거나 비판할 경우 최소 5년 이상의 징역이나 최대 사형까지 처해질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유신정권은 같은 해 4월 25일 인민혁명단 재건위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인민혁명당 즉, 인혁당이라는 조직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결성된 은 지하조직으로 이들은 국가전복을 꾀했고 민청학련의 배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반공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배후에 있는 인혁당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여 조작된 사건이었다. 당시 인혁당 사건으로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고 처벌을 받았지만, 긴 세월이 흘러 이들은 대부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가혹한 고문으로 체포한 인사들로부터 자백을 받았고 그 자백은 재판에서 증거로 활용됐다. 또한, 훗날 밝혀진 대로 인혁당의 실체조차 불분명했다. 증거 역시 허술했다. 이 사건은 유신반대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공안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88회에서는 이 인혁당 사건의 실체에 대해 다뤘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 이미 1차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한일수교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각계각층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큰 부담이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에 인혁당이라는 북한이 배후에 있는 지하조직이 있다고 발표했고 수많은 인사들이 체포됐다. 대부분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1차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수사와 기소를 담당했던 당시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를 거부하며 사퇴했다. 사건의 구성이나 증거가 그만큼 부실했고 검사들은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에 협조하지 않았다. 사건 관련자들의 기소는 검찰 총장의 명령을 받은 당직 검사에 의해 억지로 기소가 됐고 재판이 진행됐다. 재판 과정에서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행위가 폭로되면서 기소의 정당성이 흔들렸다. 언론에서도 이를 다루면서 중앙정보부는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결국, 상당수 인사들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처벌을 받은 인사들의 수위도 낮았다. 당시는 삼권분립의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었고 언론도 기능하고 있었다. 

2차 인혁당 사건은 그때와 달랐다. 유신 체제 속에서 국가의 권력은 대통령의 뜻에 순응해야 했다. 이에 저항하는 건 반국가 행위였다. 또한, 언론들 역시 정권의 반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혁당 사건의 피고인들이 제대로 된 재판을 받는 건 불가능했다. 긴급조치를 통해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은 정상적인 재판이 아닌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변호인 접견은 단 1차례에 불과했다. 가족들의 면회 역시 불가능했다. 조사 과정에서 인혁당 관련자들은 전기고문과 물고문 각종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가족들 역시 중앙정보부의 함께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런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 인혁당 관련자들은 철저히 격리됐다. 이들을 도우려는 움직임도 차단됐다. 이들의 변호인 중 일부도 재판 과정에서 구속되고 처벌받기도 했다. 이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돕던 미국인 목사와 신부들도 정권에 의해 강제추방되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의 피고들은 고립된 상황에서 정해진 결과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됐다. 특히, 인혁당의 핵심세력으로 분류된 8인은 1심에서 선고된 사형이 대법원까지 변하지 않았다. 고문으로 자백된 이들의 진술서는 그대로 재판의 증거로 활용됐고 법정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임을 항변하고 혐의를 계속 부인했음에도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법정에서 그들의 진술마저 공판기록에서 혐의 인정으로 왜곡되기까지 했다. 

거의 1년여에 걸친 인혁당 사건 재판은 마지막 대법원에서도 그 판결이 달라지지 않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8인의 운명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8명의 인사들은 모두 정치와 거리가 있었고 평범한 삶은 살았던 가족의 가장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체포 당시 일상생활을 하던 중이었고 자신들이 어떤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는 조차 알 수 없었다. 이들은 지하조직을 만들 역량과 힘도 없었다. 중앙정보부의 시나리오에 따라 이들은 인혁당의 핵심 인사가 됐다. 1, 2차 군사재판 이후 마지막 희망이었던 대법원에서도 이들의 억울함을 풀리지 않았다. 1974년 4월 8일 대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8시간 만에 8인의 사형이 집행됐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국내외에서 뒤따랐다. 당시 대법관 13명 중 재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이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판사들은 기존의 판결을 그대로 인용했다. 만약, 사형수들이 국가전복을 위한 지하조직의 주동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면 상세히 조사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들의 존재를 없애는 것이 우선인 듯 이들의 사형집행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심지어 유가족들은 그들의 마지막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면회를 위해 교도소를 찾았던 가족들에게 들려진 소식은 사행 집행이었다. 사행 집행 이후에도 이들의 시신 중 일부는 경찰에 의해 강제로 탈취되고 화장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의 몸에 남은 고문의 흔적을 없애려는 일이었다. 

이렇게 인혁당 사건 8인의 사형수들은 최소한의 인권조차 말살당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남은 가족들은 이후 용공분자, 빨갱이의 가족과 자식으로 사회로부터 지탄받으며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다. 연좌제로 인해 경제활동도 제한되고 취업도 어려웠다. 이들은 그 억울함을 말할 수도 없었고 숨죽이며 살아가야 했다. 

유신정권은 인혁당 사건 등 용공조작 사건을 통해 유신반대 운동을 탄압했다. 유신반대 운동 세력을 용공세력으로 만들어 일반 국민들로 분리하고 이들에 대한 탄압을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정권 유지를 위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공작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에 무고한 사람들이 처벌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정권 유지를 위한 국가권력의 폭력이었다. 유신정권은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위해 반인권적인 방법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1970년대 우리 현대사를 암흑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2000년대 들어 정부 차원의 조사가 이루면서 조작 사건들의 실체가 밝혀졌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도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하긴 했지만, 그렇게 하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8인의 사형수들은 재심 재판정에 나올 수도 없었다. 무고한 죽음까지 재심으로 되돌릴수는 없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이들과 그 가족들이 잃어버린 세월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그나마 유가족들이 받은 국가배상금에 대해서 국정원은 그 금액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하며 유가족들의 마음을 또다시 아프게 했다. 그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인혁당 사건은 우리 유신 체제의 그림자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고 부끄러운 현대사의 사건이었다. 이후 진상이 다시 규명되고 사건 당사자들은 억울함을 벗었지만, 사건의 책임자들은 이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당시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각자의 분야에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대를 이어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 남아있다. 당시 시대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조차 그들은 하지 않았다. 마치 일제시대 일제에 협력하고 온갖 혜택을 누린 친일파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게 된다. 

인혁당 사건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인혁당 사건은 시대의 아픔이었다. 분명 반복되지 말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신 체제의 정점에 있었던 권력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다시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일을 경험해야 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인혁당 사건 등 유신 체제하에 자행된 인권유린의 사건들에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때의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를 거울삼아 미래지향적 정치를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는 오히려 유신 체제를 연상하게 하는 퇴행적 모습을 보였고 국민들의 힘에 의해 탄핵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과거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거울이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현재의 삶을 보다 가치있게 만들 수 있다. 회피하고 숨기는 건 더 나은 미래를 담보할 수 없고 그 잘못이 다시 반복될 가능성을 남긴다. 인혁당 사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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