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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21회] 삼국지, 다시 알게된 유비의 이면과 신이 된 장군 관우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7. 2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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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의 중요한 장면인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소설 삼국지를 중심으로 소설과 실제 역사를 함께 살피며 재 조명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321회에서는 유비와 손권의 관계를 유비를 중심으로 다뤘다. 유비와 손권은 조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삼국지에서 가장 뜨거운 전투였던 적벽 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에 승리했다. 조조는 적벽대전의 패배로 중국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접어야 했다. 

적벽대전의 무대였던 형주는 코로나19가 시작된 우한이 있는 후베이성 지역으로 중국에서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다. 형주 지역은 중국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이 지역을 차지한다는 건 천하삼분지계를 통해 삼국이 형성된 시점에서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과거 우리 역사의 치열했던 대결의 시기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당시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적벽대전 이후 형주는 조조, 유비, 오나라 손권이 나눠서 점령하는 모습이었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조는 후퇴하면서 형주의 북쪽 지역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유비는 형주의 서쪽 지역을 장악하며 긴 유랑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적벽대전 승리에 있어 가장 큰 지분이 있는 오나라의 손권은 형주의 요충지를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하지만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 손권의 셈법은 차이가 있었다. 유비는 형주 지역 전체를 장악해 건국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손권은 유비의 세력을 지원해 조조의 위협에 맞서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유비의 세력이 그들의 위협할 정도로 커지는 데에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런 속마음에도 유비와 손권은 공동의 적인 조조에 대항해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손권이 더 적극적이었다. 손권은 조조와의 전쟁 중에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을 모드 잃은 유비와 자신의 여동생의 혼인을 추진했다. 겉으로는 결혼으로 동맹을 더 돈독히 하려는 목적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유비를 자신의 영역 안에 묶어 두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손권은 형주의 요충지를 유비에게 임차하며 유비가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손권은 혼자의 힘으로 조조에 대응하기 어려웠고 유비에 일종의 위탁 통치를 맡긴 셈이었다. 유비는 형주의 물적, 인적 자원을 활용해 그 세력을 더 키워나갈 수 있었다. 손권은 일련의 조치를 통해 유비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비의 생각을 달랐다. 

유비는 애초 형주를 차지한 후 서쪽의 익주를 병합해 나라를 세우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의 책사 제갈량의 기획이기도 했다. 유비는 손권에 형주를 빌리긴 했지만, 되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유비는 익주 지역을 함께 공략하자는 손권의 뜻을 거스르고 독자적으로 익주 공략에 나섰고 그 지역을 차지했다. 손권의 의도와는 다른 상황 전개였다. 당연히 양측의 동맹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유비는 냉혹하면서고 교활하기까지 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손권과의 동맹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만 활용했고 익주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당시 익주를 지배하고 있던 유장과의 약속을 깨는 모습도 보였다. 유비의 친척이기도 한 유장은 그들의 북쪽 변방 한중 지역의 타 군벌과 조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유비에 구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그의 뜻을 받아드려 익주로 출전했다. 유비는 전투의 과정에서 유장의 군사들을 다수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유비는 전투에 집중하지 않고 군사들과 지역민들의 민심을 얻는데 주력했다. 이는 유장의 통치기반을 흔드는 일이었다. 유비의 의도를 알아챈 유장이었지만, 때는 늦었다. 유비는 비교적 손쉽게 익주를 차지했다. 이후 유비는 조조군과 한중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대결했다. 이 지역은 한나라의 시조 유방이 그 세력을 일으켰던 곳으로 유비가 이 지역을 차지하는 건 한나라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명분을 강화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야 하는 조조는 이 지역 공략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전세는 점점 유비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결국, 조조는 큰 소득 없이 한중 지역에서 물러났다. 실제 한중 지역은 조조에게는 큰 이익을 주는 지역도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고사인 계륵이라는 말이 유래됐다. 조조는 큰 실익이 없는 전쟁을 지속하는 게 난감했고 유비의 세력 확장을 지켜보는 것도 유쾌하지 하지 않았다. 조조는 전쟁 지속을 묻는 부하들에게 계륵이라는 말을 했다. 닭의 갈비 부위를 칭하는 계륵은 먹기에는 양이 너무 부족하고 갈비라는 점에서 버리기도 아까운 부위다. 즉, 계륵은 무엇을 취해도 이익은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사진 픽사베이



이렇게 조조와의 대결에서도 승리한 유비는 촉한을 건국하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 삼국지 초반 가지고 있는 세력이 미약하여 군벌들의 용병 장수로 살아가며 그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 했던 유비로서는 긴 기다림 끝에 큰 성과를 이룬 셈이었다. 유비는 촉한의 건국 과정에서 인덕과 의리를 갖춘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냉혹한 승부사의 면모도 함께 보여주었다. 유비는 신변의 위험이 있음에도 손권 진영에서 그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며 상당 기간을 지내기도 했고 동맹과 신의를 저버리는 일도 했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대결이 이어지는 혼란기에 유비는 결코 유약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렇게 촉한을 건국한 유비였지만, 손권과의 관계를 크게 악화됐다. 유비는 손권의 형주 반환 요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거부했다. 그 사이 형주 지역의 책임지고 있던 관우는 조조군을 압박하며 촉한의 세력은 더 확돼 됐다. 관우의 조조 공략은 조조에 큰 위협이었다. 조조는 한 때 수도 이전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의 책사 사마의가 나섰다. 그는 관우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오나라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그는 오나라에 형주 지역을 차지할 비책을 제안했고 오나라는 이에 공감했다. 오나라와 조조의 비밀동맹으로 관우는 고립상태에 빠졌다. 

관우는 촉한과 오나라의 동맹이 사실상 파탄 난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못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조조군과의 전투에 집중한 나머지 오나라의 후방 공략을 대비하지 못했다. 그의 방심은 큰 화를 불러왔다. 관우는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오나라와의 전투에 패하며 사로잡혔고 참수됐다. 관우의 죽음과 함께 형주 지역은 다시 오나라의 차지가 됐다. 유비,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촉한 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장군의 허망한 최후였다. 그의 수급은 조조에게 보내졌다.

조조는 관우에게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며 그를 추모했다. 조조는 한때 관우를 자신의 부하로 삼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고 그때의 인연으로 적벽대전 당시 관우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애증이 뒤섞인 조조와 관우와 관계였다. 조조 역시 관우의 용맹함과 의리, 인품을 인정하고 있었다. 관우의 장례를 치른 이후 조조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고 얼마 안가 그 생을 마무리했다. 그의 자리는 아들 조비로 계승됐고 조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에게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위나라의 시작이었다.  

관우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지만, 사후 관우는 중국에서 충의의 상징으로 숭상됐고 신으로 추앙됐다. 관우는 민간 신앙에서 복과 재물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자리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관우신은 우리나라에도 그 사당이 있다. 종로구 동묘는 관우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의 건의로 세워진 이 사당은 관우신이 우리 민간 신앙 속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됐다. 유교가 국가 통치의 중요한 이념이 된 중국과 조선에서 충의의 상징인 관우는 유교 사상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사진 픽사베이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서 큰 충격이었다. 유비는 오나라 손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침공했다. 이에 제갈량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반대했다. 조조의 위협이 여전히 강하고 오나라 역시 유비에 화친을 제의한 상황이었다. 오나라와의 전면적인 실익이 없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냉철함을 잃었다. 유비는 자신의 선봉에 나서 전쟁에 나섰다. 촉한의 역량을 모두 집중한 전쟁이었다. 이릉대전의 시작이었다. 개전 초기 유비는 연전연승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전략 실패와 오나라의 반격에 고전했다. 유비는 전선을 지나치게 길게 형성하며 반격의 빌미는 제공했다. 오나라는 화공으로 유비 진영에 혼란을 주고 기습전을 전개했다. 유비군은 크게 패했다. 궤멸적 수준의 패배였다. 유비는 겨우 몸을 피해 오나라의 국경에 있는 백제성으로 후퇴했다.

이릉대전의 패배로 촉한은 형주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중요한 요충지를 잃으면서 촉한은 세력 확장에 제한이 생기고 말았다. 또한, 관우에 이어 장비마저 이릉 대전의 준비 과정에서 부하들에 목숨을 잃었다. 형제를 모두 잃은 유비는 이릉대전 패전의 아픔까지 더하며 큰 상실감에 빠졌고 백제성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삼국지 초반과 중반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더 유비와 관우, 장비, 그들의 큰 적이었던 조조까지 삼국지에서 퇴장하게 됐다. 이들은 모두 중국을 통일하려는 희망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세대 인물들이 사라지면서 삼국지의 이야기는 후반부로 향하게 됐다. 

방송을 통해 유비에 대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이 일부 사라졌고 관우의 특별한 존재감도 알 수 있었다. 이릉대전의 결과에서는 지도자의 판단이 나라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 때 유비가 보다 냉정하고 국익에 우선한 판단을 했다면 삼국지의 전개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유비는 관우의 형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그의 실수로 강성하던 촉한은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유비, 관우, 장비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안타까운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한편으로는 여러 상황 변화에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기회를 잡아 형주 지역을 차지한 손권의 승부사 면모도 다시 살필 수 있었다. 삼국지는 인생의 희로애락과 경영의 측면까지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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