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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12회] 정치적 격변기 하나 될 수 없었던 가족 광해군과 인목대비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5. 1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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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왕의 시호조차 받지 못한 채 폭군으로 기록되었지만, 후대에 와서 그 평가가 다라진 임금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서 제2의 정부인 분조를 이끌며 전쟁 극복에 큰 역할을 했고 왕위로 올라 전후 복구와 신흥 강국 후금과 명나라 사이 중립 외교를 통해 조선을 또 다른 전란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가 살던 시기 실패한 임금이었고 긴 유배생활 끝에 그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왕위에서 폐위된 이후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고 일체의 이동과 사람들과의 만남이 통제된 가택연금 상태로 18년을 보냈고 그가 왕으로 집권한 15년보다 더 긴 세월이었다.

비운의 왕이었던 광해군의 삶에 있어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있다. 선조의 마지막 왕후 인목대비가 그 인물이다. 인목대비는 19살의 나이에 선조에 세상을 떠난 중전을 대신해 새로운 중전으로 간택됐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이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광해군과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인목대비보다 9살이 더 많았지만, 엄연한 모자 관계였다. 하지만 이들의 모자관계는 냉혹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원수 사이로 변했고 조선 비극적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역사저널 그날 312회에서는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관계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재조명했다 

비극의 중요한 원인은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에 있었다. 선조는 그전 임금인 명종에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방계 혈통으로 명종과 직접적인 연결점이 없었다. 당시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적 사고에서 선조는 왕위 계승 순위가 한참 아래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는 선조에게 큰 콤플렉스로 다가왔다. 선조는 이런 상황을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거나 하는 등의 정치력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선조 집권기 조선은 사림 세력이 수차례 사화를 견디면 성장한 지방의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해 정치권력의 주류를 이루는 시기였다. 늘어난 정치 세력들에 비해 부족한 관직 수는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구분되는 붕당정치가 시작됐고 양 세력을 강하게 대립했다. 상호 소통과 토론 등의 정치적 순기능보다는 상대 세력을 억압하고 권력은 잡은 세력이 상대 세력을 숙청하는 등의 파행적 정치가 주류를 이뤘다. 이런 강대강의 대립에 선조는 이를 중재하거나 올바른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 가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 세력의 대립을 그는 왕권 강화에 이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하려는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선조는 중전을 통해 자식을 얻지 못했고 후궁들을 통한 왕자들이 있었다. 선조는 자신의 왕위를 이어갈 후계자인 세자 책봉을 미루며 적장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후계 구도의 불확실성은 국정을 혼란하게 할 수 있었다. 마침 후공 소생의 왕자 중 광해군은 왕의 재목으로 신하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의 형 임해군은 성정이 포악하고 왕으로서의 능력을 의심받고 있었다. 순리대로라면 광해군이 세자가 돼야 했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했고 왕실은 전란을 피해 몽진을 떠나야 했다. 국가적 위기에서 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었다. 선조는 마지못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전란 중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식은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비록 책봉 과정은 초라했지만, 광해군은 전란 중에 제2정부인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적직 한가운데 분조를 설치하고 각지의 의병들을 규합해 항전토록 독려했다. 무너진 행정 조직을 다시 확립했다. 일본군의 급속한 북진에 평양, 의주를 거쳐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했던 선조와 달리 광해군은 백성들과 함께 적과 싸우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고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백성의 지지를 얻은 세자의 존재는 전쟁 수행과 전후 복구에 있어 중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었지만, 선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조에게 광해군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이었다. 그는 광해군을 그의 후계자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을 이끌며 전승의 신화를 만들어낸 이순신을 의심해 그를 죽임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고 의병들을 이끌던 의병장들에 대해서도 전공을 치하하기보다는 그들의 강하게 견제했다. 이에 상당수 의병장들은 전후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죄를 받아 큰 화를 입기도 했다. 곽재우 등의 의병장들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기도 했다. 선조는 자신의 실정을 덮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유지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차기 권력의 중심 광해군이 선조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짐작하는 부분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 무려 18번의 선위 파동을 일으키며 광해군과 신하들을 시험했다. 전쟁이 급한 와중에 선조의 선위 파동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었다. 이에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은 급히 선조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선위를 거두어 줄 것을 청원해야 했다.

이런 선조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세상을 떠난 중전을 대신해 새로운 중전 간택을 독촉했고 19살의 중전을 맞이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한찬 어린 나이로 국법상 광해군의 어머니가 됐다. 이런 인목왕후를 통해 선조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적장자 영창대군을 얻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적장자의 권위는 매우 크다. 광해군은 서자이기도 했고 장남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선조의 견제 속에 세자 자리가 위태로웠던 광해군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광해군은 조선이 사대하고 있는 명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의 세자와 왕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온전히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 변화는 광해군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이 됐다. 광해군은 동인에서 분파된 소수 북인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서인과 남인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가 뒤늦게 얻은 적장자 영창대군이 성장하면 세자 교체가 단행될 수도 있었다. 

이 위기에서 돌연 선조가 승하하면서 광해군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영창대군의 나이는 너무 어렸고 선조 역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국내외 상황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초토화된 나라를 재건해야 했고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세운 신흥 강국 후금이 일어나 명나라를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은 급격히 약해져 후금에 밀리는 형국이었다. 임진왜란의 피해 복구가 시급한 조선으로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큰 부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외교로 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명나라 공격에 집중하고 있는 후금은 자신의 배후에 있는 조선이 신경 쓰일 수 있었다. 마침 명나라는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조선의 파병을 강력히 요청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중요한 외교정책이었던 조선은 이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당시 통치 이념인 성리학의 명분론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사고는 당시 집권층에는 중요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생각이 달랐다. 조선이 후금에 대항할 수 없음을 광해군은 인지했고 실리를 택했다. 이에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파병된 조선군은 후금에 투항하며 확전을 막았다. 광해군의 밀지에 의한 일이었다. 이렇게 대외적인 위험을 관리한 광해군은 전후 복구에 박차를 가했고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중립외교에 대한 계속된 사대부 양반들의 반발은 광해군에 정치적 부담이었다. 여기에 선조의 적장자 영창대군이 성장하면서 영창대군은 반대파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소수 정권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광해군으로서는 정권 유지를 위한 방안이 필요했다. 

결국, 광해군은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했다. 집권 세력인 북인 강경파는 지속적인 옥사로 반대파를 제거했고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숙청의 칼날은 영창대군과 그의 모후 인목대비로 향했다. 북인 정권은 역모 사건을 빌미로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냈고 인목대비 역시 페서인 후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했다. 결국, 영창대군은 강화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인목대비의 집안도 역적의 죄로 큰 화를 입었다. 광해군은 이러한 일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사실상 동조했다.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역대 조선 왕조에서 왕이 되지 못한 왕족들은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다. 상당수는 큰 화를 당하기도 했다. 형제간 인척간 피바람이 일어나기도 했다. 태종 이방원은 2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형제들을 사사하고 친형제를 유배보냈다. 외척 세력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도 단행했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을 보필하던 공신 세력을 숙청했고 단종 역시 폐위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 후 사사됐다. 

광해군으로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와 유폐, 영창대군의 사사는 폐모살제라는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일이 됐다. 인목대비는 중전으로 법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고 영창대군은 이복형제다. 특히, 어머니를 폐하고 유폐시킨 일은 성리학에서는 큰 죄악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반했다는 이유와 폐모살제라는 두 가지 큰 이유로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단단히 했다고 하지만, 광해군의 기반이 된 북인 정권은 그 세력이 크지 않았다. 숙청 후 반대파를 등용하고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지만, 일당 독재의 틀을 벗아나지 못했다. 당연히 집권 세력에 대한 반발 세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북인 정권 내부에서 부정부패가 심화됐고 소수의 집권층에 둘러싸인 광해군 역시 세자 시절의 총명함을 잃어갔다. 여기에 광해군은 전후 복귀 과정에서 궁궐의 중건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강행하는 등이 실정을 하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

또한, 집권 년차가 늘어나면서 통치 시스템이 느슨해졌고 반대파들의 반정 시도에 대한 대응도 민첩하거나 치밀하지 못했다. 충분히 서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의 기운이 보였지만, 광해군은 그 위험에 대비하지 않았다. 집권 후반기 광해군은 반정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거시 당시에는 왕권의 기반이 되는 군까지 반정세력에 매수됐다. 이는 반정 계획이 사전에 누설됐음에도 반정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가 됐다. 1623년 반정 세력은 훗날 인조 임금이 되는 능양군을 중심을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장악했고 광해군을 잡아 압송했다. 광해군의 시대가 끝나는 순간이었고 광해군 집권 이후 숨죽이며 살아왔던 인목대비가 복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입장이 뒤바뀐 상황, 인목대비는 자신의 아들을 사사한 광해군은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며 강한 복수심을 보였다. 하지만 반정 세력을 광해군의 목숨까지 거두지는 않았다. 대신 광해군과 함께 했던 북인을 포함한 집권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폐위한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제주로 이어지는 긴 귀양살이의 여정을 거치며 1641년 세상을 떠났다. 인목대비는 그에 앞서 1632년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왕으로 추존한 아버지 능이 있는 김포 장릉



광해군과 인목대비는 법적으로서는 모자 지간이었지만, 정치적 상황으로 원수 사이가 됐고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큰 한을 간직한 채 삶을 마감했다. 두 사람의 어긋한 관계는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의 무리한 권력에 대한 집착과 유교적 명분론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이 명분론은 광해군 폐위 후 집권한 인조 임금 시기 조선의 대외 정책은 친명배금으로 급격히 변화하게 했다. 그 결과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에 직면했고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후금에 항복하며 항복의 예를 갖추는 굴욕을 당했다. 이후 조선은 근대 개화기까지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조선은 오랑캐로 무시하던 여진족들의 신하가 됐다. 이는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이었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론을 스스로 어기는 일이 됐다.

이후 광해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그의 대외정책에 대한 실정을 그 언급이 크게 줄었고 폐모살제라가 중요한 폐위의 근거로 자리했고 훗날 집권세력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광해군의 페모살제의 잘못은 그에게 폐륜이라는 굴레로 남았다. 이는 광해군에게 폭군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광해군의 큰 잘못이긴 하지만, 광해군의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폐위 등의 조치는 불가피한 면도 충분히 있었다. 대규모 토목 공사 역시 전후 복구의 과정이었다. 오히려 전란을 피한 중립외교와 세자 시절의 공헌, 집권 후 내치의 성과 등이 더 평가를 받아야 하는 광해군이다. 최근 광해군에 대한 긍정 평가와 함께 그가 재조명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광해가 천만 관객 이상의 동원하며 흥행작이 된 이유도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영향을 주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 시대를 살았던 인목대비의 힘겨웠던 삶을 외면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광해군과 인목대비 보다 정치적 격변기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냉혹한 권력의 이면 안에서 자신의 삶이 뒤바뀐 피해자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삶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기록만으로만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다 열리고 입체적인 사고로 두 사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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