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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14회] 조선 세종의 성공 이끈 철혈 군주 태종 이방원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6. 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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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태종 이방원은 각종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소재가 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신권과 왕권의 대립하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며  왕권으로 힘은 균형추가 완전히 기울게 했다. 태종 시대 조선은 제왕 중심의 중압 집권제로 강력히 시행했다. 

이런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수 많의 희생이 뒤따랐다. 조선 건국을 이끌었던 정도전이 그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건국에 일조했던 공신들 상당수가 피의 숙청을 피하지 못했다.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꿨다. 권력의 중심은 3정승이 중심된 의정부에 있었고 왕권은 제한됐다.

이성계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태종은 생각이 달랐다. 이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태종은 정도전 세력의 숙청에 이에 세자였던 이복동생 방석과 또 다른 이복동생 방번을 사사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그들의 어머니였고 아버지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그 즉위가 크게 격하되고 그의 능에 있던 각종 석재들이 청계천 정비 시 다리의 주춧돌 등으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관계 회복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1차 왕자의 난이 불러온 결과였다.  

태종은 권력의지는 친족과의 관계마저 끊을 정도로 강했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태종은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또 다른 형제들의 도전을 이겨내고 권력을 더 공고히 했다. 결국, 그는 조선 제2대 왕이었던 정종의 선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후 태종은 국가의 제도와 각종 시스템을 정비하고 중앙집권제의 국가 통치구조를 완성했다. 그의 치세 당시 조선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의 과도기를 넘어 나라의 기틀을 완성할 수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이 있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발전만 놓고 본다면 태종은 큰 역할을 했다. 

태종 이방원은 젊은 시절부터 총명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고려 시대 먼 변방인 함경도 지역의 무장 출신이었던 이성계는 중앙 정계와는 큰 거리가 있었고 정치적 기반도 부족했다. 그의 자식들 역시 관직에 나설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이성계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고려 시대 과거에 급제하며 자신의 힘으로 관직에 올랐다. 이에 더해 뛰어난 장수였던 이성계를 닮아 무예에도 능했다. 문무를 갖춘 왕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성계와 정도전 세력과 대립하며 고려를 지키려 했던 구세력의 중심 정몽주를 피살하며 조선 건국의 길을 열었다. 잔혹한 일이었지만, 정몽주의 제거는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모두 멈칫할 때 이방원은 과감히 행동했다. 이런 이방원의 능력과 결단력은 대단했지만, 조선 건국 후 집권세력에는 큰 위협이었다. 이방원은 자신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면 도리어 반대 세력에 의해 숙청될 수 있었다. 이방원은 그 대결에서 먼저 행동했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권력 장악 과정에서 태종 이방원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태종은 집권 후 왕권에 위협이 된다면 가차없는 숙청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왕의 외척들이 숙청의 칼날에 쓰러졌다. 이는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큰 조력자 역할을 했던 중전 원경왕후의 집안도 예외가 없었다. 원경왕후의 남자 형제들은 모두 사사됐고 집안은 몰락했다. 태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던 공신들도 대거 숙청하며 또 다른 권력의 등장 가능성을 차단했다. 

이렇게 태종은 왕권 강화라는 큰 목표에 방해되거나 위협이 되는 세력에 자비가 없었다. 이는 그의 이미지를 강한 권력을 추구하는 철혈 군주로 각인되도록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태종 이방원은 무자비한 면모가 더 부각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의 기틀을 세운 왕이다. 무엇보다 그의 아들 세종대왕의 치세를 빛나게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은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1418년 태종은 돌연 세자 충녕에서 선위를 발표했다. 아직 그의 나이가 40대였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지 얼마 안 된 시기의 일로 큰 충격이었다.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와 세자 충녕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충녕대군은 왕위에 올랐다. 세종대왕 시대의 시작이었다.

세종의 즉위식은 선대왕과 그다음을 잇는 왕이 함께 하는 조선 역사에서 유일한 행사였다. 보통 선위는 권력에서 밀려난 왕이 외부의 힘에 의해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태종은 자신의 권력이 공고하던 시점에 선위를 단행했다. 이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태종은 선위 이후에도 상왕으로 군권과 인사권을 장악하며 사실상 국정을 주도했다. 이 시간 세종은 제왕의 수업을 할 수 있었지만, 큰 아픔도 있었다.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과 그 일가를 대거 숙청했다. 태종은 심온이 외척으로 왕권을 위협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태종은 치밀한 계획으로 이를 실행했다. 이로써 태종은 세종의 제위 시 그를 위협할 신권과 외척 등 외부 세력들이 힘을 발휘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다. 여기에 태종은 수시로 조선의 해안지역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의 근거지였던 쓰시마섬 정벌을 주도하며 나라의 근심을 덜었다.  선위 후 그가 승하하기까지 4년간 태종은 세종의 사실상 섭정으로 세종이 마음껏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렇게 태종의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운영 시스템이 완비한 상황에서 세종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태종이 만든 기반 위에 학문과 과학, 문화 등 다방면에서 조선을 발전시켰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세종대에 시작한 조선의 전성기는 성종 때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특히, 한글의 창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를 국가운영의 중요한 근본으로 하는 조선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왕의 강력한 의지와 힘이 있어 가능했다.

세종대왕을 역대 최고 군주로 칭송하게 하는 한글은 그의 아버지 태종이 그 여건을 만들었다 할 수 있다. 태종은 과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장영실이 관노비 출신이었지만, 그를 발탁해 재주를 펼칠 수 있도록 했고 세종 시대 명정승으로 이름을 떨친 황희를 다시 관직에 복직토록 해 세종이 중이 쓸 수 있도록 했다. 황희는 태종의 뜻에 반해 조정에서 축출된 상황이었지만, 태종은 그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이런 태종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태종은 애초 그의 첫째 아들 양녕을 세자로 삼고 왕위를 계승하길 원했다. 태종은 과거 2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와 피의 대결을 했던 아픈 기억을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자신의 완성한 강력한 왕권에 장자 계승으로 왕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양녕은 태종의 뜻과 달리 각종 기행과 여성 편력으로 왕실의 고민거리가 됐다. 다른 이들에게 냉혹하기만 했던 태종은 이런 양녕에 큰 인내심을 보이며 후계자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노력에도 양녕은 달라지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는 양녕이 충녕의 자질을 인정하고 왕위에 대한 뜻이 없어 일부러 기행을 저지르며 그 세자의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고 묘사되지만, 조선 시대 기록에서 양녕의 행태는 심각했다.

그는 상왕이었던 정종의 후궁과 사통하는가 하면 장안의 기생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사대부 가문의 유부녀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기도 했다. 그에 대한 탄핵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더해 양녕이 아버지 태종이 수많은 후궁을 두면서 자신의 여성 편력에 대해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는 일도 있었다. 태종으로서는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게 할 수 없었다. 태종은 양녕의 폐세자와 함께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얼마 안가 선위하는 과정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미 충녕의 왕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후 폐세자 된 양녕은 귀향길에 올랐지만, 태종은 그가 편하게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 역시 양녕에 대해 각별했다. 철혈 군주였던 태종 역시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아버지였다. 태종은 세상을 떠나는 시점에 아들 세종대왕에서 자신의 모든 악업을 짊어지고 갈 테니 성군이 되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말대로 태종은 조선 초기 악역을 자처하며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고 세종대왕은 그 위에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다. 태종의 삶은 피로 물들었지만, 그의 사후 찬란한 꽃이 피었다. 이 점에서 태종을 철혈 군주로만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는 세종대왕을 만든 강력한 킹메이커였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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