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회라 불리는 현대 사회지만, 특정 집단과 세력에 대한 혐오와 증오 그 들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뿌리 깊은 인종 차별도 그에 해당할 수 있는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젠더 갈등 역시 그 연장 선상이다. 사회적 강자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을 탄압하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를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권의 가치를 지향하는 집단 지성이 발휘되면서 이런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고 이를 활용하는 세력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양극화와 빈부 격차 심화, 경기 침체와 전쟁 등 국가적 위기 상황 발생 시 이를 악용해 해법을 모색하거나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는 시도는 여전히 존재하고 일부에서는 힘을 얻기도 한다. 이는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에 대한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런 혐오와 증오와 선동, 집단 광기에 의해 누군가에 대한 집단적 폭력과 살인이 일상을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다. 중세 유럽이 그랬다. 그리고 그 폭력의 주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녀로 불렸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녀를 악마화하고 많은 이들이 마녀로 몰려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마녀로 지목되는 순간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마녀사냥은 14세기 유럽에서 시작돼 17세기까지 지속됐다. 마녀사냥은 현재 추산 수십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고 그 대부분은 여성들이었다. 마녀사냥은 중세 유럽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마녀사냥 또는 마녀재판이라는 불리는 비인권적 행위가 일어났던 중세 유럽은 기독교적 가치가 일상을 지배하고 교회 그리고 모든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 사람들의 생활은 교회의 교리에 종속됐고 생활 전반이 통제됐다. 교황은 교회의 수장이기도 했지만, 절대 권력자이기도 하다.
각 나라의 왕들도 교황의 권위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직 민족의식이나 나라의 개념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 지역의 영주들은 독립적인 지위를 가졌고 왕위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교황에 맞서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왕은 교회의 수호자님을 자처하고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왕으로서의 귄위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를 모두 장악하고 세속화된 교회는 절대 권력을 부패한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줬다. 교회의 탐욕은 일반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했다. 교황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명목으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하며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일반 대중들 교회 내에서 부패한 교회를 대신한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일어났다.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알비파 교회가 대표적이었다.
이 교회는 기존 교회와 다른 교리 해석과 함께 세속적인 삶과 거리는 둔 청빈한 삶을 강조했다. 또한, 기존의 차별적 남녀 관계를 보다 평등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 교회가 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알비파 교회는 점점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교황과 기존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십자군 군대를 그들의 근거지 도시를 파견해 아비파 신자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도 있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죽은 자들이 이단 여부를 가려줄 것이라는 궤변으로 그들의 학살을 정당화했다.
이후 알비파를 포함한 기존 교회에 저항하거나 반발하는 이단자들 처벌하기 위한 종교재판소가 만들어졌고 종교재판이 상설화됐다. 이를 통해 반대파를 처벌하고 흔들리는 교회 권위를 세우려 했다. 이 종교재판을 주도하는 이들은 마녀도 재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녀는 애초 부정적 이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지역민들 사이에서 마녀는 아기를 낳는 데 도움을 주는 산파나 질병의 치료를 담당하는 제약사나 의사, 무속인의 역할을 했다.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었고 여러 순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는 이들은 악마와 결탁한 사악한 존재로 규정했고 사람들의 신앙심을 흔들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교황의 공감을 얻었다. 1318년 교황은 마녀를 종교재판의 대상으로 삼는 걸 허용했다. 마녀사냥이 승인됐다. 그 전해인 1317년 교황 암살 미수 사건에 교회의 고위 주교가 연루되면서 마녀사냥의 정당성이 더 힘을 얻었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됐다.
이 마녀사냥은 14세기를 지나며 전 유럽에서 일어났다. 당시 유럽은 14세기부터 17세기 기간 소 빙하기로 불리는 전 세계적인 소 빙하기 속에 놓여 있었고 기상이변이 지속되고 있었다. 식량 생산이 감소하고 대기근이 지속적올 발생했다. 많은 이들인 기아와 빈곤에 시달렸다.
여기에 전 유럽 인구의 2억 명을 사망하게 한 감염병인 흑사병이 창궐했다. 이런 심각한 악재가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사망하는 상황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종말론적 사고가 팽배했다. 이는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하라는 대로 살아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삶, 지옥과도 같은 일상 속에서 교회와 종교의 가르침을 절대 선으로 여겼던 사람들로서는 종교와 교회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더해 14세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문예, 예술 부흥기 르네상스 운동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현상을 보는 인식이 달라지고 교화 중심의 가치관이 흔들렸다. 각 나라별로 민족의식이 발전하고 국가체제가 확립하면서 왕권이 강화되는 시대적 변화도 교회에는 큰 위협이었다.
이런 교회에 마녀사냥은 그의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교회는 마녀사냥을 주도했다. 당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각종 자연재해와 전염병 등이 악마에 의해 발생하고 마녀는 그 악마와 결탁한 악마의 하수인으로 규정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마녀라는 식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퍼져 나갔다. 당시 소수자였던 마녀들은 점점 다수의 대중들에 의해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변질했다.
1484년 교황은 마녀와 민간에서 존재하던 주술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마녀사냥은 교회의 공인을 얻은 합법적인 행위가 됐다. 1487년 수도사들에 의해 저술된 저서 '마녀의 망치'는 마녀에 대한 정의, 그들의 죄악, 처벌 방법 등을 매뉴얼로 엮었다. 그 저서는 당시 활판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대량으로 발간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마녀사냥을 더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을 통해 지금도 통용되는 큰 매부리코에 챙이 큰 모자,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녀의 이미지가 정형화됐다. 마녀는 악의 상징이었고 박멸되어야 할 대상이 됐다. 이는 이후 그리고 지금도 마녀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이렇게 왜곡되고 과장된 마녀관을 바탕으로 교회가 주도하는 종교재판소는 마녀를 가리고 처벌하는 중요한 장소가 됐다. 일반 재판소에서도 마녀를 재판했다. 지역에서 마녀로 신고된 이는 종교재판을 거치며 마녀로 확정되고 공개된 장소에서 화형됐다.
종교재판은 판결의 장소가 아니었다. 마녀로 신고된 자가 마녀임을 확인받는 요식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였다. 마녀로 신고된 사람은 대부분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 혹독한 심문과 고문이 뒤따랐고 자백을 강요받았다. 마녀로 확정되는 과정은 비과학적이고 상식을 벗어났다. 결론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악마의 통로로 여겨지는 점과 흉터를 날카로운 바늘로 찔려 고통을 느끼는지를 감별 받아야 했다. 심지어 뜨거운 불길을 걷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일부러 몸을 묶어 물속에 던져지기도 했다. 물속에서 빠져나오면 마녀가 됐고 그대로 익사한다면 마녀 혐의는 벗지만, 그는 세상과 작별해야 했다. 이렇게 마녀재판은 정해진 결론을 위한 과정이었다.
이에 마녀재판은 점점 변질되어 정적을 제거하거나 원한이나 어려 이해관계에 따라 신고가 악용됐다. 마녀재판 자체가 비이성적인 행위였지만, 비인원적 탈법적 재판이 됐다. 또한, 마녀재판에 회부된 이는 재판 과정과 심지어 그가 화형 당하는 데 따른 비용까지 부담했다. 그는 목숨은 물론이고 그의 재산까지 모두 잃었다. 그리고 그 재산은 재판관들이 나눠 가졌다. 마녀재판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됐고 사업이 됐다. 이에 종교인은 물론이고 지역의 영주들도 이에 가담했다. 이 과정에서 부유한 미망인들이 마녀로 지목되는 주 대상이 됐다.
또한, 마녀재판은 흉흉한 민심을 달래는 수단이 됐다. 지역 영주들은 마녀재판을 통해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 마녀에 있음을 대중들에게 각인하고 그들은 단죄하면서 집권층에 대한 불만을 무마했다. 마녀재판은 중세 시대 강력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교회와 봉건제 속 지역 영주들이 결탁한 여론 선동의 결과물이었다. 일반 대중들 역시 부족한 정보로 이에 의심을 하지 않았고 마녀사냥에 동참해 힘든 일상에 위안을 받았다. 마녀는 공인된 희생양이었다.
마녀사냥은 중세를 넘어 근세에도 이어졌다. 16세기 들어 기존 교회에 반기를 든 신교가 부상하고 기독교 내부의 갈등이 깊어지는 시긴 마녀사냥은 절정을 이뤘다. 16세기 교황은 부족한 교회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죄를 면제하는 면벌부를 공공연하게 판매했고 이에 분노한 신학자 루터가 이를 반발하는 반박문을 게재하며 종교개혁의 서막이 올랐다.
루터가 주도하는 신교는 점점 세를 확대했다. 기존 교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대중들과 영주들이 신교를 지지하면서 신교의 세가 확대됐다. 특히, 루터가 활약하던 독일 지역에서 신교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갔다. 이는 기독교 종파 간 대립으로 이어졌고 종교전쟁을 초래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를 통해 루터파 기독교가 공인되고 신교과 구교가 공존하는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이는 불안정한 평화였다. 신교의 또 다른 종파인 칼뱅파가 새롭게 부상했고 그 칼뱅파에 대한 공인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 영주가 자기 지역 신앙을 신교인 개신교와 구교는 가톨릭 중 선택하도록 해 완전한 종교의 자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또 다른 갈등 요인이 됐다. 유럽은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나뉘어 대립했고 이는 30년 전쟁으로 불리는 종교전쟁으로 이어졌다. 같은 신교인 루터파와 칼뱅파간에도 대립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성향을 달리는 지역 간 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중요한 산업이 농업의 근간이 되는 농토도 황폐화됐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계속된 종교전쟁은 역사상으로 서양 최초의 국제적이었고 최후의 종교전쟁이기도 했다. 1648년 서양 최초의 국제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전쟁은 종결됐다. 이후 개신교와 가톨릭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 전쟁으로 국가라는 개념이 정착되고 유럽은 근세로 넘어갔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개신교에서도 마녀에 대한 인식은 가톨릭과 다르지 않았다. 종파 간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마녀사냥은 상대 종파를 억압하는 지역민들의 이탈을 막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종교적 의미가 퇴색되고 정치재판의 성격도 보였다.
1632년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발생한 루뒹의 마귀 들림 사건과 이에 따른 루뒹의 종교재판은 마녀재판에 대한 의구심을 커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 지역 수도원의 수녀들은 집단적으로 환청을 듣고 이상행동을 했고 이를 악마의 소행으로 여긴 지역 교화에서는 구마 의식을 행하며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 현상을 사라지지 않았고 마녀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와 추기경이 개입하면서 재판의 방향이 전혀 다르게 변했다. 재판 과정에서 지역의 주교가 그랑디에 신부가 주술 하는 신부 수녀들은 마녀로 만든 주술사 악마로 지목되었고 그는 마녀재판이 대상이 됐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일이었다. 그랑디에 신부는 마녀재판 판결의 결정적 증거인 자백을 모진 고문에도 거부했고 자백 없이 유죄판결을 받고 화형 당했다. 이 재판을 지켜본 대중과 지식인들은 재판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고 마녀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회가 발전하고 철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자체적인 사고능력이 강화되고 점점 마녀에 대한 인식도 변해갔다. 종교의 왜곡된 신념 속에서 파생된 마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변하기 시작했다. 결적으로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열었던 루이 14세 집권기 마녀사냥, 마녀재판은 그 힘을 일었다. 신으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왕권신수설에 근거해 절대군주로서 자리한 루이 14세는 왕을 중심으로 한 법과 제도에 근거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이런 그에게 교회와 영주들이 주도하는 마녀사냥, 마녀재판은 왕권 강화에 방해되는 요소였다. 그의 집권기 마녀재판은 그 요건이 강화됐고 국왕의 칙령을 통해 마녀재판이 금지됐다. 교회라는 절대적 권위의 존재가 약하되고 세속 세계를 지배하는 국왕의 강력한 힘이 마녀재판을 무력화했다. 종교와 정치, 일상이 동일시되는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사회가 되면서 마침내 마녀재판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녀재판의 광풍이 불었던 기간 수십만의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백년전쟁에서 크게 밀리던 프랑스를 승리의 길로 인도한 영웅이었전 10대 소녀 잔다르크 역시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 당시는 누구든 마녀로 몰릴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공범인 집단 학살이었다.
공식적으로 마녀재판은 끝났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다수가 소수를 억압, 탄압하고 폭력과 학살을 자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을 포함한 소수자들에 대한 대량 학살과 종교적, 인종적 차이에 근거해 자행되는 학살도 마녀 사녕과 다를 게 없다. 여기에 사회 곳곳에서 다수의 반하는 주장과 행동을 하는 이를 범죄자로 몰아 탄압하는 일이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 군사독재 시절 정권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인사들을 국가 공권력이 나서 소위 빨갱이, 좌익 용공세력으로 몰아 탄압하고 위해를 가한 일도 마녀사냥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그 유산은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자행되는 성별, 지역, 특정 세력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조장하는 행위도 마녀사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고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사고에 의한 잘못된 일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지만, 처해진 상황과 사회적인 위기, 이해관계에 따라 혐오와 증오에 동조하고 심지에 이를 함께 하기도 하는 잘못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녀사냥의 공조자가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문명사회임을 자부하고 현대 사회에서 마녀사냥에 준하는 비지성, 광기에 휩싸인 행동은 결코 나와서는 안되는 일이고 이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중세 마녀사냥의 역사는 그래서 충분히 알아야 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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