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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09회] 수나라 백만 대군 물리친 고구려 승전의 역사, 살수대첩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4. 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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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영역이 아닌 만주지역을 호령하던 고구려는 인접 이민족과 중국 왕조들과 국경을 접하면서 그들과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고구려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보다는 강하게 맞서며 영토를 넓히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런 고구려의 성장 배경에는 오랜 세월 계속된 중국의 분열이 있었다. 한나라 멸망 이후 위 진 남북조, 5호 16국의 혼란 속에 고구려는 만주지역의 패권을 공고히 하고 남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며 한강유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세기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 국가로 발전한 신라가 진흥왕 시기 국력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했다. 진흥왕의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함께 공격했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독자적으로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며 나라를 더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라의 배신과 함께 어렵게 찾은 그들의 옛 영토 한강유역을 잃은 백제는 신라에 대한 강한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군사적으로 강하게 신라를 압박했다. 고구려 역시 빼앗긴 영토 회복을 위해 신라를 압박했다. 

삼국이 치열하게 대결하는 사이 중국에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 오랜 혼란기를 평정한 나라를 수나라였다. 수나라를 건국한 수 문제는 중국의 국력을 하나로 모이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 건설을 시작했고 이를 통해 남북의 물자와 인력 교류를 활발히 했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과거제를 실시했다. 폐쇄적인 신분제를 극복하는 열린 사회의 도래는 여러 인재들이 국가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 역시 수나라에는 큰 힘이 됐다. 이는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왔고 그렇게 축적된 힘으로 수나라는 중국 본토를 항상 위협하던 돌궐 등 이민족과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대표적인 이민족 집단인 돌궐에 대해 수나라는 이간책으로 그들을 동서로 분열토록 했고 힘으로 여타 이민족들을 제압했다. 이렇게 수나라는 대. 외적으로 그 힘을 떨친 제국의 위용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이런 수나라에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가 그랬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이후 요동지역의 맹주로 중국의 세력 안에 편입되지 않고 그들만의 세계관과 천하관을 바탕으로 독자성을 유지했다. 타 이민족들과의 달리 고구려는 수나라에 입조하거나 조공하는 등의 사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런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일 자신들이라 여기는 중국 통일 왕조가 좋게 볼 리 없었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당시 고구려의 왕은 영양왕이었다. 그는 수나라의 입조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요하를 넘어 수나라 영역인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하기도 했다. 승리보다는 수나라의 힘을 확인해보는 성격의 선제공격이었다. 이에 수 문제는 수십만의 군사를 동원해 육지와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좋지 않은 기상과 고구려의 반격에 패배했다. 이후 수 문제는 고구려 공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나라에 수양제가 집권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대결을 더 격해졌다. 수양제는 그의 아버지 수 문제는 물론이고 왕위 계승의 경쟁자인 형제들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사실상의 쿠데타로 집권한 수양제는 그 정통성에 대한 문제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철권통치로 내부를 단속하는 한편, 대외 정복전쟁을 통해 그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이민족들에게 대해서는 강경책을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수나라는 여전히 그들을 위협하는 북방의 돌궐과 그들과 연결된 고구려의 관계를 끊으려 했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다. 

618년 수양제는 113만의 대군을 지금의 중국 북경지역인 탁군에 집결시켰다.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을 위한 대군은 모든 부대가 출발하는 데만 수개월이 소요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그와 별도로 수만의 수군을 함께 출전시켜 수륙 양면에서 고구려를 공략하려 했다. 수나라의 역량을 모두 동원한 대군의 침략은 고구려에는 큰 위협이었다. 고구려는 이에 맞서 총력 대응했다. 

이런 고구려의 수성에 있어 핵심은 단단한 성곽이었다. 고구려의 과학적 축조 기술로 지어진 성곽은 적의 각종 공격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구조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단단하고 높은 성곽과 그 주변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삼면에서 타격할 수 있는 치, 수나라의 기술을 탈취해 더 강력하게 만든 대형 석궁 쇠뇌 등으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에 수나라는 100만의 군사와 함께 바위를 날려보내는 포차, 성벽을 오를 수 있는 운제 등 공성무기로 무장했다. 

하지만 수나라 군은 고구려 공략 첫 관문인 요하를 건너는 일부터 수월하지 않았다. 고구려 군의 강력한 저항에 수나라 군대는 한 달 가까이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넜지만, 이번에는 요동을 지키는 고구려의 강력한 성들을 넘어야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요동성에서 수나라 군은 3개월 이상 지체했다. 그러고도 요동성을 차지하지 못한 수나라 군은 작전에 큰 차질을 빚었다. 고구려의 성은 견고하고 고구려 군의 항전은 강렬했다.

육군이 요동성에서 발이 묶인 사이 수나라 수군은 독자적으로 평양성을 공략했지만, 고구려의 유인책에 말려 대패당하고 말았다. 평양성을 외성과 내성 그리고 겹겹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구려는 백성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외성을 열어 수나라 군대를 유인했다. 성에 진입 후 약탈을 일삼던 수나라 군의 대열이 흐트러진 사이 고구려 군은 반격을 가했다. 일부 피해를 감수한 작전이었고 이 작전으로 수나라 수군은 퇴각했다. 이는 수나라의 수륙 병진 작전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에 수양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직접 요동성 공략을 지휘하기 위해 나섰지만, 상황이 진전되지 않았다. 그사이 긴 원정에 수나라 군사들을 지쳤고 전투력을 잃어갔다. 이에 수양제는 30만의 별동대를 조직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공력하도록 했다. 수나라 군이 지쳐있다고 하지만, 대군이 고구려 영토 깊숙이 침투하는 건 고구려에 또 다른 위기였다. 이런 수나라 별동대를 맞서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을지문덕이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홀로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 거짓 항복 의사를 전하며 수나라 군의 상황 직접 살폈다. 수나라 군은 대군이었지만, 긴 원정과 함께 물자 보급마저 부실하며 전의를 상실한 상황이었다. 수나라 군은 그들에게 주어진 수개월분의 식량을 이동 과정에서 버렸다. 여기에 고구려는 그들의 수나라 군이 고구려 영토 내에서 식량이나 물자는 조달할 수 없도록 지역을 초토화하는 청야전술로 그들을 더 힘들게 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승전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수나라 군은 뒤늦게 수양제의 을지문덕을 생포하려 했지만, 을지문덕을 이르 피해 고구려 군 진영으로 돌아왔고 이후 거짓 패전을 하며 수나라 군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였다. 계속된 승전에 고무된 수나라 별동대는 고구려의 의도대로 고구려 깊숙이 들어왔고 평양성 인근에 주둔했다. 

하지만 평양성은 높고 견고했고 수나라군은 더는 전투를 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을지문덕은 수나라 별동대를 이끄는 수나라 장군에 지금도 전해지는 여수장우중문시를 보내 또다시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 내용은 사실상 그들을 조롱하는 내용이었지만, 전투력을 잃은 수나라 군에게는 철군의 명분이 됐다. 수나라군은 철군을 단행했고 고구려 군은 테세를 전화해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맹렬히 공격했다.

 

경기도 연천군 고구려 성의 흔적, 호로고루 성



고구려 군은 지금의 청천강, 살수를 건너는 수나라 군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강을 건너는 수나라 군의 대열이 크게 흐트러진 사이 고구려 군의 총공세가 이어졌다. 결국, 수나라 별동대 30만 중 살아서 압록강을 넘은 이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을지문덕이 주도한 살수대첩이었다. 별동에의 전멸과 함께 수양제는 더는 전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철군을 결정했다.

이 살수대첩을 두고 수공을 이용한 대승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는 훗날 상상력이 더해진 이야기로 그 근거는 없다. 또한, 역사에 남을 대승을 이끈 을지문덕 장군에 대해서도 그 기록이 부실하기만 하다. 그의 탄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도 없고 그의 출신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가 출중한 장수였다는 몇 줄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을지문덕 장군이 이민족 선비족 출신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 또한 근거는 없다. 만약, 그가 이민족 출신이라 해도 제국을 지향한 고구려의 세계관 속에 포함된 인물로 고구려인의 정체성이 훼손될 수는 없다.

이렇게 빛나는 승리를 거둔 고구려는 이후 수양제의 거듭된 침략을 연이어 막아내며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냈다. 반대로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지속한 수양제의 수나라는 국력이 쇠퇴했고 그의 철권통치에 대한 내부 반발이 곳곳에서 발생하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618년 멸망했다. 수백 년의 분열기는 통일했던 중국 통일 국가의 허망한 최후였고 수양제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와의 전쟁 실패가 그들의 멸망을 촉진했다. 

하지만 고구려 역시 인적, 물적으로 큰 피해가 불가피했다. 수나라 군을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청야전술은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또한, 남쪽으로는 신라의 위협도 상존하고 있었다. 남과 북에서 적을 상대하는 일은 국가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영양왕을 포함한 귀족, 일반 백성들이 단합과 사회적 합의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중국 세력으로부터 한반도 일대의 영토를 지켜낸 방파제 역할도 했다. 살수대첩은 이 점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자랑스러운 역사라 할 있다. 다만, 그 역사적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 등에서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 지후니 ,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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