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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군사 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국민들의 열망이 폭발한 폭풍 같은 시기였다. 1979년 12. 12 군사 반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힘으로 이를 제압하려 했지만, 분출되는 국민들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그해 6월 29일, 국민들이 요구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끈 정권의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공권력에 희생되고 큰 고통을 받았다. 87년 6월 민주 항쟁은 그런 희생이 쌓이고 쌓여 이뤄낸 성과였다. 그리고 그해 6월의 열기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한 청년의 죽음이 있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6월 항쟁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절명한 대학생 이한열과 당시 민주 항쟁을 재조명했다. 

이한열은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6월 민주 항쟁 당시 만 20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6월 9일 그가 재학 중이던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참가를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여 중이었다. 시위대는 교내 집회 후 학교 정문에 있던 경찰병력과 대치중이었다. 당시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최루탄을 사용했다. 최루탄은 남성들이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 시 사용하는 가스가 분출하는 일종의 가스탄이었다.

경찰은 시위대에 대한 기선 제압을 위해 최루탄을 45발사 각도를 유지하고 않고 수평으로 발사하는 일이 예사였다. 폭발물은 아니었지만, 수평으로 날아오는 최루탄은 사람에 맞으면 치명상을 가져올 수 있는 무기였다. 이에 최루탄의 수평 발사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규정에도 이를 금지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화 시위에 강경 진압으로 맞서는 경찰은 그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이한열은 그렇게 날아오는 최루탄에 머리를 직격 당하며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이한열은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동료 학생에 이끌려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큰 충격으로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당하고 머리를 피를 흘리며 동료의 부축을 받는 장면은 외신 기자의 사진에 찍혀 각 언론사에서 보도됐다. 그 사진은 온 국민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연초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와 수사 과정에서의 은폐조작 사건으로 정권에 대한 분노가 커진 상황에서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은 정권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한열의 피격은 6월 항쟁의 불길은 더 타오르게 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이를 위한 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중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머리에 박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사건의 데자뷔 같았다. 

이런 국민적 저항에도 전두환 정권은 미봉책으로 일관하며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했다. 당시 정권에서는 민주화 운동 세력을 좌경, 용공세력으로 매도하며 일반 국민들과 분리 시키려 했다. 정권이 장악한 언론은 그런 정권의 입장을 충실히 보도했다. 실제 국민들 중 상당수는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을 향해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서 데모만 한다는 식의 비판적인 시선을 보냈다.

정보의 비대칭 속에 민주화 운동의 주장은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전달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정보를 얻을 수단이 없었던 시절 언론 장악은 정권 유지에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그랬고 생생한 피격 순간의 사진까지 정권이 가릴 수 없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정권의 민낯을 보게 된 국민들은 점점 민주화 항장에 하나 둘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 발표로 개헌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렸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 선거 시 친정부 성향의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였다. 국민의 의사가 대통령 선출에 반영될 수 없는 소위 체육관 선거였다. 과거 1970년대 유신헌법 체제 속 대통령 선거 방식과 다를 게 없었다. 국민들은 이를 직선제로 변경할 것을 골자로 한 민주화 요구를 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이를 제압하려 했다.

그리고 그런 정권의 강압적 진압 과정의 대표적 산물은 최루탄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최루탄은 시위 진압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최루탄 가스는 눈물 콧물을 절도 쏟게 만드는 독한 냄새가 그 특징이었다. 경찰의 진압 방식은 최루탄으로 시위대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백골단이라 불리던 기동대를 투입해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는 수순이었다. 최루탄의 효과적인 발사를 위해 발사 차량이 개발되기도 했다. 민주화 항쟁 열기가 뜨겁던 1987년 최루탄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국내 유일의 최루탄 생산업체는 최고의 특수를 누렸다. 그해 소득세 신고 1위에 그 업체의 회장이 자리했을 정도였다. 이에 학생들은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는 투석전으로 맞서며 강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이런 치열한 공방전 속에도 전두환 정권은 그들만의 전당 대회를 개최해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등 기존 헌법체제 속에 정권 연장을 도모했다. 이미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그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시중에는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추후 발견된 정부 자료에도 그런 계획이 있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들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한열이 피격된 6월 9일을 기점으로 민주화 항쟁의 열기는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이한열이 의식을 잃어가는 가운데도 참석하고 싶어 했던 6월 10일 6.10 국민대회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대학생을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도 다수 이에 참여했다.  정권은 힘으로 이를 제압하려 했다. 이에 밀린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명동성당은 그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경찰은 명동성당 진입까지는 하지 못했다. 명동성당에서 시위대는 고립됐지만, 각지에서 그들에 대한 응원이 이어졌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던 도심의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명동성당 주변에서 호헌철폐, 독재 타도의 민주화 항쟁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응원했다. 일부 직장인들은 퇴근 시 명동성당 주변을 찾아 그들을 응원하기도 했다. 고립된 시위대를 위해 각종 생활용품 등을 후원하는 일도 있었다. 

일반 국민들의 참여는 민주화 항쟁의 큰 전환점이 됐다. 정권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쉽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6월 18일 열린 전국적인 최루탄 추방 대화에서도 정권은 엄청난 최루탄을 사용하며 이를 강제 진압했다. 이어 대 국민 담화를 통해 민주화 시위를 불법 과격 시위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사실상 대 국민 협박이었다. 

하지만 대내외적 여건은 그들의 바람과 달랐다. 우선, 전두환 정권을 지탱하는 데 있어 중요한 미국이 태도가 달라졌다. 미국은 대통령 친서를 통해 민주화 운동 세력과의 대화 기조 유지를 강하게 요구했다. 그 안에는 정치범 석방, 폭력적인 시위 진압 자제, 야당과의 대화 등이 포함됐다. 또한, 전두환 정권의 가장 큰 치적이었던 1988년 올림픽 개최의 불확실성 또한 부담이었다.

실제 국내 정세 악화 속에 올림픽 개최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대체 후보들이 거론되기도 했다. 여기에 이전과 달리 군 내부의 동요도 감지되고 있었다. 계엄령을 강행할 경우 일부 군이 이에 따르지 않을 수 있었고 또 다른 쿠데타 가능성도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군의 동요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강경책을 미루고 대화를 모색했다.

6월 22일 전두환은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영수회담에 합의했고 6월 24일 영수회담이 성사됐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 요구 수용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전두환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정치적 합의는 실패로 끝났고 민주화 항쟁은 6.26 평화대행진으로 절정으로 향했다.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그들에게 크게 불리해진 대. 내외적 여건 속에 더는 힘으로 민주화 요구를 누를 수 없었다. 이는 6월 29일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 대표이자 대선후보인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노태우의 6.29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 요구의 대폭적인 수용을 그 골자로 했다. 노태우가 이를 발표했지만,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다시 거꾸로 흘렀던 민주주의의 물결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6.29 선언은 민주화 세력의 모든 요구를 다 담지는 못했다. 이후 개헌이 이루어지고 5년 단임제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이 이루어졌지만, 민주주의 가치를 모두 담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물줄기를 다시 흘러가게 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도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7월 5일 그가 그토록 원했던 국민들의 승리 함성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7월 9일 그의 장례는 전 국민의 애도 속에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는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고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는 피격 순간 외로웠지만, 생의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다. 그의 발자취는 이후 이한열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기념관을 통해 계속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기념관에 전시된 피격 당시 입고 있었던 그의 옷과 낡은 운동화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박종철과 이한열 두 청년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다시 선 민주주의는 그 결과로 탄생한 87년 개헌된 헌법을 기초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87년 체제로 불리는 우리 민주주의는 군의 정치개입이 사라지고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더 강하게 발전되어 왔다. 민주주의 후퇴 위기도  있었다.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6.29 선언의 당사자인 노태우는 독재 정권의 후예라는 이미지를 벗고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단숨에 지명도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했다. 그 사이 야권은 민주 정권 수립이라는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고 대선에서 노태우의 당선을 지켜봐야 했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집권을 위해 군사독재 세력과 손잡으면서 그 세력들을 역사의 전면에 계속 남도록 했다.

또한, 과거 군사독재 시대의 유산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고 그 세력들 중 상당수는 사회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세력들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아직 목격하고 있다. 남북 분단의 현실을 악용한 철 지난 색깔론 중요한 정치 수단으로 삼는 세력이 상존하고 있다. 고질적인 악습인 지역주의의 망령도 여전하다. 자유 민주주주의 근간인 다양성 무시하는 극단의 사고가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 정치권은 아직도 정책을 바탕으로 한 토론과 협상, 합의를 도출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았다. 민주주의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척결 실패, 군사독재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결과다. 

그럼에도 우리 민주주의는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이력을 쌓았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세력들에 국민들은 계속 저항했고 그 시도를 무산시켰다. 4.19 혁명과 광주민주화 운동, 87년 민주 항쟁, 최근의 촛불 혁명까지 국민들은 그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역사는 중요한 인물들의 기록이라 하지만, 우리 현대사는 이름 없는 국민들이 주인공이었고 그들에 의해 쓰여 왔다. 박종철과 이한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공허해 보였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자신의 일임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2021년 현재 우리는 마음껏 권력자를 비판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그 통로도 다양하다. 언론들 역시 최대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는 87년 민주 항쟁의 유산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투표권 역시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그만큼 투표권은 너무나 소중하다. 이런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재조명한 87년 민주 항쟁과 그 안에 자리 잡은 이름, 박종철, 이한열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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