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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제5공화국 시대의 궤적은 따라가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305회에서는 우리 정치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관계를 다시 조명했다. 이 과정에서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에 이어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의 막전 막후 이야기도 함께 다뤘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영어 약자인 YS, DJ라는 애칭으로 자주 불릴 만큼 긴 세월 정치 지도자로 그 자리를 지켰고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와 80년대 독재세력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구심점이지 동반자이기도 했고 정치적 라이벌로 치열하게 대결하기도 했다. 두 정치 지도자는 14대 김영삼, 15대 김대중 대통령까지 차례로 대통령에 자리에 오르며 각각 절정을 맞이했다. 정치인 김영삼, 김대중의 남긴 유산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 정치 곳곳에 남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크게 대조적인 정치인이었다. 김영삼은 경남 거제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밟고 올라온 정치인이었다. 이미 26세에 김영삼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돼 비교적 순탄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특유의 직설적 화법과 직관적이면서 뛰어난 정치 감각이 있었다.

이와 달리 김대중은 전남의 하의도에서 테어나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입학할 당시 국내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의 목포상고에 수석입학할 정도의 뛰어난 학업능력이 있었다. 이후 그는 사업가의 길을 걷다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논리적인 화법에 깊은 사고를 하는 정치인이었다. 정치인 김대중의 길을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수차례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5번째 도전만에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얼마 안가 일어난 5.16 군사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으로 일할 수 없었다. 

 



정치 낭인의 길을 걷던 김대중은 당시 여성 운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이희호 여사와 결혼하면서 안정을 찾았고 정치인 김대중으로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희호 여사는 재혼에 정치인으로 큰 인지도도 없었던 김대중을 만나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는 당시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결정을 했고 그의 배우자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함께 했다. 

이렇게 다른 시작이었지만, 이들은 1970년대 독재로 향하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야당에서 점점 그 입지를 넓혀갔다. 이들은 야당의 40대 젊은 국회의원으로 1971년 제7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 40대 기수론의 중심에 서며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었다. 라이벌 구도의 시작이었다. 그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길을 연 이후 선거로 그의 장기집권을 막아야 하는 야당에는 매우 중요했다. 

이 시점에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이라는 이슈를 선점하며 대선 후보 경선에서 앞서나갔다. 이에 맞선 김대중 역시 유망한 젊은 정치인이었지만, 당내 세력이 김영삼에 미치지 못했다. 김영삼의 대선후보 선출은 기정사실 같아 보였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1차 대의원 투표에서 김영삼은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했다. 22위 김대중과의 결선 투표가 있었고 김대중은 초발 열세를 뒤집고 역전에 성공했다. 정치사에 남을 역전극이었다. 이에 김대중은 야당의 대선후보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여갔다. 아쉬운 패배를 당한 김영삼은 결과 승복하며 선거운동 기간 내내 선거운동을 도왔다. 아름다운 승자와 패자의 모습이었다. 

김대중을 중심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맞선 야당은 관건과 금권, 심지어 지역감정까지 선거에 활용한 박정희 정권에 맞서 온 힘을 다했지만, 아쉬운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얼마 안가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집권의 길을 걸었다. 이에 야당은 강하게 저항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전국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그 중심에 있었다. 당연의 정권의 탄압이 뒤따랐다. 김영삼은 수차례 가택 연금과 함께 사상 초유의 야당 총재의 국회의원 제명까지 당했고 김대중은 수차례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런 시련은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차세대 지도자로의 입지를 더 단단하게 했다. 

1979년 10.26 이후 박정희 유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다시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1980년 이들은 야권의 대선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다시 충돌했다. 영남과 호남이라는 강력한 지역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중적인 인지도와 지지를 얻고 있는 두 정치 거물의 단일화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70년 대선후보 경선에 이어 또 다른 대결이 예상됐다. 

이들이 차기 권력이라는 중요한 목표에 집착하면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을 위협을 대비하지 못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에 이은 사실상의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기존 정치인들의 활동을 모두 금지시켰다. 김영삼과 김대중 역시 신군부의 탄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김영삼은 강요된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가택 연금에 들어갔고 김대중은 조작된 내린 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되는 처지가 됐다. 이후 김대중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미국으로 추방되어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두 정치 지도자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1980년 서울의 봄은 또 다른 군사독재의 한파로 뒤덮이고 말았다. 

하지만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그대로 식지 않았다.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이 지속됐고 김영삼과 김대중 역시 그들의 방법으로 정권에 저항했다.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화 요구를 하며 23일간에 걸친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전두환 정권은 회유책을 제시하며 그의 단식 중단을 종용했지만, 그는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강제 입원을 통해 단식을 끝낼 수 있었다. 당시 언론에 대한 보도통제로 그의 단식은 보도를 통해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음으로 양으로 그 소식이 퍼져나갔다.

미국에 있던 김대중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고 김대중은 현지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며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에 동참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대립했던 이들이 민주화라는 대의 앞에 손을 잡은 순간이었다. 이들이 하나가 되면서 민주화 운동을 더 큰 힘을 얻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다시 하나가 되면서 야권은 1984년 민주화 추진 협의회 민추협을 구성하며 이를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민추협은 이후 선명 야당을 표방한 신민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1985년 2월 8일 미국 망명생활을 하던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야권에는 큰 힘이 더해졌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강제 망명길에 올랐던 김대중의 귀환은 정권에 큰 부담이었다. 김대중으로서는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의 신변안전을 우려한 미국의 정관계 인사들 수십 명이 함께 입국하기도 했다. 김대중의 귀국과 김영삼이 함께 하는 신민당은 창당 한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도 2.12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며 더 큰 힘을 얻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함께 하는 신민당은 재야세력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더 강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결국, 민주화 운동의 힘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조치를 이끌어내는 1987년 6.29 선언으로 이어지며 민주주의 발전의 큰 진전을 이뤄냈다. 이에 국민들은 민주 정권 수립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제 13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 정부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반하는 일을 하고 말았다. 국민들은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를 희망했지만, 이들은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각각 대선에 출마했다. 13대 대선은 신군부 세력의 후신은 민정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구 유신세력의 후신인 공화당의 김종필까지 4파전으로 전개됐다.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야권의 승리가 확실했던 선거였지만, 야권의 불열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자신의 전략대로 선거전이 이어지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하나로 뭉치지 못한 야권의 상황은 노태우에게 큰 기회였다. 전두환 정권 역시 그 틈을 파고들었다. 막대한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이 있었고 전두환이 김영삼, 김대중을 각각 격려하며 독자 출마를 위한 공작을 했다는 설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민주 정권의 수립을 막고 싶은 마음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전두환 정권의 의도 대로였다. 노태우는 36%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영삼은 28%, 김대중은 27%를 득표했다. 이런 선거 결과에 국민들은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선거 과정에서 김영삼은 경남, 김대중은 호남, 노태는 경북의 지역 정서를 파고들었고 과열된 선거 양상은 지역감정의 골을 더 깊게 했다. 이런 후진적인 지역감정은 지금고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이슈가 되는 실정이다. 

이렇게 민주 정권 수립의 기회를 놓친 김영삼과 김대중은 당시는 물론이고 역사에서도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강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기도 했고 자신을 따르는 세력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민주화의 결과물을 민주 정권 수립으로 완성하지 못했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더는 협력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정치적 라이벌도 치열한 대결을 이어갔다. 집권을 위해 김영삼은 과거 그의 투쟁 상대였던 민정당과 공화당의 과거 군사정권과 손을 잡는 3당 합당을 감행하며 큰 아쉬움을 남겼다. 김대중 역시 지역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유신세력의 중심을 이룬 김종필과 공화당과 손을 잡았다. 이런 모습은 정치가 살아있는 생물임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이러면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라는 이미지에 노회한 정치인으로 변해갔다. 이는 이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 모두 집권의 꿈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쉬움을 함께 남기고 말았다.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이는 큰 업적이다. 하지만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비난이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 정권 수립의 기회를 놓친 장면과 역사에서 청산되어야 할 구세력과 손을 잡았던 부분은 결코 역사적으로 부정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이 독보적인 정치 지도자로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면서 정치발전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에 역사적 평가를 하기는 다소 이른 감이 있다. 더 시간이 흘러야 하고 이후 시대적 상황에 따라 평가를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건 현대사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YS, DJ 모두 그 누구보다 국민에 익숙했고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먼 훗날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인물을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할지 궁금하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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