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역사저널 그날 316회] 위기의 웅진시대 백제 다시 일으킨 중흥 군주, 무령왕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6. 19. 07:10

본문

728x90
반응형

1971년 우리 고고학계를 흥분시키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고대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백제의 역사를 눈앞에서 살필 수 있는 고분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그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이었다. 무령왕릉은 우리 역사에서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몇 안 되는 왕이고 이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백제의 역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 연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가치가 큰 일이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무령왕릉과 관련한 역사적 의의, 당시 시대적 상황 등을 살펴봤다.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분의 발견은 공주 송산리 일대 백제 고분군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부에 의해 우연히 이루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꿈에서 돼지 형상이 동물이 자시에게 달려드는 기이한 꿈을 꿨다고 전해진다. 

무령왕릉은 무덤 안 묘지석을 통해 그 주인과 그의 생존 기간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무령왕은 묘비석애 따르면 501년 즉위해 523년 승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비석에서 그는 위 진 남북조 시대 중국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의 책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 강 왕조와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는 건 일반적이긴 했지만, 중국에 종속되기보다는 정략적인 면이 강했다. 이런 중국 남조 국가와의 교류는 그의 무령왕릉의 무덤 양식을 한반도에서 발굴된 왕릉과 크게 다른 벽돌 양식으로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무령왕릉이 더 유명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큰 무령왕릉이 더 놀라운 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약탈과 다름없는 도굴 피해를 입었던 여타 백제 고분들과 달리 무령왕릉은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발굴 당시 그 입구는 단단히 폐쇄석으로 막혀 있었고 도굴의 흔적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각 지역의 고분들은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심각한 도굴 피해를 입었다. 당연히 그 안에 있던 각종 유물들도 암거래 등을 통해 사라졌고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무령왕릉이 있었던 공주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기적적으로 그 피해를 면했고 세상에 그 모습을 알렸다. 

 



이런 무령왕릉이지만, 1971년 발굴은 그 역사적 가치와 달리 최악의 발굴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우리 고고학은 고분 발굴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부족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학자들로부터 관련 기술을 전수받긴 했지만, 무령왕릉과 같은 대규모 발굴은 처음이었다. 발굴에 우선 필요한 보안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장 보존도 미흡했다. 무려 1500여 년의 시간이 흘러 맞이한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되고 도난당하는 일도 있었다. 학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차근차근 일대를 수습하고 발굴해야 했지만, 발굴 작업은 17시간 만에 속성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당시 발굴 참가자들은 도굴보다 못한 발굴로 기억하며 하며 훗날 그날의 일을 크게 후회했다. 이로 인해 무령왕릉과 관련한 각종 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없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의 교훈은 문화재 발굴과 보존과 관련한 우리의 역량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과정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화려했던 백제문화를 증명해 주었다. 화려한 금제 장식품과 함께 당시 생활상을 알려주는 각종 부장품까지 수많은 유물이 있었다. 그중 12점은 국보로 지정됐다. 그 유물을 통해 백제가 활발히 대외 교류를 했고 높은 수준은 문화를 향유한 국가였음을 밝혀졌다. 또한, 나당 연합군에 멸망된 이후 기록이 부실하고 왜곡된 부분이 많았던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다. 이는 무령왕의 존재를 더 부각하는 일이 됐다. 

무령왕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건 그의 치세가 벽제가 안팎으로 큰 위기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면서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렸다. 백제는 그들의 터전이었던 한강을 잃었고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에 수도는 웅진으로 옮겨야 했다.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으로 고구려의 남하는 막는 한편 무너진 나라를 되살려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하지만 백제는 개로왕의 피살 이후 심각한 지도층의 내분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왕이 피살되는 일이 발생했다. 국가 위기 상황에 내분이 겹치면서 백제의 부흥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무령왕은 혼란 속에 있던 벽제의 구원자였다. 무령왕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내치를 안정시켰고 활발한 대외 교류와 무역으로 나라는 부강하게 만들었다. 백제의 대외 교류는 중국 남북조를 넘어 왜와 동남아까지 그 범위가 컸다. 무령왕릉의 화려하면서 독특한 구조와 유물들, 일본서기에 백제를 통해 동남아 지역 등에서 구입할 수 있는 진기한 물품들이 전해졌다는 기록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무령왕이 통치했던 6세기 초반 백제는 움츠러들었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고구려에 대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기도 했다. 일부 역사서 등에는 무령왕 시기 백제가 한강유역까지 그 세력을 다시 회복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만큼 무령왕의 백제는 고구려 남하에 전전 긍긍하던 나라가 아니었다. 

백제를 다시 일으킨 무령왕은 출생부터 남달랐다. 그의 출생지는 일본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도 역사서마다 혼선이 있다. 무령왕은 한성 백제의 마지막 왕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의 동생 곤지라는 설이 공존하고 있다. 그의 바로 앞 왕이었던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지만, 무령왕릉 발굴 과저애서 나온 묘지석 등의 기록을 살피며 그 연대가 맞지 않는다. 그만큼 당시 백제의 왕권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앞서 언급된 인물  중 곤지는 개로왕이 고구려와의 전쟁 중 왜의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파견한 인물이었다. 일본서기에는 곤지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임신중이었던 개로왕의 왕비와 함께 가기를 청하였고 왜로 가기 전 일본의 어느 섬에서 그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무령왕이 태어난 섬에는 그를 모시는 사당과 유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무령왕은 공식적으로 개로왕의 아들임을 천명했다. 백제가 강성했던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 개로왕의 아들로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익사 미륵사지 사리 보관함 유물



이렇게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무령왕이지만, 그 이면에는 백제와 왜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백제는 중국과 왜의 문화 교류를 하는 통로로서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백제를 통해 전해진 선진 문물은 고대 일본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일본서기는 백제와의 교류를 백제의 조공 등으로 그들이 우위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일본 고대 문화의 최정점이 있었던 아스카 문화가 7세기 경 융성했다는 점에서 백제의 영향력 아래 왜가 있다는 게 더 설득력 있다. 

백제는 왜와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의 압박으로 인해 막힌 유지로의 세력 확장 대신 바다를 통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잇따른 전쟁에서 왜의 군사는 일종의 용병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실제 왜는 백제에 많은 물자와 병력을 파견했고 연합하여 싸웠다. 그만큼 백제와 왜는 가까운 관계였다. 일본에서 출생한 무령왕은 왜와의 관계가 있어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무령왕의 모습은 백제가 큰 위기를 겪었던 웅진시대에 대한 평가를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웅진 시대에도 백제는 나라의 힘을 키웠고 해양 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무령왕은 정치적인 안정을 통해 발전의 속도를 끌어올리고 나라를 한층 더 부강하게 만들었다. 무령왕의 치세는 그의 아들 성왕으로 이어져 백제가 웅진보다 넓은 지형의 사비로 천도하고 나라의 부흥을 이루는 발판이 됐다. 

하지만 백제는 여전히 잊힌 왕국이다. 그 사료들도 부족하고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는 아픔이 있었다. 무령왕릉의 발견이 없었다면 백제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망국으로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연구가 이루어지고 백제 문화의 우수성 등이 알려지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백제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 점에서 무령왕은 백제와 우리 고대 역사를 세상에 알린 왕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 : 프로그램 / 지후니,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

  • 프로필 사진
    2021.06.19 08:05 신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감하고 갑니다.^^
  • 프로필 사진
    2021.06.19 10:42 신고
    생각보다 백제의 사료가 많이 적군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행복한 주말되세요^^
  • 프로필 사진
    2021.06.19 13:11 신고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곳인데 발굴에 있어서 엉망으로 진행했군요.
    도난까지 당할 정도이면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만합니다.
    안타깝네요.
  • 프로필 사진
    2021.06.19 14:41 신고
    역사저널그날 저도 즐겨보는 프로그램인데요 공부할부분이 많더라구요
  • 프로필 사진
    2021.06.19 19:31 신고
    백제 무령왕에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겠군요
    무너진 고대시대가 좀 더 자세히 알려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프로필 사진
    2021.06.19 23:54 신고
    역사공부 잘보고 배우고 갑니다
  • 프로필 사진
    2021.06.20 09:34 신고
    당시 지식과 기술이 없었다 하더라도
    발굴을 좀 더 진지하고 소중하게 했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백제에 대한 연구가 더욱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백제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프로필 사진
    2021.06.20 12:32 신고
    사리 보관함이 정말 멋지네 덕분에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