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방송에서 관심 있게 본 프로그램이 있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일어났던 청산리 전투와 관련한 프로그램이 그것이었다. KBS에서는 관련한 특별 방송이 있었고 MBC 교양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도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방송을 채웠다. 공중파 방송에서 우리 독립운동사를 상세히 다뤄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돋보였던 인물은 홍범도 장군이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무장독립 투쟁의 가장 큰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는 청산리 전투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있었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장군이었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이름이 덜 알려져 있었던 홍범도 장군이었다. 봉오동 전투 역시 최근 영화로 제작되기 전까지 교과서에서 몇 줄 다뤄지는 것 외에 그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최근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그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되고 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했다. 1868년 조선 말기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 때부터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다해야 했다. 당장의 먹을거리가 급한 어린 그에게 외세의 침략과 함께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나라의 사정은 그와는 동떨어진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사회 최하층에서의 삶은 점점 사회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스스로를 자각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1895년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을미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홍범도는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이는 독립운동가이나 독립군 장군이 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의병활동은 다시 그 불길이 사라져갔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함게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이 본격화되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함께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하면서 국내 무장독립 투쟁은 다시 뜨거워졌다.
함경도 일대에서 사냥을 하는 포수로서 생계를 이어가던 홍범도는 포수들을 규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험악한 산악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을 곳곳에서 전개했다. 당연히 일제로부터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의 가정사에 큰 불행을 가져왔다. 한때 그가 산사에서 수행을 하던 중 만난 아내는 일제의 모진 고문에 목숨을 잃었고 첫째 아들은 교전 중 사망했다. 이는 홍범도를 좌절하게 할 일이었지만, 그는 하나 남은 둘째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을 했다.
무장독립 투쟁은 그 세를 확산하여 서울 진공작전까지 도모할 정도였지만,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탄약 등 지속적인 보급이 불가능해지고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그 세가 점점 약화되었다. 지속적인 무장독립 투쟁을 위해 그 세력들은 해외로 이전하여 훗날을 도모하는 추세였다. 홍범도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만주에서 새로운 독립 투쟁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하나 남은 둘째 아들 역시 병사하면서 그는 그의 혈육을 독립운동 과정에서 잃고 말았다. 모진 시련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무장독립 투쟁을 이어갔다.
마침 1919년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무장독립 세력을 규합해 군대로 만들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에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흩어져있던 무장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여 독립군 부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침 만주 지역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들의 터전을 잡아 살아오던 지역으로 조선말부터 우리 민족의 지속적인 유입이 있었다. 만주지역의 조선인들은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인적, 물적 보급로이자 이를 지속하게 하는 원천이었다. 만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고 무장독립투쟁 세력들 역시 큰 도움을 받았다.
만주지역 동포들의 지원 속에 독립군은 무기 등 전투를 위한 준비를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당시로는 최신식 무기인 기관총까지 구입하며 전력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었다. 만주지역 독립군 세력은 일제에는 큰 위협이었다. 마침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반식민주의를 표방했다. 만약 대한민국 독립군 세력과 소비에트 정권이 연결된다면 일제의 만주, 중국 침략과 조선에 대한 지배에 큰 악재가 될 수 있었다.
이에 일제는 정예 군대를 만주지역으로 파견하여 독립군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소규모 유격전 형태로 국경지역을 오가며 일제와 대결했던 독립군들로서는 아시아 최강의 일본군과 전면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화력이 강화됐지만, 공군까지 동원한 일본 정규군과의 전면전은 무리였다. 독립군들로서는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결국, 독립군 세력은 연합군을 구성하고 일본군과의 대결을 택했다. 전력을 모두 동원한 대결이 아닌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와 1920년 10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이어진 청산리 전투가 발생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가 소속한 대한 독립군단이 중심에 있었고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단 등 독립군 조직이 연합한 전투였다.
영화로도 소개된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단은 그들을 추격해온 일본군을 그들에게 익숙한 험준한 숲에서 대결해 대승을 거뒀다. 독립군 섬멸을 위해 불법으로 중국 국경을 넘어온 일본군은 독립군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예상치 못한 강한 공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정규군 간 대결에서의 승리로 그 의미가 컸다.
이후 일본군은 더 체계적으로 독립군 섬멸을 준비했고 한층 강화된 전력으로 중국 국경을 넘었다.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해 만주지역 마적을 이용해 조작한 훈춘사건을 빌미로 대규모 군대를 만주로 파견했다. 독립군으로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전쟁을 해야 했다. 그렇게 만주 일대에서 전개된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엄청난 의지로 초인적인 산악 행군을 통해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유인작전을 통해 일본군과의 수차례 대결에서 승리했다. 당시 독립군은 절대 부족한 식량 탓에 굶주림을 참고 전투에 임해야 했고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야영 시 불도 제대로 피울 수 없었다. 이에 굶주림과 동사로 사망한 독립군이 상당수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군은 승리의 전과를 만들어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배후로 침투하려는 일본군을 막아내며 전투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으로 김좌진 장군이 먼저 언급되지만 홍범도 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빛나는 승리를 했지만, 독립군의 상황은 더 열악해졌다. 일제는 패배의 앙갚음으로 만주지역 조선인들에게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단행했다. 이에 독립군들의 중요한 보급원이었던 만주지역 조선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독립군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속적인 전쟁을 위해 필요한 물자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웠다. 이에 더해 일제의 만주침략이 노골화되고 일제가 주도하는 만주국이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활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독립군들은 일본군과 만주국 군대, 일제의 지원을 받는 지역 마적들과의 위협까지 받았다. 결국, 만주지역 독립군들은 새로운 활동을 위해 연해주 지역이나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본토로 이동해야 했다.
홍범도 장군 역시 만주 지역을 떠나 연해주로 이동했고 그곳에 정착했다. 당시로는 많은 나이인 50대에 그는 치열한 독립전쟁의 중심에 있었고 다시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험난한 여정이었다. 연해주에서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등 전투 외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의 생전 영상이 담긴 극동민족대회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대표들이 함께 한 자리로 홍범도 외에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그곳에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 소련의 최고 지도자 레닌과 면담하고 그의 선물을 받는 등 큰 환대를 받았다. 그동안의 독립운동 이력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고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이런 이력은 그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로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소련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과의 밀접한 관계 유지는 불가피했다. 실제 소련으로부터의 지원도 있었다. 독립운동가들로서는 이념을 떠나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홍범도 장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범도 장군은 연로한 나이에 독립군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지만, 독립운동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한 셈이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소련의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그의 새로운 터전인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됐다. 70대 나이에 원하지 그는 또다시 타의에 의해 새로운 터전을 향해야 했다. 당시 스탈린은 해당 지역의 한인들과 일본이 연결될 것을 염려해 이런 결정을 했다. 연해주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았던 한인들은 낯선 딸에서 또다시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한때 만주 일대를 주름잡았던 홍범도 장군 역시 그 안에 포함되고 말았다.
결국, 홍범도 장군은 1943년 그토록 소망했던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에 묻혀있다. 독립영웅의 유해는 먼 타국에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노력으로 유해 봉환이 결정되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이 되는 올해 돌아왔다면 그 의미가 더해질 수 있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봉환이 미루어지고 있다. 대신 홍범도 장군에 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정말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평범한 시골에서 태어나 만주, 연해주를 넘나드는 독립운동의 여정, 이후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에서의 말년까지 그의 삶은 순탄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평범한 사람으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혼자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이름 없이 산화한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했다. 홍범도 장군 혼자만의 업적은 아니다. 이에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세밀한 연구와 함께 아직 알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고 예우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100주년이 되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와 함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재조명은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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