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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20회] 삼국지의 하이라이트 적벽대전과 천하삼분지계 실현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7. 1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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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여름 특집으로 중국의 고전 삼국지와 그와 관련한 중국사를 살피고 있다. 조조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 초반부에 이어 320회에서는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도래하게 하는 결정적 사건인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당시 시대상을 되짚었다. 

중국 후한 말기 왕권의 약화됐고 각 지방의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혼란이 시기가 찾아왔다. 중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역은 황화 유역의 화북지역을 놓고 조조와 원소가 대결을 펼쳤다. 삼국지의 첫 번째 대전인 관도대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조조는 원소에 승리하며 화북지역을 장악했다. 후한 왕조는 존속했지만, 그들의 실권이 없었다. 조조가 대승상의 자리에 올라 권력의 일인자가 됐다. 그와 함께 조조는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조조는 그와 맞설 세력을 하나하나 흡수하며 세력을 더 키워났다.

조조의 경쟁자는 강남지역을 장악한 오나라의 손권과 형주 지역의 유비 정도였다. 하지만 유비는 조조와의 대결에서 연전연패하며 그 세력이 크게 꺾인 상황이었다. 유비는 형주 지금의 중국 후베이성 지역에서 그 지역의 지배자 유표에 의탁해 재기를 모색했다. 조조는 유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마침 형주의 군벌 유표가 사망하면서 조조군의 형주 침공에 형주의 군벌과 유력 가문들은 상당수 투항했다.

유비는 다시 조조군에 쫓기는 처지가 됐다. 유비는 후한 황실의 일족이었지만, 몰락한 왕족으로 평민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후한 말기 혼란한 시국에 거병을 하긴 했지만, 그 세력을 미미했다. 대신 유비에게는 관우, 장비라는 용맹한 장수가 있었다. 이들은 소설에서 도원결의를 통해 형제의 연을 맺고 함께 했지만, 그들과 함께 할 군사나 백성들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권력자의 용병으로 전쟁터를 누빌 수밖에 없었다. 

일정 세력을 확보한 후 조조에 맞섰지만, 중과부족이었다. 조조군의 형주 침공으로 유비는 더 큰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 시점에 유비는 삼국지의 중요한 인물인 제갈량이라는 유능한 책사를 자기편으로 만들며 반전 가능성을 열었다. 제갈량은 명석한 두뇌에 수려한 외모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는 형주 지역 유력 가문과 연결된 인물로 지역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의 영입은 유비에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당면한 조조군의 위협에 대항하는 일이었다. 후퇴가 불가피했다. 유비군은 추격해오는 조조군을 뿌리쳐야 했지만, 후퇴 속도를 올릴 수 없었다. 유비를 따르는 10만여 명의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수의 부하들이 유비에서 백성들과의 동행을 만류했지만, 유비는 백성과 함께 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유비의 성품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유비는 삼국지에서 인과 의리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미약한  세력에도 주변에 장수들과 책사들을 모을 수 있었던 그의 이런 성품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비가 제갈량과 함께 하기 위해 3번이나 찾아가 그를 만났다는 삼고초려의 일화도 유비의 성품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제갈량은 이런 유비의 정성에 그와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갈량은 중국 서주 출신으로 그 지역은 조조가 그 지역을 정벌했을 당시 다수의 학살이 일어났다. 그 지역민들은 조조에 큰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도 다르지 않았다. 또한, 제갈량은 큰 뜻을 가진 인물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배경이 필요했다. 이미 큰 세력을 형성한 조조와 손권의 곁에는 많은 인물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유비는 한나라 왕조의 부활이라는 나름의 명분도 있었다. 

이렇게 제갈량과 함께 하게 된 유비였지만, 당면한 조조군과의 전쟁은 크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백성들을 지키면서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었다. 유비군은 어려움에 직면했고 유비 역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장비와 조자룡이다. 장비는 장판교에서 조조의 군대와 홀러 맞서며 그들의 추격을 저지했다. 소설에서 장비가 장판교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에 홀로 맞섰다고 했지만, 상상이 더해진 이야기다. 과장이 있었지만, 장비의 활약이 컸던 건 분명해 보인다. 

또 한 명의 장수 조자룡은 적진에 고립된 유비의 부인과 갓난 아기를 단신으로 구해 나온 영웅담이 있다. 그의 부인은 끝내 생환하지 못했지만, 훗날 유비에 이어 촉나라의 왕위에 오른 아들 유선은 유비와 재회할 수 있었다. 유비는 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보다는 유능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는 자책에 야기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소설에 전해진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확실한 건 위기의 순간 유비를 지키는 장수들이 큰 역할을 하며 유비가 위기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형주 지역을 장악한 조조의 위협은 진행형이었다. 유비의 책사 제갈량은 오나라로 건너가 조조에 맞설 동맹을 제안했다. 오나라의 내부는 조조의 위세에 눌려 항복을 주장하는 의견이 많았다. 손권은 의견이 달랐다. 그는 조조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소설에서는 제갈량의 뛰어는 언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나오지만, 그 결정의 이면에는 노숙이라는 오나라의 책사가 있었다.

그는 오나라만의 힘으로 조조에 맞서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제3세력을 더해 세력의 균형추를 맞추는 전략을 구상했다. 일명 천하삼분지계 구상이었다. 그는 유비의 세력을 후원해 조조와 맞서는 게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에서는 제갈량의 큰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천하삼분지계는 당시 전략가들에게는 상당 부분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고대사의 삼국시대와 같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상호 견제와 협력을 통해 균형을 이루면서 함께 존속한 것과 유사한 지형도라 할 수 있다.

노숙은 조조와의 대결에 있어 유비 세력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손권에서 동맹을 하도록 조언했다. 손권은 자신의 세운 나라의 수성을 선택했다. 이는 조조와의 전쟁이었다. 이렇게 유비와 손권의 동맹이 체결됐다. 손권은 당대의 명장 주유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주유는 한나라 시대부터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그 힘이 막강했다. 지역의 토착 세력을 이끌고 있는 주유라면 전쟁에 수행에  필요한 힘을 결집하는데 유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사실상 조조와의 전쟁에 있어 손권, 유비 연합군의 총사령관의 역할을 했다.

오나라의 전쟁 결심으로 적벽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조조는 유비, 손권의 연합군보다 무력에서 큰 우위에 있었다. 소설에서는 80만 대군이라 했지만, 20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비 손권의 연합군은 3만에서 5만 정도였다. 큰 차이였지만, 조조군에는 큰 약점이 있었다. 

적벽대전의 주 싸움터는 지금의 양쯔강, 장강이었다. 수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화북지역을 기반으로 한 조조군의 수전의 경험이 부족했다. 급히 형주 지역의 군사들을 편입해 수군을 구성했지만, 결속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먼 거리를 원정 온 조조군은 지역의 기후와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다. 풍토병으로 인한 집단 감염으로 전력에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긴 원정에 따른 피로고 겹쳐 있었다. 애초 형주 지역의 점령을 목표로 한 원정인 탓에 오나라 공격에 대한 준비도 부족했다. 조조는 오나라에 위협을 가하면 항복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나라는 강경하게 맞섰고 유비가 가세했다. 

조조의 수군은 오나라 수군에 고전했다. 수적 우세가 전쟁의 우세로 연결되지 않았다. 유비, 손권 연합군은 조조군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적벽 대전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화공을 전개했다. 전쟁 당시 계절은 겨울로 북서풍이 부는 상황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조조군이 유리한 바람으로 남쪽에서 화공을 전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유비, 손권 연합군이 화공을 전개하는 시점에 남동풍이 불었다. 소설에서는 제갈량이 도술을 부려 바람의 방향을 바꿨다고 했지만, 실상은 해당 지역의 기압배치 변화로 남동풍이 부는 시기에 화공을 전개했다.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유비, 손권의 연합군은 기후적 특성에 맞는 전략을 구사한 셈이었다. 

 

중국의 성곽 이미지 



상대의 화공에 대응하지 못한 조조의 수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육지에 주둔한 육군에도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일설에는 제갈량과 쌍벽을 이루는 책사 방통이 조조에 수군의 배틀을 쇠사슬로 연결하도록 조언했고 그 조언에 따른 조조가 화공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역사서에는 그 내용이 없다. 그 이면의 이야기를 떠나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조조와의 전쟁에서 가지고 역량과 여러 조건들을 활용해 승리할 수 있었다.

결국, 형주에 이어 강남지역까지 포함해 중구 남부까지 모두 장악하려 했던 조조의 꿈을 물거품이 됐다. 조조는 평소와 달리 이 전쟁에 있어 특유의 냉정함을 잃고 자만하는 모습이었다. 계속된 승리에 취했던 조조는 쓰라린 패배를 당했고 중국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그 패배의 규모는 형주 지역에 국한됐고 삼국 중 가장 강한 세력은 유지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나오는 궤멸적 패배는 아니었다. 

조조군이 후퇴하면서 생긴 형주 지역의 힘의 공백을 유비가 메우면서 유비는 마침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형주는 중국의 중심부에 있어 사통팔달의 지역적 특성이 있었고 중국 남북을 연결하는 위치였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을 차지한 유비는 이를 바탕으로 서쪽의 익주, 지금의 쓰찬 지역을 장악하며 촉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다. 유비와 손을 잡았던 오나라 역시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유비의 나라가 건국되면서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가 함께 공존하는 중국의 삼국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다.

적벽대전은 그 점에서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극적인 요소가 곳곳에 숨어있어 훗날 많은 이야기들이 그 속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우리 전통 판소리 중에 적벽가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그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래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절대 강자 조조에 맞서 약자 유비와 전쟁과 항복 사이에서 갈등하던 손권의 연합, 제갈량의 지략과 주유라는 명장의 조합 속에 조조의 몰락까지 이야기는 흥미 요소가 가득했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적벽 대전에 대해 길거 상세하게 적고 있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유비가 계속된 고난을 이겨내고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었다. 천하삼분지계의 한 축으로 유비는 적벽대전을 통해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약자였던 유비의 성장 과정이 담긴 탓에 적벽대전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더 매료시키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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