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한 젊은 대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도중 목숨을 잃었다. 그의 이름을 박종철, 그의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운동권에 소속된 학생이었고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선배의 소재를 추궁당했다. 그는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이어졌다. 박종철은 경찰이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고 가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결국, 박종철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로 그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이어진 6월 민주 항쟁과 6.29 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민주화 여정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까지 절대 무너질 것 같았던 전두환의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는 데 있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여정을 살피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심도 있게 이야기했다.
이 사건은 배경은 전두환 정권의 공안통치가 강화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신군부 세력이 중심이 된 전두환 정권은 12. 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초 헌법적 기관인 국보위 체제를 거치며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두환은 선거를 거치긴 했지만, 과거 유신시대 체육관 선거를 재현하는 신군부에 협력하는 대의원들에 의한 간선제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애초부터 지유 민주주의를 부정한 전두환 정권은 정당성과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었다. 이에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와 저항이 뒤따랐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한 철권통치로 반대를 힘으로 제압했고 아간 통행금지 해제와 3S 정책으로 대표되는 우민화 정책으로 일반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웠다. 또한, 아시안게임, 올림픽 유치를 통해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멀어지게 하도록 했다. 이런 정권의 노력 아닌 노력에도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7년 임기를 끝내고 사실상의 상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그가 세운 민정당의 장기 집권을 유지하려 했던 전두환으로서는 민주화 요구와 이를 위한 민주화 운동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국가 정보기관인 안기부, 군 정보기관, 경찰과 검찰의 공안부를 강화하며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해 강력하게 탄압했다. 그러면서 그 세력들을 좌경 용공 세력으로 몰아갔다. 이는 정권의 그들에 대한 탄압의 정당성을 만들고 일반 국민들과의 거리를 멀게 하려는 의도였다. 언론에서도 민주화 시위에 대한 보도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기 전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 있었던 민주화 투쟁을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연 대학생들에 대해 정권은 자경, 용공세력으로 규정하며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1,525명이 연행되고 그중 1,288명이 구속되는 건국대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그와 비슷한 시점에 정권은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과 그에 따른 수공 위험을 대대적으로 알리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했다. 관련 보도는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이와 관련한 규탄대회가 곳곳에 일어났다. 그 결과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에 대응하는 대응 댐인 평화의 댐 건설이 이루어졌고 이에 막대한 국민 성금이 모여졌다. 훗날 북한의 수공 위협은 크게 과장된 것으로 판명 났고 국민 성금 상당수가 유영된 것이 확인되면서 중요한 북풍 조작 사건으로 남아있다.
강력한 공안정국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정권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와해시키려 했다. 장기 집권을 위해 그들에게는 필요한 일이었다. 대통령의 의지는 공안 기관에 전달됐고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으로 이어졌다. 박종철의 죽음은 이런 심화된 공안정국 속 어떻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그만큼 공안 당국은 민주화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당연히 무리한 수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전부터 만연해있었던 고문의 강도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주역에서 중견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고 김근태 전 의원은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공안 당국에 체포된 이후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포함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후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았고 그로 인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고문으로 고통받았던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515화였다. 박종철 역시 그곳 509호실에서 5명의 조사관들에게 고문을 받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 시절 내무의 요청을 받고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 할 수 있는 김수근에 의해 건축됐다. 김수근은 건축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가 지은 건물은 지금도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지은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외부의 시선에 완벽히 차단된 시설과 각 조사실의 창문은 피조사자들의 추신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창문이 있었다. 각각의 조사실은 엇갈리게 만들어져 각자의 방에서 다른 방을 보기 어려웠다.
1층에서 조사실이 있는 5층으로 곧바로 향하는 나선형의 계단은 처음 그곳에 간 이들에게 공간 감각을 잃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낮에도 작은 빛만이 새어 들어오는 조사실은 방음시설이 되어 있지만, 조사실에서 나는 피 고문자의 신음 소리가 옆방으로 음산하게 들리도록 되어 있었다. 또 하나 1980년대 이발 가정집에서도 많이 않았던 욕조가 있었는데 그 욕조는 좁고 깊었다. 즉,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배려한 것이 아닌 고문을 고려한 설계였다. 그곳에서 무수히 많은 공안 사건의 피의자들이 고통을 받았다. 박종철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곳에는 소위 고문 기술자로 불리는 조사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사람이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해 필요한 정보를 얻었고 심지어 거짓 자백도 이끌어 내는 이들이었다. 공안 조직에서 그들은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마치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일본 경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당연히 그곳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박종철의 공포와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문 기술자들의 의도와 달리 박종철이 고문 도중 사망하자 일대 혼란이 발생했다. 그들 매뉴얼에는 없었던 돌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경찰은 인근 대학병원에 요청해 응급조치를 위한 의사를 요청했다. 이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온전히 세상에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만약, 그들이 이를 상부에 먼저 알렸다면 그 사건은 독재 정권 시절 무수히 발생했던 의문사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현장을 찾은 의사는 곧바로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직감했다. 그는 인공호홉 등을 실시했지만, 이미 박종철의 심장은 되살아나지 않았고 담당 의사는 사망을 선고했다. 그는 이후 박종철 사망이 외력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언론에 이를 알렸고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도록 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없었다면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은 그대로 묻힐 수 있었다. 최초 박종철의 검안했던 의사는 이후 공안 당국의 회유, 협박을 받았지만, 정의를 위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박종철의 시신은 병원으로 병원으로 향하지 않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거쳤다. 부검 과정에서 부검의는 질식사에 대한 명확한 소견을 기록에 남겼고 이는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구체적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이 과정도 극적이었다. 당시 사건을 접수한 검찰의 부장검사는 시신 보존 명령을 내렸고 부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이런 결정이 없었다면 박종철의 시신은 곧바로 화장되어 그 증거가 인멸될 수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 보도통제를 받고 있던 언론들이 이를 뚫고 보도를 이어갔고 국민들이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당연히 정권에 대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경찰 치안감은 기자회견을 통해 조사 과정에서 탁 치니 억하고 사망했다는 발표를 하면서 국민적 분노를 도 일으켰다. 당시 집권세력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나 상황 인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거짓 해명으로 더 악화된 민심과 진실에 대한 언론 보도가 이어지가 당국은 사건의 축소 은폐를 시도했다. 2명의 경찰이 고문을 했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이 사망했다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이는 수사 기소권이 있는 검찰 역시 함께하며 은폐조작에 가담했다. 이렇게 2명의 경찰이 행한 범죄로 종결될 것 같았던 사건은 극적인 반전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당시 고문치사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된 2명의 경찰과 경찰 당국의 대화 등을 인지한 교도관이 당국의 사건 축소 은폐 시도를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은 같은 감옥에 수감 중이던 해직기자 출신의 재애 운동가 이보영에게 전달했다. 이부영은 그 사실을 글로 적어 다른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전달했고 그 사실은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에 까지 전달됐다. 이 사실은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추도 미사에서 세상에 폭로되었고 민심은 다시 요동쳤다.
이제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민심 수습책을 내놓아야 했다. 고문치사 사선과 관련한 경찰 5명과 조작 은폐를 지시한 경찰 간부들이 형사처분을 받았다. 여기에 내각 개편이 뒤따랐다. 국무총리를 비롯해 중요 장관들이 경질됐다. 그중에는 전두환의 최 측근 인사였던 장세동 안기부장도 포함됐다. 그는 영남권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는 군 사조직 하나회에서 이례적으로 호남 출신으로 자리했고 12.12 군사 반란에도 가담했다. 하나회 시절부터 전두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그는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일했고 안기부장 자리에 오르며 정권의 실세 중 실세로 올라섰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충성을 잃지 않았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에 충성했던 중정부장 김형욱, 이후락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5공화국의 각종 비리와 부패와 관련한 청문회에서 변함없는 충성심을 과시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전두환에 대한 충성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 절대 권력자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는 안기부장 시절에도 각종 용공 사건을 조작하거나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계획하고 각종 공작을 지휘했다. 하지만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시점에 장세동 역시 권력의 지근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두환의 최 측근 인사마저 물러나게 할 정도로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저항은 강력했다. 정권에 대한 분노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혁명으로 이어졌다.
박종철 추도식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당시는 스마트폰이나 SNS 등 소통 수단이 절대 부족했고 언론 보도마저 통제되는 상황이었다. 서슬 퍼런 공안정국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박종철의 시신은 부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되어 임진강에 그 유해가 뿌려졌고 그의 49재도 치러졌지만, 정권의 감시 속에 가족들은 그 슬픔을 타인들과 나눌 수도 없었다.
그런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하는 건 그런 상황에서 많은 인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뜨거웠다. 그 열기는 식지 않았고 전두환 정권의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도록 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부터 시작한 민주화를 위한 여정이 큰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당시 21살의 어린 학생의 희생이 불러온 엄청난 결과였다.
이렇게 역사의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었다. 그의 희생은 민주주주의 발전의 큰 씨앗이 되었다.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의 억울한 죽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유가족들은 깊은 슬픔 속에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사건에 가담한 경찰들은 대부분 얼마 안가 석방되어 그 죗값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또한, 사건 초기 축소 은폐 수사를 했던 검사들은 최근까지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과 대법관으로 영전하며 법조인으로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박종철의 원통함은 완전히 풀렸다 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외에도 과거 공안사건을 주도했던 인물들 상당수는 여전히 법조계와 정치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들은 억압했던 세력과 그들에 부역했던 이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기득권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 중 그들의 과거 과오에 대해 진심이 담긴 사죄와 반성을 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듣기 어렵다. 언제든 민주주의의 역사가 후퇴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실제 우리는 얼마 전 그런 시도를 촛불 혁명으로 저지한 경험이 있다.
즉, 국민들의 의지와 힘이 민주주의 역사의 발전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의 민주주의 여정에서 4.19 혁명이 있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 얼마 전 촛불 혁명이 있었다. 촛불 혁명은 헌정을 유지하고 제도의 틀 안에서 국정 농단 세력을 심판하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역시 그랬다. 그 희생이 있어 우리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할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근 개봉한 영하 1987에서도 상세하게 다뤄졌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자유 민주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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