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85회에서는 1972년 10월 유신의 배경과 진행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다뤘다. 10월 유신은 헌법 개정을 통해 3선 개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승리한 직후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고 이는 민주주의의 급격한 후퇴를 불러왔다.
10월 유신은 매우 신속하고 예상치 못한 시점에 일어났다. 1972년 10월 17일 정부는 돌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와 동시에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국회를 해산하고 이후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개정 헌법을 국민투표에서 확정하고 헌정을 정상화한다로 요약된다. 1972년 계엄령 선포는 대통령에 의한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다.
이는 1972년 7월 남북이 밀사를 상호 교환하며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원칙을 골자로 한 7.4 남북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극한 대립에서 벗어나 상호 교류와 대화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던 시기에 나온 일이었다. 평화 분위기는 그때까지 금기시되던 통일에 대한 논의를 불러왔고 국민들에게 이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도록 했다.
이런 시기 박정희 대통령은 돌연 계엄령을 통해 헌정을 중단했고 유신헌법을 발표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직접 선거를 없애고 통일주체 국민 회의의 대의원들의 간접선거 방식으로 대통령 선거방식을 바꾸도록 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하고 중임 제한을 철폐했다. 대통령이 원하면 계속해서 출마가 가능하게 했다. 대통령의 의도대로 구성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임을 고려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의 길을 연 셈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유신헌법에서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을 규정하고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사법부에 소속된 법관들의 임명과 파면도 대통령이 할 수 있도록 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행정, 입법, 사법까지 장악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3권 분립의 민주주의 중요한 원칙도 사라지게 했다. 여기에 대통령에게 긴급 조치권을 부여해 대통령이 필요시 헌법에 보장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를 위반 시 위반한 당사자는 별도의 재판 없이 중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긴급조치권은 반독재 투쟁을 하는 이들에게 악용되어 그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초 헌법적인 유신헌법의 선포 배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계속된 집권욕이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여당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을 강행해 3번째 대통령 출마의 길을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낙승이 예상됐던 선거는 야당의 40대 젊은 정치인 김대중의 돌풍과 함께 치열한 접전으로 전개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승리하긴 했지만, 표차는 100만 표가 채 되지 않았다. 후보의 인지도 등을 고려하면 예상외의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막대한 선거운동자금을 투입했고 행정력까지 동원했다. 여기에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영남권 몰표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런 무리한 방법에서 김대중 후보는 서울을 포함한 도시지역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앞서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심상치 않은 민심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3선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다음 대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에 앞으로 집권을 위한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실제 3선 개헌 이후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새로운 개헌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집권을 위한 총통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종신 총통제를 실시하고 있는 대만과 스페인의 헌법을 연구하는 용역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자신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등 극소수의 측근들만 그 사실을 알고 공유하고 있었다. 당시 정권의 2인자 김종필조차도 유신 선표 며칠 전에 그 사실을 통보받았을 정도였다.
여기에 미국 또한 유신헌법의 추진을 모르고 있었고 발표 직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됐다. 1972년 10월 미국은 대선전이 한창이었고 이런 조치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1972년 필리핀의 독재가 마르코스 역시 국가 계엄령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는 조치를 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외의 여러 환경적 요소를 고려해 10월 유신을 전격 시행했다. 그 전략은 적중했다.
그렇게 극비리에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여 준비된 유신헌법은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 관계가 해빙기를 맞이하던 시기에 더 구체화됐다. 남북 대화 과정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유일체제가 공고하게 구축된 북학의 시스템을 보면서 그에 상응하는 유신체제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더 하게 됐다. 결국,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는 대한민국이었지만, 그런 공산주의에 맞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유신헌법의 선포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계엄령하에서 유신헌법은 각종 언론을 통해 그 당위성이 널리 홍보됐다. 당시 방송에서는 유신헌법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수많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신문도 다르지 않았다. 언론 보도가 군에 의해 철저히 검열되는 상황에서 언론사들은 유신헌법의 문제점을 대해 보도할 수 없었다. 또한, 정부에 비판적인 야당 인사들 상당수도 모진 탄압과 고문을 받으며 유신헌법 찬성을 강요받았다. 대국민 홍보와 함께 힘으로 반대 여론을 잠재우는 상황에서 유신헌법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될 수 없었다.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 찬성으로 확정되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12월 27일 반포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종신집권이 가능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에 의한 독재가 공식화되었다. 같은 시기 북한 역시 김일성 유일체제를 기반으로 한 헌법을 재정하며 1인 독재체제가 공고히 했다. 7.4 남북 공동성명을 통해 평화통일에 큰 공감대를 형성했던 남북의 정상은 남북평화 무드를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더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목적이 달성된 이후 남북 관계를 다시 긴장상태로 회기 했다.
유신 체제는 결코 나와서는 안되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4.19 혁명을 통해 부패한 독재권력을 무너뜨렸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전통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이후 수차례 긴급조치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적 요구와 노력은 권력에 의해 짓밟혔다. 혹자는 유신체제가 남북이 대립하는 시점에 북한에 맞서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유신체제에서 대한민국은 중화학 산업이 발전하면서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다 고도화되는 성과도 있었다. 이에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 하기도 한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선포 당시 중요한 명분이기도 했다.
이런 유신체제는 지속적으로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고 박정희 정권을 몰락에 결정적 사건이었던 1979년 부마항쟁을 불러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해 선포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는 그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서거하면서 막을 내렸다. 비정상적인 유신체제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과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10월 유신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민주주의의 기본 크게 가치를 훼손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무시하는 일이었고 국민들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는 점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유신체제하에서 수차례 인혁당 사건 등 간첩단 사건이 조작되고 민주주의, 반독재 운동을 하는 세력들을 좌익 불순분자로 몰아 탄압하고 그들의 생명까지 빼앗았다. 반공을 명분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힘으로 누르는 등 국가권력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 당연히 무고한 희생이 뒤따랐다.
여기에 국가 주도의 산업화는 소수의 재벌기업과 권력자 등에게만 큰 혜택이 주어지면서 부의 불균형이 심화됐다. 유신체제하에서는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았지만, 저임금과 엄청난 노동시간을 감수하며 근로기준법이 있음에도 법에 규정된 권리와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다수의 근로자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나라의 발전과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위한 유신헌법이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10월 유신은 우리 현대사에서 큰 아픔이었고 어떠한 이유에서도 미화되어서는 안되고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권력에 의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가치라 할 수 있다.
10월 유신에 대해 살피면서 대한민국 헌법 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서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문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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