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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17회] 백제, 신라의 엇갈린 운명 상징하는 인물, 의자왕과 김춘추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6. 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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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쟁하던 고대 삼국시대를 재 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17회에서는 642년 대야성 전투를 중심으로 삼국시대 후반기 백제와 신라의 핏빛으로 물든 대결사와 삼국과 국제 관계까지를 살폈다. 그중에서 신라 태종무열왕이 된 삼국시대 역사의 중심인물 김춘추와 백제 마지막 왕인 비운의 왕 의자왕과의 관계 역시 여러 시각에서 다뤘다. 

삼국시대 역사에서 642년은 중요한 분기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해에는 고구려에서 정변이 발생해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권력자로 새롭게 등장했다. 그의 등장은 그가 살해한 고구려 영류왕의 대당 온건노선이 강경노선으로 바뀜과 동시에 삼국의 역학 관계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는 한편 백제의 개로왕을 참살했다. 고구려에 나라의 기반인 한강유역을 잃은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해 어렵게 나라의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최 전성기 고구려의 남하 속에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결성하고 함께 고구려와 맞서 힘겹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강성했던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지도층의 내분과 함께 오랜 분열기를 끝낸 중국 통일 왕조와 직접 맞서게 됐다. 이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 전선에 힘을 집중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나제 동맹에 큰 기회였다. 마침 백제에는 나라 중흥을 이끈 성왕이 있었고 신라에는 신라의 전성기를 연 진흥왕이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나제 동맹군은 한강유역의 고구려를 밀어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맹도 없는 국제 정세의 냉정한 흐름 속에서 신라는 나제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 유역을 독자적으로 점령했다. 신라는 한강유역 점령으로 삼국시대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백제 성왕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고 백제는 다시 한번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다. 백제는 긴 내부 혼란기를 거쳐 무왕 때 이르러 비로소 나라를 정비하고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백제의 칼날이 향한 곳은 신라였다. 신라는 그들이 추앙하는 성왕을 전사시키고 그의 잘린 머리를 신라의 궁궐 계단 밑에 묻어 큰 굴욕을 안긴 원수의 나라였다. 신라에 대한 복수는 백제의 큰 목표였다. 무왕 때 왕권을 강화한 백제는 국가적 역량을 모아 신라를 공격했다.  

그런 무왕의 뒤를 이어 614년 백제의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 때의 대 신라 강경노선을 강화하는 한 편 군사적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의자왕의 백제는 신라의 성 40여 개를 빼앗고 신라 영토를 잠식했다. 결정적으로 642년 백제는 신라의 중요한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했다. 지금의 합천 지역에 자리한 대야성은 낙동강 일원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신라의 수도 경주와도 거리가 멀지 않았다. 백제는 이 대야성을 장악하면서 과거 금관가야의 지역을 그들의 영역으로 편입하는 한편 신라는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 왜와 연합해 신라를 함께 압박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충돌 과정에서 서로의 왕을 죽이는 등 원한이 쌓여있는 관계였지만, 신라의 팽창에 맞서 연합했다. 의자왕 때에 이르러서 백제는 신라의 대중국 교역로인 지금의 경기도 화성에 자리한 당항성을 고구려와 함께 공략하는 등 신라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 강화했다. 백제와 고구려 백제에 우호적인 정권이 지배하는 왜의 침략까지 감당해야 하는 신라는 나라의 존립마저 위태로웠다. 반대로 백제 의자왕은 신라와의 전쟁 성과를 바탕으로 귀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었다. 

신로서는 수도 경주 방어의 중요한 거점인 대야성을 상실은 큰 충격이었다. 대야성은 당시 신라 권력의 중심인물 김춘추의 사위가 성주로 있었다. 그만큼 신라에게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그 지역의 책임자가 김춘추의 사위였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야성이 함락되고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그의 딸 고타소가 참살됐다. 문제는 패전의 결정적 원인이 김품석의 실정으로 인해 내부 분열을 일으킨데 있다는 점이었다. 

당장 자신의 사위와 딸을 잃은 김춘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도 상당했지만, 정치적 입지에도 영향을 주는 일이었다. 김춘추는 자신의 가족을 참살한 의자왕과 백제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을 더 불태웠다. 당시 신라는 선덕여왕의 치세로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선덕여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중심 세력이었다. 김춘추는 몰락한 왕족이었었고 권력에서 소외된 비주류 세력이었다. 또한 그는 왕권과 거리가 있는 진골 출신이었다. 진골 내에서도 큰 견제를 받았다.

김유신은 가야 왕족이 그 조상으로 역시 비주류 세력이었다. 하지만 신라의 대외 팽창 과정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큰 전공을 세우면서 김유신의 집안은 귀족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김유신은 이런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권력의 중심으로 나설 수 있었다. 다만, 가야 출신이라는 점은 더 높은 자리로 가는 데 있어 제한 사항이었다. 이 시점에 왕족인 김춘추와의 만남은 정치와 무력이 만나는 일로 그 연합은 신라 어느 정치세력보다 강한 힘을 만들어주었다. 이를 위해 김유신은 자신의 동생을 김춘추의 아내로 보내면서 그 유대를 더 공고히 했다. 

이런 김춘추, 김유신 연합에 대야성 함락은 그들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었다. 이에 김춘추는 고립상태의 대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주변 나라와 적극적인 외교전을 전개했다. 김유신은 고구려, 백제의 공세에 맞서며 김춘추의 대외 활동을 지원했다. 김춘추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 왜와의 관계 회복을 모색했다. 군사 정변으로 고구려의 권력자로 떠오른 연개소문과의 회담했다.

김춘추는 중국 통일 왕조와 맞서야 하는 고구려가 남쪽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그들과 연합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는 한강 유역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 무리한 조건을 내세웠다. 이는 신라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연개소문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아직 권력기반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연개소문으로서는 대외 강경책으로 내부의 시선을 분산할 필요가 있었다.

 

백제의 흔적 남은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연합으로 그들을 항시 위협하는 백제를 멸망시킬 계획이었지만, 연개소문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두 인물의 협상은 결렬됐다. 김춘추는 한때 억류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김유신의 군대가 고구려 변방을 압박하는 상황 속에 영토 반환과 관련한 거짓 약속을 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역사서에서 김춘추의 거짓말을 토끼와 거북이 설화 속 토끼의 지혜를 발휘한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신라와의 전면전까지는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에 위해를 가한다면 외교적 지탄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당장은 당나라와의 전쟁이 시급했다. 연개소문은 신라에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개소문 신라와의 연합을 택했다면 삼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고구려와의 협상이 실패한 김춘추는 왜와의 외교전에도 나섰다. 왜는 오랜 세월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이었지만, 당시 친 백제 정권이 몰락하는 일이 있었다. 김춘추는 그 틈을 노렸지만, 바뀐 정권 역시 백제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왜와의 외교협상도 큰 성과는 없었다. 일련의 활동을 통해 고구려와 왜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했지만, 신라의 노력을 대외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고 현상 유지를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제의 압박을 지속 중이었고 고구려 역시 신라에 대한 공세를 유지 중이었다. 현상 유지 이상의 변화가 필요한 신라였다. 

신라의 마지막 선택은 당나라였다.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동맹에 사활을 걸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와의 관련이 있었다. 신라 자체의 힘만으로는 고구려, 백제, 왜와의 대결을 지속할 수 없었다. 신라는 현상 유지를 넘어 통일 전쟁을 꿈꾸기 시작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통일 전쟁의 중심으로 나섰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 치세 막바지 반대파들이 대규모 반란인 비담의 난을 진압하며 권력기반을 더 공고히 했다. 이들은 선덕여왕 승하 후 진덕여왕 옹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실상 신라의 국정은 이들에 의해 운영됐다. 통일 전쟁이라는 큰 과업을 위해 국가적 역량을 집중시킬 힘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김춘추는 648년 당나라 방문해 당태종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당태종은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성군으로 추앙받았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645년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서 당태종은 요동의 요충지 요동성을 함락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철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당나라 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몇몇 역사서에서는 퇴각하는 당나라군을 추격한 고구려 군이 지금의 북경지역에까지 공격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당태종 역시 그 전쟁 과정에서 병을 얻었다. 일설에는 화살을 눈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그만큼 고구려와 전장 패배는 당태종에 큰 상처였다.

당태종은 1차 정벌 실패 이후 소규모 국지전을 수시로 전개하며 고구려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 편, 대규모 정벌을 계획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동맹 제의는 큰 관심을 가지게 하는 일이었다. 애초 당나라는 신라와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특히, 신라가 여왕에 의해 통치되는 상황에 대해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 정벌의 실패는 신라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이런 배경 속에 김춘추의 당나라 외교는 성공적이었다. 김춘추는 당태종에 큰 환대를 받았다. 물론, 당나라의 동맹은 그 반대급부를 내놓아야 했다. 신라는 그 시점 이후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의 연호를 따랐다. 각종 제도와 관복 등도 당나라 식으로 바꾸며 친당 정책을 본격화했다. 일례로 신라의 여왕이 당나라 황제를 칭송하는 수를 놓아 바치기도 했다. 이를 주도한 건 김춘추였다.

그로서는 백제의 멸망시키기 위해 당나라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자주성이 훼손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나로서는 신라 차기 권력자인 김춘추의 친당 노선이 지속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신라가 남쪽에서 고구려를 압박한다면 고구려 정벌이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즉, 신라와 당나라 모두 이해득실을 따진 동맹의 형성이었지만, 당나라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를 두고 최근의 평가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비판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서도 진정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다. 무엇보다 민족의 자주성을 크게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당시 삼국은 같은 문화가 생활방식, 말이 통하는 관계이긴 했지만,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다. 대결 양상이 치열했고 우후적인 공존을 이룰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삼국은 필요에 따라 연합을 할 수 있지만, 언젠가 서로를 멸망시켜야 하는 적이었다. 이런 대결 구도는 누군가에 의해 통일이 되어야 끝날 수 있는 숙명이 있었다. 신라는 나라의 생존을 위해 백제와 고구려와의 대결을 끝내야 했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의 힘도 빌어다 쓸 필요가 있었다. 신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 할 수 있다. 

 

경주 남산의 석탑



이렇게 결성된 나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에 이어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결국 신라가 삼국시대의 대결의 마지막 승자가 됐다. 한때 신라는 강하게 압박하며 위기로 몰아넣었던 백제는 신라의 적극적인 외교전에 대응하지 못했다. 대야성 승전 이후 더는 군사적인 성과가 없었다.

태자 시절 해동증자라는 극찬을 받았고 집권 초기 강력한 리더십으로 신라를 공격하며 강한 왕권을 구축했던 의자왕 역시 그때의 촉명함과 판단력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백제 멸망 시기 의자왕에 대한 기록은 그가 주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부분이 많다. 과장되고 왜곡됐다는 설이 주류지만, 백제 멸망 당시 백제 궁의 3,000명의 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의자왕에 대한 평가를 더 부정적으로 만든 단적인 예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 성과에 도취된 것인지 변화하는 정세에 대응하지 못했고 내부 결속에도 실패하며 백제 멸망에 큰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힘없이 무너졌다. 5만의 신라군에 맞서기 위해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나선 장면이나 당나라군의 상륙에 이렇다할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은 백제의 전시 대응이 원할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의자왕은 뒤늦게 웅진으로 탈출해 반격을 모색했지만, 신하들에 의해 잡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의자왕은 654년 신라의 왕위에 올라 통일전쟁을 직접 주도한 김춘추 태종무열왕에 항복의 예를 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김춘추는 마침내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의 사위, 딸의 참살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김춘추의 복수심이라면 의자왕 역시 참살을 피할 수 없었지만, 당나라는 의자왕을 비롯해 1만 명이 넘는 백제인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전쟁에 대한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방면됐지만,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얼마 안 가 병사했다. 찬란했던 문화강국 백제의 비참한 최후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의자왕은 오랜 신라에 대한 백제의 원한을 복수하며 일정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 역시 복수의 대상이 되며 망국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역사의 기록에서 의자왕은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반대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엇갈리는 평가가 공존하지만,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게 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김춘추와 의자왕은 삼국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데 있어 크게 비교되는 인물이다. 이들의 엇갈린 운명은 나라의 운명까지 바꿔놓았다. 후세 그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했다.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진 하지만, 이들의 삶의 끝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긴 여운을 주는 교훈으로 다가온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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