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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 과정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1, 2회에서 이성계는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지만, 왕명을 어기고 회군을 결정했다. 명백한 항명이고 반란이었다. 이 순간 이성계의 군대는 역적이 됐다. 이성계는 오랜 세월 전장에서 함께 했던 최영과 적으로 맞서야 했다. 
 
이성계는 회군의 명분으로 백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작은 나라인 고려가 중국의 신흥 통일 국가인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건 승산이 없다고 그는 여겼다. 남쪽 해안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는 왜구들의 침략과 전쟁에 부적합한 장마철의 기후조건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이성계는 무의미한 전쟁에 군사들은 희생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고려 최고의 무장으로 신망을 얻고 있고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얻은 그는 수 많은 전쟁의 경험으로 토대로 전쟁의 승패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의 실패는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하기도 하지만, 고려의 변방인 동북면의 무장에서 중장 정계의 실력자로 올라선 그의 정치적 입지를 흔드는 일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가문에도 큰 위기가 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자신과 나라, 가문을 위해 결심했다. 그렇게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말머리를 돌렸다. 최영과 우왕은 결사 항전했지만, 중과부족이었다. 그렇게 이성계는 최고 권력자로 올라섰다. 이성계에 패한 우왕과 최영은 귀양길에 올랐다. 이제 이성계는 마음만 먹는다면 왕위에도 오를 수 있는 위치였다.
 
이는 이성계 가문에도 큰 영향을 줬다. 이성계의 급부상은 그들 가문에게는 큰 기회이기도 했지만, 고려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은 그들은 역적의 집안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방원은 이를 충분히 인지했고 위화도 이성계의 왕의 등극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는게 가문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 확신했다.

 

 

 
그는 이성계의 나라를 만드는 일에 적극 동참하려 했다. 이성계는 자신의 자식들이 권력투쟁에 함께 하는 걸 주저했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원은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장원급제자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 자체로도 큰 능력이 있었지만, 관료조직에서 일하면서 국정 운영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높고 이성계의 정치적 기반이 된 신진사대부 세력과 자신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이방원이 할 수 있었다.

이성계로서는 가문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고 이방원은 적임자였다. 하지만 한편으로서는 젊은 혈기의 이방원이 지나친 의욕으로 폭주할 수 있음을 걱정했다. 또 하나 최고 권력에 자신이 다가설수록 형제들간 갈등과 권력 투쟁이 발생할수도 있었다. 이는 가족간의 우애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성계에게도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실제 이성계과 신진사대부의 권력장악 움직임에 장남인 이방우는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방우는 고려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고 온건파 신진 사대부 세력인 정몽주와 이색 등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 회군 이후 아버지의 모습이 성리학의 중요한 덕목인 충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겼고 강한 반감을 보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이성계 세력의 움직임에 반발했고 이는 왕조교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이에 적극 참여하려는 이방원과의 갈등으로 연결됐다. 그 누구보다 우애가 깊던 형제간이 정치적 견해 차이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권력 상층부로 향하는 이방원에 대한 여타 형제들의 시기와 견제도 점점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미래 권력투쟁을 예고하는 일이었고 이성계가 경계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을 향해 내디딘 발걸음을 멈출수 없었다. 이방원도 이에 동참했다. 이성계 세력은 왕조 교체의 명분을 얻어야 했고 민심을 얻는게 시급했다. 우왕을 중심으로 한 구세력의 반발은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이 쉽게 제압할 수 있지만, 이는 민심 이반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성계 세력은 속고 조절을 택했지만, 우왕은 강하게 저항했다. 역사서에서도 우왕은 실제로 환관 등 친위 부대를 동원해 이성계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반란 세력인 이성계 세력과 우왕은 공존할 수 없었다.
 
결국, 이성계 세력은 최영에 이어 우왕을 폐하고 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워 여론의 비난을 피해가려 했다. 우왕에게는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요동정벌을 추진했다는 폐위의 명분이 있었다. 또한 우왕은 왕위에 있으면서 각종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조선 건국 세력이 주도한 역사서라 하지만, 우왕의 폐위에 대해서는 온건파 사대부들도 일정 공감대가 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우왕은 왕위 복귀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세를 규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전히 고려 조정에는 우왕과 최영이 임명한 관료들이자리하고 있었다.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이성계 세력이 반격을 받을 수 있었다. 우왕은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국정 장악을 위해 우왕은 존재하면 안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아들 창왕이 우왕을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권력의 미래에 대한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왕과 창왕의 제거를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이 그 해법을 찾는 것으로 묘사됐다. 이방원은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에 대한 출생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우왕은 과거 권력의 실세였던 신돈이 소개한 여인과 공민왕 사이의 아이였지만, 세간에는 신돈의 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민왕은 어린 우왕을 궁궐로 데리고 와 후계자로 삼았다.
 
공민왕은 자신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더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한 이후 큰 충격으로 국정을 소홀히 하고 정신적으로 크게 피폐한 삶을 살았다. 그 시점에 신돈이 등장했고 그가 소개한 여인과 사이에 아들이 생겨났다. 공민왕은 이후에도 남성에 더 애정을 느끼는 동성애적 성향을 보였다. 이런 공민왕이 궁이 아닌 밖에서 아이를 얻었다는 건 의문스러운 일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근거도 미약했다. 반대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근거도 없었다. 그렇게 우왕의 출생에 대한 의문은 소문으로 끝나는 듯 보엿다.
 
하지만 비정한 정치는 우왕의 출생과 관련한 의혹을 다시 전면으로 등장하개 했다. 이성계 세력은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고 가짜왕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성계 세력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이성계 세력은 가짜왕을 없애고 진짜왕을 세운다는 폐가 입진론으로 우왕의 제거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는 그의 아들 창왕의 폐위도 함께해여 하는 일이었다. 우왕은 이성계 암살을 시도하는 등 저항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가짜왕이라는 오명을 쓰고 몇 차례 유배지를 옮긴 끝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창왕 역시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축출됐고 10살의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우왕과 창왕은 죽음 후에도 신우와 신창으로 불리며 조선 건국 세력에 철저히 배척당했다. 왕으로서의 시호도 받지 못해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 건국 세력으로서는 우웅과 창왕의 전통성을 철저히 부정함으로 인해 새로운 왕조을 여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그렇게 고려말 조선초 왕조 교체기의 정치는 비정했다. 권력 투쟁에서 밀린 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왕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만큼 고려 왕실의 권위는 추락했고 세력 대결의 흐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방원은 이성계 가문을 대표하는 권력의 실세로 점점 입지를 다졌다.
 
이성계 세력은 이성계과 사돈 관계에 있는 왕족인 공양왕을 추대해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왕이라는 칭호는 받았지만, 실권은 이성계 세력에 있었고 왕의 권위는 가지지 못했다. 공양왕은 이성계가 왕위를 향해 가는 과정에 징검다리 정도의 역할이었다. 공양왕으로서는 고려 왕조의 멸망을 함께 하는 군주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고 왕위에 오르길 거부했지만, 강권에 의해 원하지 않는 자리에 올랐다.
 
힘없는 허수아비 왕이 될 거라는 예상을 깨고 공양왕은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고위직에 온건파 신진사대부 세력의 수장격인 이색 등을 등용하며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고 이성계 세력을 견재하려 했다. 이는 이성계 세력에는 또 다른 위협이었다. 공양왕은 고려 왕실의 전통을 이어가는 인물로 전통성을 확보하고 있고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마침 민심의 흐름도 이성계에게 고개를 돌릴 조짐을 보였다. 우왕과 창왕의 사형집행은 이성계조차 실행을 미루는 일이었다. 급한 진행은 위화도회군 이후 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더 심화시킬수 있었다. 실제 두루 큰 신망을 얻고 있었던 최영 장군의 실각과 귀향과정에서 민심의 흔들림을 감지한 이성계 세력이었다. 그들은 속도 조절을 하려 했다. 하지만 공양왕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은 이성계 세력이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됐다.
 
이방원은 막후에서 공양왕에 경고를 하며 그를 압박했다. 이방원의 위협에 공양왕은 그의 의지를 흔들었다. 공양왕은 이색 등 그가 등용한 인사들을 파직하고 우왕과 창왕의 참살을 명했다. 이방원으로서는 이런 일련의 일들이 왕명으로 이루어진다면 반발을 덜할 것으로 여겼지만, 정국을 파악하고 있는 여론은 그 의도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성계에 대한 악하된 여론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의 또 다른 명분으로 백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백성의 삶을 어렵게 하는 전쟁을 피하고 각종 부조리와 부정부패 얼룩진 고려를 개혁하겠다는게 위화도 회군, 구데타의 중요한 이유였다. 힘으로 권력을 잡을수는 있지만, 일반 관료들과 백성들을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권력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이는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열는대 있어 동력을 잃게 하는 건 물론이고 이성계를 과거 무신정권 시대의 권력자에 머물게 할 수 있었다.

 

 


이성계 세력으로서는 민심을 수습할 방안이 필요했다. 힘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단기간에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고심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성계는 권력투쟁의 길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했다. 그는 돌연 동북면으로 떠나기를 결정했다.
 
그는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애서 발생하는 희생과 가족들간의 깊어지는 갈등, 과거와 다른 그에 대한 여론이 부담이었다. 그는 내심 힘이 아닌 여론의 지지지속에 왕위를 차지하고 싶었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정국이 흘러갔다.
 
이런 이성계의 결정은 자신들 세력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들 세력의 구심점이 사라지는 건 권력투쟁에서 큰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었다. 새 왕조를 열려하는 강경파 신진사대부들의 근간은 성리학적 세계관과 통치 시스템을 근거한 신진사대부와 이성계의 강력한 무력의 결합이었다. 그 중 하나만 없어도 그 세력은 와해될 수 있었다.
 
이성계의 동북면행은 이방원의 마음도 급하게 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를 하루라도 빨리 왕위에 올리는게 나라와 백성, 가문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로 인해 무리가 된다 해도 급진적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고 독단적인 행동을 했다. 하지만 그의 급한 마음과 혈기는 오히려 이성계 세력에 부담이 되고 말았다. 이방원은 후회되는 마음이 있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다시 새왕조를 위한 길을 다시 가야했다.
 
이방원 스스로 자신의 가문인 역적의 가문이라 했다. 그들이 역적이 안되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하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권 창출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이방원은 법적인 면에서 미숙함을 보였다. 젊은 혈기로는 목표에 이를 수 없음을 그는 알아가고 있다.

앞으로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보다 전략적이고 냉철하면서도 과감한 킹메이커로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 고비가 생길 수 있고 내부 세력과의 갈등도 생길 수 있다 이제는 정치적인 역량도 필요한 이방원이다. 앞으로 이방원이 조선 건국을 위한 정치 대결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 장면들을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하다.


사진 : 드라마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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