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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로 그 의미가 상당하다. 그 이전 통일신라 시대가 있었지만,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이 지도층에 있었던 발해의 존재는 통일 신라시대를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로 구분하게 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민족 통일은 완전하지 않았다. 이후 통일신라가 긴 세월이 흐른 후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다시 갈라지는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도 이를 설명해 준다. 

다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한 고려는 이후 거란에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까지 포함하여 민족 통합을 이뤘다. 이후 고려는 지방호족세력들의 힘을 억제하고 그 과정에서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했다. 거란과 여진의 침입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를 이겨내고 나라의 더 단단히 했다. 이후 고려는 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했고 고려의 이름은 세계에서 대한민국을 통칭하는 코리아 이름의 기원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만큼 고려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나라였다. 

하지만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와 평화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는 장기간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금나라는 당시 송나라를 밀어내고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했다. 금나라에 밀려 송나라는 북쪽 지역을 내주고 중국 대륙 남쪽에 자리한 남송으로 축소됐다. 고려는 금나라와 송나라와 함께 교류하며 평화를 유지했다. 이런 평화는 나라에는 좋은 일이었지만, 고려의 문벌 귀족 체제를 강화했다. 

고려의 중심 세력이 된 문벌 귀족들은 나라의 정치, 경제를 장악한 집권층이 됐다. 이들은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그 힘이 왕에 버금갈 정도였다. 문제는 고려의 지배층이 된 문벌 귀족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취해 있었다는 점이다. 문벌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극에 달했고 그에 비례해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시기 일반 백성들의 삶도 더 윤택해져야 했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폐쇄적인 문벌 귀족 사회의 문제는 점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이는 1170년 대규모 무신정변에서 시작해 100년 동안 이어진 무신정권 시대로 이어졌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선일 넘는 녀석들 60회에서는 무신정권 시대를 다뤘다. 이 기간 고려는 이전까지 권력의 변방에 있었던 무신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권력의 중심을 이루는 세력의 교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고. 파행적인 국정운영은 나라는 더 기울게 했다. 

무신정권 기간 수십 년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온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이 무신정권 기간 백성들은 안으로는 정권의 극심한 수탈에 시달려야 했고 밖으로서는 당시 세계 최강국 몽골의 침략에 고통받아야 했다. 그전 문벌 귀족 시대를 포함해 100년을 훌쩍 넘는 기간 백성들의 삶은 비참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신정권기는 그래서 고려 시대 최고의 암흑기라 할 수 있었다. 

무신정권 시대를 연 무신의 난은 무신들에 대한 오래된 차별이 큰 원인이었다. 고려 시대 문신에 비해 무신의 대우는 크게 낮았다. 무신들이 역할일 큰 전쟁에서도 최고 지휘관은 문신들이었다. 무신들은 대부분 학문과는 거리가 있었고 지적 소양이 극히 부족했다. 문벌 귀족 사회를 바탕을 이루는 문신들은 앞선 지식과 그들만의 결속력으로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무신들을 천대했다. 여기에 무신 정변이 발생할 당시 고려 왕 의종은 사치와 향락이 극심했고 국정에 관심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무신들을 자극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무신들의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정중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최고 지도자마저 문신들에 무시를 당하는 상황은 무신들을 더 분노하게 했다. 가뜩이나 문신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처우에 불만이 가득했던 무신들은 때를 보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고려 왕 의종은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결국, 1170년 왕이 참석한 연회장에서 무신들은 대규모 정변을 일으켰고 문신들을 대거 살해했다. 누적된 무신들을 불만은 문신들에게 무차별 숙청과 살육으로 이어졌다. 이에 문벌 귀족사회는 일 거에 붕괴됐다. 고려 지배층의 주축을 이루던 문신들의 기반도 무너졌다. 고려 왕 의종도 강제 퇴위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는 고려사 회의 시스템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이후 고려 왕은 무신들에 대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나라 운영도 무신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제는 무신들은 나라는 운영할 능력과 소양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의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도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운영 청사진이 없었고 국정을 운영할 관리들을 모두 숙청했다. 또한, 정권을 잡은 무신들 간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나라의 혼란은 더 극심해졌다. 무신정권의 지도자는 피의 대결 속에 계속 바뀌었다. 애초 정변의 주축을 이루던 동지였던 이의방과 이고가 무신정권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이들은 반복했고 이의방은 이고를 제거하고 1인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절대 권력을 차지한 이의방은 이후 자신의 권력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이용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폭정을 자행했다. 그의 폭정은 사회 곳곳의 불만을 불러왔고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폐위된 왕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한 김보당이 난이 대표적이었다. 이의방은 이를 진압하긴 했지만, 다시 문신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했고 불교에까지 숙청의 칼날이 더해졌다. 이에 그치지 폐위 후 귀양을 가있던 의종을 살해하기기까지 했다. 이토록 자신의 권력을 사적으로 누리고 힘으로 지키기에만 몰두했던 이의방은 그 권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이의방에 폭정에 무신들의 큰 존경을 받던 정중부가 행동에 나섰고 그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무신정변 당시 전변에 나서지 않고 젊은 장교들이 행동에 나섰을 당시 그는 정변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고 묵시적 동의만 했다. 이에 정변 이후 정중부는 권력의 중심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의방의 폭정은 무신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었던 정중부를 최고 권력으로 올라서도록 했다. 

하지만 정중부 역시 절대 권력에 취하면서 이의방처럼 타락의 길을 길었다.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악행을 자행했다. 국정 역시 난맥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역시 민심에서 멀어졌고 젊은 무신 경대승에게 제거되면서 삶을 마감했다. 

이렇게 무신정변을 일으킨 3인방이고, 이의방, 정중부는 서로에 칼을 겨누며 대립했고 서로를 죽였다. 그리고 그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들을 딛고 최고 권력자로 올라선 경대승은 이전 무신 집권자와 달랐다. 다른 국정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그는 절대 권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경대승은 항상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험을 염려했고 걱정 속에 삶을 삶았다. 경대승은 병으로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안가 병사했다. 다시 고려는 권력 공백 현상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 고려 왕이나 집권층이 파행적인 권력구조를 바로잡으면 좋았지만, 무신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 결국, 새로운 무신 지도자가 등장했고 이의민이 그 자리를 이었다. 

이의민은 천민 출신으로 무신정변 당시 하급 무사였다. 그는 의종의 잔혹하게 살해하는 등 무신 권력의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그는 엄청난 무력을 지닌 장수로 싸움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는 경대승 집권기 경주로 피신해애 했지만, 엄청난 무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모았고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의민 역시 이전 무신정권 권력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의민과 그의 아들 등 일가는 국정을 파탄에 이르게 했고 권력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활용했다.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는 그의 비참한 최후를 이끌었다. 

이의민의 폭정에 대한 원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와 대립하던 무신 세력 중 최충헌이 등장했고 이의민을 제거했다. 최충헌은 강한 무력을 가진 장수는 아니었지만, 이전 무신들과 달리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권을 잡은 직후 교정도감이라는 국가 운영 기구를 만들고 문신들을 기용하는 등 국가운영 시스템을 정비했다. 무력에만 의존하지 않는 그의 정권은 이후 최우, 최항, 최의까지 최 씨 정권이 수십 년간 이어지게 했다. 하지만 최충헌 역시 절대 권력자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권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대규모 사병을 유지하는 등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데 몰두했다. 사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건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수차례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등 사실상 왕 이상의 권력자였다. 최충헌에서 시작된 최 씨 집권기 역시 왕은 명목상의 존재였고 비정상의 일상화되는 시기인 건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리 없었다. 새로운 권력에게서 희망을 가졌던 백성들은 깊은 좌절에 빠져들었다. 이는 계속된 민란 발생으로 이어졌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일 찬탈되는 상황은 신분제 틀에 갇혀있던 백성들을 자각하게 했다.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저항을 택했다. 대부분 진압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현실 속에서 백성들의 선택지는 없었다. 

이렇게 이어진 최 씨 정권은 몽골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이했지만, 전란 중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며 항전을 계속했다. 명목상 외침에 대한 저항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권력 유지가 중요한 목적이었다. 최 씨 정권과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강화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전 국토가 몽골군의 침입으로 초토화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백성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침략자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졌다. 민생과 분리된 절대 권력은 그들만의 리그였을 뿐이었다. 

이후 최 씨 정권은 또 다른 무신 세력에 의해 붕괴됐고 무신정권은 고려가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 사실상 항복함과 동시에 붕괴됐다. 100년 만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 시기 고려는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더 퇴보했다. 원나라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후 원나라의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하며 또 다른 암흑기로 빠져들어야 했다. 부패한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으로 폭발한 무신정변이지만, 무신정권 시기 고려는 문벌 귀족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는커녕 절대 권력을 두고 긴 암투만 있었다. 

그 과정에서 권력자들은 나라와 백성이 아닌 사적 이익을 먼저 추구했고 그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몰두했다. 고려는 이후 쇠락을 길을 피하지 못했다. 고려 말기 공민왕의 개혁 시도가 있었지만, 긴 세월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게 한계가 있었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은 이미 무신정권 시기부터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무신정변 전 권력층이었던 문벌 귀족들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고려가 이런 문벌 귀족사회의 모순을 개선하고 정상적인 국가운영 시스템을 유지했다면 고려의 역사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했던 문벌 귀족사회는 무신정변의 철퇴를 맞았다. 고려의 무신정권기는 국제적 국가였던 고려에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고려는 물론이고 우리 역사에서 견제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했고 나라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했다. 절대 권력은 결코 국민의 편이 아니었다. 고려 무신정권기는 여러 교훈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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