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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13회] 정조의 숨은 조력자이자 킹 메이커, 혜경궁 홍씨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5. 2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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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 후 조선은 국가적인 위기에 빠져들었다.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고 피해 복구는 더디기만 했다. 이를 해결한 권력층의 노력도 있었지만, 극심한 대립으로 치달은 붕당정치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국가 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대부 양반들은 한계에 다다른 국가 시스템을 개선하고 변화를 모색하기 보다 구시대적인 사고를 벗어나 못했고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더 몰두했다. 그 사이 조선은 더 수구화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끌었던 왕이 있었다. 영조와 그의 손자 정조 시대 조선은 반등의 기운이 강하게 일어났다. 기존의 성리학의 한계를 탈피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실학이 일어났다. 서구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한편 시장 경제가 발전하는 모습도 있었다. 신분제에 근거한 조선 사회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움직임은 일정 성과도 있었다. 정조 사후 그의 개혁 정책들이 후퇴하고 퇴행적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가 자리하면서 조선의 부흥기는 사라졌지만, 영. 정조시대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특히, 정조는 개혁 군주로서 더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저널 그날 313회에서는 정조시대를 살피면서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혜경궁 홍씨는 그의 배우자이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세자빈으로 자리에 올랐지만,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가 사사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혜경궁 홍씨는 마음 깊은 곳에 한을 간직했지만, 어른 정조를 지켜 그를 왕위에 오르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의 역할은 강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성군이 되는 데 있어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더 주목했다. 

그녀의 삶은 직접 집필한 자서전 한중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한중록은 그가 권력의 상층부에서 평생을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역은 책으로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한중록은 정조가 승하한 이후 그의 아들 순조가 즉위한 이후 세상에 나왔다. 

 



혜경궁 홍씨의 삶의 가장 큰 전환점은 사도세자의 원통한 죽음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10세 때 세자빈에 간택되어 사도세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첫째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망한 이후 영조 나이 42세에 얻은 아들 사도세자에 대한 마음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2세에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는 3살부터 왕세자로서 제왕이 되기 위한 조기 교육을 받았다. 교육 일정은 빽빽했다. 영조 스스로가 사도세자를 직적 교육할 정도로 영조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영조는 그의 후계구도를 튼튼히 하는 한편 사도세자가 호학군주, 학문에 능한 임금이 되기를 소망했다. 

영조는 그의 어머니가 인형왕후의 궁녀 출신이라는 점이 큰 콤플렉스였다. 강력한 신분제 사회에서 중전이나 후궁 출신도 아닌 어머니로부터의 자식은 왕위 계승에서 먼 위치였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숙종의 지원으로 영조는 왕위 계승의 순위를 앞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숙종의 후계자는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대결 구도 속에서 남인 편에 있었던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었다. 장희빈은 정치적 격변 속에 사사됐지만, 그의 아들 경종의 후계구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정치 구도는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양대 세력인 장희빈의 사사를 주도한 서인 강경파 노론과 그 대척점에 있었던 서인 온건파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그의 즉위 후 소론이 정국을 주도했다. 반대로 영조는 노론이 지지를 받았다. 즉, 영조는 야당의 당수와 같았다. 병약하고 후사가 없었던 경종은 영조를 세제로 삼아 그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붕당의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경종과 영조는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였지만, 개인적인 관계는 그렇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그들은 원하던 원치 않았던 정적의 관계가 됐다. 이 과정에서 경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영조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문제는 경종이 영조가 올린 게장과 감을 먹고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조에 의한 독살설이 강하게 퍼졌다는 점이었다. 영조로서는 그의 출신과 경종의 독살설이 두고두고 그의 정치적 아킬레스건이 됐다. 소론 세력을 중심으로 경종의 독살설은 반정의 중요한 명분이 됐다. 영조는 노론을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끊이지 않는 경종 독살설은 큰 부담이었고 정통성을 흔드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이에 영조는 더 철저하고 세밀하게 국가 경영을 했다. 그의 세밀함은 편집증적이었다. 그는 대신들보다 더 철저하고 완벽한 임금이 되어야 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그런 군주가 되기를 원했다. 당연히 엄청난 학습량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학문보다는 무예와 예술에 더 관심이 많았고 재능이 있었다. 무예에 능했던 사도세자는 당시 조선의 전통 무예를 집대성하고 정리한 근접전 교범 무예신보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사도세자는 무예의 표준을 정하고 이를 강군을 만드는 바탕이 되도록 했다. 이는 학문을 중시하는 영조의 뜻과는 다른 일이었다. 이런 성향과 차이는 사도세자가 영조와 대립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됐고 비극의 씨앗이 됐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사도세자와 영조의 대립관계를 분석했다. 사도세자가 머물렀던 전각은 과거 경종의 모시던 나인들이 있었다. 그 나인들은 영조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의해 영조의 경종 독살설이 사도세자가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사도세자가 영조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실제 사도세자는 영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만남을 꺼렸다. 보다 완벽한 군주가 되기를 원하는 영조의 다그침은 사도세자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영조는 그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도세자에 대한 실망이 쌓여갔다. 이렇게 부자 관계는 날이 갈수록 어긋나기만 했다. 

이런 부자 관계가 더 악화된 건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었다. 사도세자는 15세부터 영조에 의해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영조는 그에게 사도세자가 국정경험을 쌓고 제왕의 수업을 하도록 한 의도였지만, 아직 10대 중반의 사도세자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영화 사도에서도 나오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국정 운영의 전권을 준 것이 아니라 수시로 참견하고 간섭했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의 자리는 가시방석과 같았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미숙함을 질타하고 비판하기만 했지 따뜻하게 그를 품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의 재난이나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사도세자의 미숙한 국정 운영에 그 책임을 묻는 식으로 그를 압박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과정을 거쳐 강한 군주로 되도록 한 의도였을지 모르지만, 사도세자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커질 뿐이었다. 사도세자에게 아버지 영조는 두려움이 대상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정신 병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도세자가 그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부친 홍봉한에게 보낸 서찰에 그 마음이 담겨 있었다. 사도세자는 사진의 병증이 심각함을 알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치료를 위한 약재 등을 홍봉한에게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 사실을 비밀로 할 것으로 명했다. 사도세자로서는 그의 병증이 공식화 됨에 따른 파장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스스로 병을 극복하려 했지만,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그의 병증은 각종 기록에도 남아있다. 특히, 사도세자는 의복을 입든에 있어 큰 거부감을 보이는 의대증이 심각했다. 의복을 갖추는 일은 상당 부분 영조와의 대면 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사도세자로서는 그 만남이 큰 고통이었다. 그 마음이 의복을 거부하는 이상 증세로 나타났다. 사도세자의 병증은 지속적인 살육으로 이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에 의해 100여 명 가까운 나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나와있다. 세자의 이러한 기행은 왕실은 물론이고 당시 정치권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영조 역시 더는 사도세자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는 국정을 흔들게 하는 일이었고 영조의 정치적 입지마저 불안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마저 아들의 기행을 더는 볼 수 없어 처단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영조는 그의 재위 38년 째인 1762년 사도세자를 폐서인하고 뒤주에 가두는  참혹한 처분을 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8일 만에 아사했다. 혜경궁 홍씨와 그의 아들 정조는 그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영조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할 수 있었지만, 혜경궁 홍씨는 정조와 함께 궁궐을 떠나 친정으로 향하는 결정을 했다. 법적으로 폐서인 되어 왕족의 지위를 잃은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와 아들 정조가 궁에 머물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아들 정조를 보호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이를 통해 영조와 강경파 대신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로서는 배우자를 잃은 슬픔에만 머물 수 없었고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누군가의 어머니로서의 삶을 택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 인내했다. 

이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사도세자가 다시 세자로 추존되고 정조는 세손으로 왕위 계승자가 됐다. 다시 궁궐로 돌아온 이후에도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를 자신의 기억 저편에서 묻어뒀고 정조가 왕위를 이어받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배우자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영조와 정조의 지속적인 소통과 우호적 관계 유지가 중요함을 인식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를 영조와 가까운 곳에 기거하도록 했다. 또한, 정조가 사도세자가 아닌 먼저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해 세손의 지위를 공고히 하도록 한 영조의 조치에도 동의했다. 

이를 통해 혜경궁 홍씨는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해도 대비가 될 수 없고 법적으로 숙모가 돼야 했지만, 그녀에게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3년 상을 치러야 했지만, 그마저도 중단해야 했다. 원통한 일이었지만, 혜경궁 홍씨로서는 정조가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마음을 얻었다. 사도세자 죽음을 주도한 노론 강경파가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조는 세손 정조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혜경궁 홍씨로서는 이런 정치적 역학 관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냉철하게 대처했다. 

한편으로 혜경궁 홍씨는 정조가 성군의 길로 가도록 이끌었다. 정조로서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그 아들에게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했다. 정조 역시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학업과 무예에 모두 능한 지덕체를 갖춘 왕의 역량을 키웠다. 이는 영조가 바라는 후계자상이었고 영조는 정조의 중요한 후견인이 됐다.

하지만 노론 강경파를 비롯한 반대 정치세력에 의한 위협은 세손 시절부터 정조에 큰 위협이었다. 정조는 인내하고 실력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인고의 세월을 지나 1776년 정조는 영조의 승하 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일성으로 자산이 사도세자의 자식임을 천명했다.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 강경파에 대한 선전포고였지만,  또 한편으로 자신이 효장세자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음도 인정하는 유화책도 함께 꺼내들었다. 

 



정조는 즉위 초기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가며 급격한 정국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그 한편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 친위 세력 육성을 위해 문신들을 위한 규장각과 군권 강화를 위한 장용영을 설치했다. 두 기관은 정조의 중요한 권력 기반이 됐다. 정조는 포용과 힘에 의한 통치를 병행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그 그 기반 위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완전한 복권을 추존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사도세자는 명예를 회복했고 혜경궁 홍씨의 지위도 격상됐다.  어머니의 원통한 죽음을 이유로 폭군의 길을 간 연산과는 큰 차이가 있는 일이었다.

정조시대 최고 정점에 있었던 사건은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해 열렸던 수원 화성 행차였다.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이 행차는 백성들과 함께 했던 행사였다. 정조가 왕으로서의 입지를 확인하는 대규모 이벤트였다. 혜경궁 홍씨는 이 행차로 사도세자 사후 처음으로 그의 능에서 마음껏 사도 제자를 애도할 수 있었다. 인고의 세월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정조는 나라를 부강하게 이끄는 성군의 면모를 보이며 차원 높은 복수를 했다.

이 화성 행차 5년 후 정조는 승하하며 그가 꿈꾸던 조선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먼 훗날에도 성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 승하 후 그녀의 손자 순조 시대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그 삶을 이어가다 1816년 한 많은 삶을 마무리했다. 이후 혜경궁 홍씨와 그의 배우자 사도세자는 조선 후기 왕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시기 황제로도 추존되며 완전한 명예 회복을 이뤘다. 모두가 정조를 성군으로 이끈 결과였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혜경궁 홍씨는 시련을 또 다른 기회로 만든 강인한 여성이었고 어머니였다. 그녀는 역사와 정치의 흐름을 읽고 있었고 킹 메이커의 역할을 했다. 정조의 성공에는 그녀의 역할을 매우 컸다. 이는 그녀를 역사의 승자로 만들어주었다 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은 한 개인의 삶이 아니었다. 이는 혜경궁 홍씨의 삶을 드라마 속 비운의 여인과 아들에 의해 한을 씻은 어머니로만 볼 수 없게 하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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