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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헌법을 기초로 한 유신시대는 1979년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이 시기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 입법, 사법을 모두 장악하는 절대 권력을 가졌고 사실상의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이런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은 유신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절대 권력을 바탕으로 이를 힘으로 탄압하고 억압했다. 이는 9차례에 거쳐 발효된 대통령의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 권한으로 대표됐다. 역사저널 그날 286회에서는 1975년 발효된 긴급조치 9호를 중심으로 유신시대의 모습들을 살펴봤다. 

1975년 5월 발효된 긴급조치 9회는 유신 체제에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처벌하도록 했다. 긴급조치에 근거한 처벌은 사법심사의 대상도 아니었다. 가령, 정부를 비판하거나 불만을 말하는 일반인도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었고 그런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정부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활동 자체가 죄가 되고 처벌을 받는 시대였다.

 

이는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국민들의 기본권을 통제했고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난 등은 유언비어 유포로 처벌을 받았다. 과거 긴급조치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야권 정치세력을 타깃으로 삼았다면 긴급조치 9호는 정부에 비판적인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 당연히 사회적 분위기는 냉각됐고 정치적 발언은 누구와도 할 수 없었다. 이를 통해 반유신 운동을 원천봉쇄하려 했다. 

 

 



하지만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더 강하게 일어났다. 1975년 서울대생 김상진의 할복자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김상진은 서울대 교정에서 있었던 유신반대 집회에서 연사로 나서 연설문을 낭독한 이후 할복을 시도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생명을 잃었다. 이는 반유신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축소하고 언론의 보도를 통제했다. 그리고 반유신 운동의 확산되는 사항을 경계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는 계기가 됐다. 

긴급조치 9회는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만 통제를 가한 것이 아니었다. 국민들의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970년대 당시는 경제가 발전하고 서구의 문화가 급속히 우리나라로 유입되는 시기였다. 기존의 경직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히피 운동 등 자유주의적 사상도 함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유신 체제는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었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반정부적 사고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유주의적 사고의 확산은 박정희 정부에는 정권 유지에 큰 위험요인이었다. 유신 체제는 국가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용인했다. 국가의 가치가 우선됐고 그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국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종의 병영국가를 지향했다. 마치 일제시대 군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국가 시스템이었다. 1980년대까지 있었던 저녁시간 국기 하강식에서 온 국민이 가던 길을 멈추고 경의를 표하게 하거나 1968년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을 온 국민이 숙지토록 하는 등의 조치는 유신 체제 속 국민들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 새로운 문화 흐름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생활도 함께 억압받았다. 1970년대 청년층을 중심으로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고 퍼져가고 있었다. 청년들의 문화는 당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와 남성들의 장발과 여성들의 짧은 미니스커트 역시 당시 사회적 큰 유행이었다. 

당연히 정권에서는 이런 사회, 문화적 흐름이 좋게 보였을 리가 없었다. 이에 유신정권은 경범죄 처벌 법을 제정하고 이에 대한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경범죄 처벌 법은 기초질서 위반에 대한 처벌을 명분으로 했지만, 그 저항하는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포함했다. 

남성들은 귀를 덥거나 하는 등의 장발과 파머 스타일의 헤어가 단속됐고 여성들의 스커트는 무릎 위 17센트 미터를 기준으로 그 길이가 단속됐다. 이를 위해 각 경찰서에서는 두발과 복장의 단속이 중요한 업무가 될 정도였다. 장발 단속 등의 문제는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도 언급될 정도였다. 이에 더해 당시 정권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디스코와 비슷한 고고춤까지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단편적인 예라 할 수도 있지만, 당시는 개인의 취향과 개성마저 국가의 기준에 의해 통제되는 시대였다. 그 명분은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건장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유신 체제에 부정적이었던 청년층을 통해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 확신을 방지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유신정권은 청년들의 문화가 반사회적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런 억압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국민들의 반발도 함께 커졌다. 

긴급조치 9호로 파생된 사회, 문화적 통제는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다수의 대중가요에 대한 금지곡 지정이 그것이었다. 1975년에는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대중가요 222곡이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 사유는 창법이 저속하거나, 불신 풍조 조장, 퇴폐적 가사 등 다양했다. 평가의 기준은 분명하지 않았고 정권의 시각에 따라 정해졌다. 

아침이슬과 같은 노래는 대학가 반유신 집회 등에서 자주 불리면서 금지곡이 됐고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신중현, 송창식, 김추자, 이미자의 노래도 다수가 불신 풍조 조장, 창법 저속, 왜색이 강하다는 이유 등으로 방송 등에서 불릴 수 없었다. 그중에서 왜색이 강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청와대 행사에도 불리는 웃지못 할 상황도 발생했다. 즉, 당시 금지곡의 대다수는 정권을 풍자하거나 하는데 활용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그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이와 함께 1975년에는 가요계를 강타한 대마초 사건이 큰 이슈가 되면서 다수의 대중가수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 일도 생겼다. 마약 사건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국적 대중문화가 자리를 잡는 시점에 대마초 사건은 터졌고 대중가수 들 상당수가 활동이 정지됐다. 하지만 그 시점이나 전체 마약사범 중 연예인이 비중이 극히 적었다는 점, 대부분이 경미한 처벌에 그쳤다는 점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렇게 유신시대는 정치적 암흑기이기도 했지만, 변화하는 사회, 문화적 흐름을 거스르는 또 다른 암흑기이기도 했다. 대통령이 명령이 사실상 법이 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시기에 정권에 반하는 사회, 문화적 흐름 역시 정권의 기준에 의해 통제될 수밖에 없었다. 언론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국민들의 생활 전반이 정권의 기존에 따라 통제되고 이에 반하면 탄압받는 것이 일상인 시대였다. 

반공과 경제발전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엄청난 경제적, 문화적 파급효과를 불러온 최근 BTS의 예를 보듯 문화가 곧 국력이 될 수 있음에도 당시 정권은 체제 유지의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봤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개인의 자유를 정권의 필요에 의해 억압하고 비판을 억압했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할 일이었다. 유신시대는 경제발전이라는 화려함에 소중한 것이 가려진 어둠의 시대였다. 그런 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유신시대를 지나 우리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시 시대상을 웃으면서 살필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 유신시대는 그런 어둠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현대사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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