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정권기를 다루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65회에서는 이 기간 있었던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의 과정과 삼별초의 항쟁을 되짚어 보았다.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폭발한 무신의 난 이후 고려는 100년간의 무신정권기를 맞이했다. 이 기간 고려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붕괴되고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시기 세계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몽골의 대규모 침입으로 국가적 위기가 커졌다.
당시 집권층인 무신 세력은 그들의 권력 다툼에만 몰두했고 권력 유지가 중요했다. 국가적 위기에 대한 대응도 부실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이어지는 무신집권기를 끝내고 등장한 최씨 정권은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사익을 위해 사용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최충헌에 이어 집권한 그의 아들 최우 역시 문신들을 기용하는 등 변화를 보였지만, 꼭두각시 왕을 앞세운 독재권력을 유지했다.
최우는 몽골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강화를 하는 척하면서 강화도로 도성을 옮겨 장기전에 대비했다. 육상에서는 최강의 군대였던 몽골군은 해전에 능숙하지 않았다. 강화도는 천해의 요새가 될 수 있었다. 왕과 집권층은 몽골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몽골의 계속된 침략에 전 국토는 파괴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납치되어 끌려갔다. 인적, 물적 피해가 극심했다. 최씨 정권은 이런 상황에서 최정예 부대는 자신의 친위부대로만 활용했고 몽골과의 전투에는 투입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빈약한 고려의 군사력은 더 약화됐다. 몽골군과의 전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몽골군은 수십 년간 수차례 대규모 침략을 단행했다. 몽골군은 국경을 넘어 내륙 깊숙이 고려 국토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경주 황룡사 9층 석탑 등 삼국시대부터 전해지는 상당수 문화재와 유적이 파괴됐다. 백성들의 삶의 터전도 온전할 리 없었다. 이런 외세의 침략에도 고려 집권층은 강화에서 사치와 향락으로 가득한 삶은 살았다. 지옥 같은 내륙과 달리 강화는 그들만의 천국이었다.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고려 백성들을 스스로 군인이 되어 침략자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 과정에서 승전의 기록도 남겼다.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지금의 용인에 있었던 처인성 전투에서 고려군은 몽골 군 사령관 살리타이를 척살하는 전공을 올렸다. 그 전투의 중심은 승려였던 김윤후가 있었다. 그는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지역 백성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고 그의 화살에 살리타이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더는 싸우지 못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이후 지속적으로 침략을 이어갔다. 몽골은 고려의 항복을 종용했지만, 최씨 정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전투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계속되는 대 몽골 전쟁에서 2차 전쟁의 영웅 김윤후가 5차 전쟁에 다시 등장했다. 당시 충주성을 지키는 지휘관이었던 김윤후는 남하는 몽골군에 맞서 70여 일간 성을 지키며 항전했다. 충주성에서 막힌 몽골군은 결국 철군을 했다.
김윤후는 전투 과정에서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당시 항전의 주력이었던 노비들의 문서를 불태우는 등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노력으로 몽골과의 전투를 이겨냈다. 김윤후는 2차 전쟁 당시 적장을 사살한 전공을 인정받아 상장군에 임명되었지만, 이를 사양하고 변방의 장수가 됐다. 이후 몽골군과의 계속된 전투에서 김윤후는 최전선에서 그 임무를 다했다. 충주성 전투는 백성들을 하나로 모은 그의 리더십과 용맹함이 만든 결과였다.
이렇게 장기간의 항전을 거듭한 고려였지만,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까지 휩쓸 만큼의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몽골군과의 수십 년간 전투는 큰 피해가 불가피했다. 집권층은 강화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나라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무신정권은 그들의 안위를 지키기만 했을 뿐, 나라를 돌보지 않았다. 당연히 민심은 무신정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장기간의 무신정권도 점점 균열이 발생했다.
결국, 고려는 몽골과의 강화를 택했다. 몽골과의 전쟁 기간 왕위에 있었던 고려 왕 고종은 훗날 원종이 되는 태자를 몽골에 보내 강화를 시도했다. 사실상의 항복이었다. 하지만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의 황제가 사망하면서 강화협상을 할 대상이 사라지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그 비슷한 기간 고려 왕 고종이 승하하면고 고려와 원나라에서는 함께 권력의 공백기가 발생했다. 태자였던 원종은 고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원종은 원나라의 차기 권력과 손을 잡는 선택을 했다. 원종은 원나라의 권력 다툼을 주시했고 왕위 계승의 1순위가 아니었던 쿠빌라이를 알현했다. 원종은 원나라의 정치 상황을 살피고 쿠빌라이가 미래 권력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원종의 선택은 모험이었지만, 쿠빌라이는 원나라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고려 원종의 과감한 선택은 쿠빌라이가 권력을 차지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이는 원종과 쿠빌라이가 큰 유대관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고려는 원나라에 사실상 항복을 했지만, 강화협상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일정 유지할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원종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여전히 견고한 무신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왕권을 회복한 원종은 원나라 왕실과의 혼인으로 유대관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그 결과 원종이 뒤를 이은 충렬왕부터 고려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까지 고려의 태자들은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왕실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커졌지만, 고려는 속국이었을망정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원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한 고려였지만, 여전히 이에 반발하는 무신 세력을 저항은 여전했다. 원종인 개경 환도도 지연됐다. 원종은 원나라의 힘을 빌리고 스스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무신 세력을 제거했지만, 삼별초와의 마지막 대결을 이겨내야 했다.
삼별초는 애초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다. 이들은 고려군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대몽 전쟁에서 고려의 주력부대였다. 최씨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고려 무신정권을 지탱하는 중심 부대였다. 하지만 고려와 몽골이 세운 원나라와의 강화가 성립되고 전쟁이 끝나면서 이들의 입지는 크게 줄었다. 원나라는 삼별초의 명단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그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삼별초 부대로서는 이대로 강화가 이루어진다면 그들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삼별초는 군사적 봉기를 결정했다. 그들은 강화를 벗어나 진도를 근거지로 고려군과 원나라 군대에 맞섰다. 고려 원종은 그들과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삼별초의 항전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원종은 원나라와 연합하여 삼별초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고려 최정예 군인 삼별초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해전에도 능한 삼별초는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지역까지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했고 남부 지방을 그들의 세력에 두었다. 또한, 제주를 장악해 또 다른 거점으로 삼았다. 고려 정부로서는 삼별초가 큰 위협이었다. 대몽항쟁 과정에서 생긴 백성들의 원나라에 반감과 함께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 집권층에 대한 반감이 더해지며 삼별초는 백성들의 호응도 얻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항쟁은 한계가 있었다.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은 그들의 1차 근거지 진도를 장악하고 상당수 삼별초 군은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삼별초를 이끌던 장군 배중손도 전사했다. 이에 삼별초는 김통정 장군을 중심으로 남은 세력을 제주로 이동해 항전했다. 원종은 그들을 마지막까지 회유하려 했지만, 삼별초의 의지는 꺾이지 않아다. 결국, 고려와 원나라의 대규모 연합군은 제주로 상륙을 단행했고 삼별초는 제주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1273년의 일이었다. 삼별초의 항쟁이 끝나면서 고려와 몽골, 원나라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무신정권기도 함께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후 고려는 왕권이 회복되고 국가 시스템이 복원됐지만, 원나라의 속국으로 자주성을 크게 잃었다. 여기에 원나라에 결탁한 신흥 집권층인 권문세족들은 기존 문벌 귀족과 무신 권력 이상으로 백성들을 수탈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면서 국정을 농단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려는 더 쇠락했고 백성들의 삶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이렇게 무신정권기와 함께 한 대몽 전쟁은 고려에 큰 시련의 시간이었다. 나라는 위기에 컨트론 타워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기득권 세력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만 열중했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뒷전이었다. 이런 파행적인 국가운영은 국제국가 고려의 몰락을 재촉했다.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은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이기도 했지만, 과거 무신정권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일 수도 있었다. 즉, 고려 무신정권 시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아픈 역사이기도 했고 큰 교훈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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