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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냉랭한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일 관계에 있어 가장 큰 이슈는 과거사 문제다. 최근 한국 대법원의 일제 징용 배상 판결과 위안부 합의 파기 등의 이슈가 생기면서 대립의 양상이 더 극한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과거 한. 일 수교 협정과 위안부 합의 등으로 과거사 문제가 정리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은 그 협정과 합의가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입장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결과물이고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로서 논의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직접 피해자들은 배제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이에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등의 피해를 입은 이들이 제대로 된 배상과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에서 공론의 장도 없었다. 일본은 이를 외면하거나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기까지 했다. 잠재된 갈등은 몇 해저 강제징용 판결로 표면화됐다. 

이런 상황 속에 일본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야 함에도 수출규제 등으로 한국을 압박했다. 이에 한국이 단호히 대처하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으면서 일본의 경제 제제는 그 효과가 반감됐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 문제에 있어 더 이상의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만들어진 평화 헌법의 개정을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의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일본은 막대한 군비를 쏟아부으며 군사 대국의 길을 가고 있다. 일본의 군사력은 주변 국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다. 더 나아가 핵 공유 등으로 핵 무장까지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까지 더해 지역의 패권 국가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의 대립을 본격화하는 일이다.

최근 일본의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침략국인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고 중국과 한국, 동남아까지 아시아 지역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때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전쟁의 소용돌이는 일본을 집어삼켰고 그들에게 전범국의 낙인을 찍게 했다. 

 

 

진주만 폭격 사진

 



일본의 대외 침략 야욕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체계적인 준비를 통해 현실화됐다. 이미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이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빠르게 산업화에 성공했고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일본은 강해진 국력 위해 군사력도 함께 강화했다.

일본의 군대는 청. 일 전정과 러. 일 전쟁의 승전을 거치며 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거듭났다. 일본은 거듭된 전쟁 승리와 함께 서구 열강의 일원에 포함됐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의 묵인 속에 조선을 강제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았고 대외 팽창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 편에 서서 승전국의 지위마저 얻어내며 대외 진출의 기회를 더 크게 했다.

하지만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의 막차를 탔다. 서구 열강들은 이미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에도 그들의 식민지를 구축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지만, 더 이상의 식민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일본으로서는 서구 열강과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일본은 아시아인들의 공동 번영을 표방하는 대동아공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대외 팽창을 시도했다. 아시아인들의 번영이었지만, 그중심에는 일본이 있어야 했고 이는 그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호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주 전장이었던 유럽을 황폐화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후 문제 처리와 복구 등으로 대외 현안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일본에는 기회였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 공급 기지로서 역할을 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일본은 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섰고 마침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의 힘이 약해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일본이 그 자리를 파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패권 국가로 떠오른 미국이 일본을 견제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했지만, 역설적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미국과 일본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일본이 그들의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었고 일본은 미국이 중국, 러시아 등 동아시아 지역의 강대국과 맞서 싸우는 데 있어 든든한 배경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미국과 일본은 밀약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용인했다. 조선은 미국을 마지막 희망을 여겼지만, 이는 환상이었다. 

 

 

일본 군함도

 



이런 미국이었지만, 일본이 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패권 국가가 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1921년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국가들을 모아 워싱턴 회의를 열었고 워싱턴 협정을 이끌어냈다. 주 내용은 군축으로 해군 함선의 규모 제한이 중요했다. 그 결과 일본은 미국과 서구 열강들과 비교해 더 많은 함선을 보유할 수 없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세력 확대를 노리는 일본에는 큰 제약이 발생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일본의 대외 확장 시도를 지속 견제했다. 미국과 일본의 우호관계는 점차 대립과 적대 관계로 변했다. 

이는 일본 내 군부와 우익 세력들의 불만을 키웠다. 그들은 미국 주도의 군축을 반대했다. 이 주장은 일본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고 일본 내 반미 정서가 점점 강해졌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의 관계 유지에 주력하는 총리들이 군부 우익세력들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암살 시도는 미국 내 유력 인사들도 중요한 목표가 되기도 했다. 한 예로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배우 찰리 채플린도 암살의 표적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 군부와 우익 세력은 미국과의 적대 관계를 유도하고 전쟁 국가로 일본을 이끌었다. 군부와 우익 세력들은 조선을 넘어 중국 침략을 노골화했다. 1931년 일본은 중국 만주지역의 철도 선로 폭발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빌미로 만주지역으로 침공했다.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은 1932년 만주지역을 장악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이라는 친일 괴뢰 정부를 세워 그 지역을 통치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지금의 UN 격인 국제연맹은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 조사단을 파견하고 일본의 침략을 인정했다. 국제연합은 일본의 침략 중단과 만주에서의 철군을 결의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반발했고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또한, 일본은 국제연맹 체제를 거부하는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전체주의 국가, 파시즘 국가로 급격히 전환했다. 

일본의 대외 강경 노선은 더 강화됐다. 일본은 1934년 미국과의 군축 합의를 파기했다. 1936년에는 군부가 국가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며 대외 전쟁을 더 강력히 추진했다. 마침 그 시기는 전 세계적인 대공황 시기였다. 일본 군부는 대외 전쟁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1937년 일본은 오랜 숙원이었던 대륙 침략을 단행했다. 만주를 넘어 중국 본토로 일본군이 침공을 시작했다. 중. 일 전쟁이 시작됐다. 

 

 

팔라우 섬 태평양 전쟁 흔적

 



개전 초기 일본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연전연승했다. 일본은 1937년 12월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일본은 난징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중국인들의 항전 의지를 꺾고 빠르게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만행은 중국인들의 항전 의지를 더 강하게 했고 대외적으로 일본에 대한 비판 여론을 더 키웠다. 미국 역시 강력한 경제 제제로 대응했다. 미국에서 많은 문자를 수입하고 있었던 일본에는 큰 타격이었다. 미국은 더 나아가 1939년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며 사실상 경제교류를 단절했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가 내륙으로 수도를 옮기며 항전을 거듭하고 미국이 이를 지원하면서 중. 일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은 더 궁지에 몰렸다. 

이런 일본에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새로운 기회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유럽 열강들이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물자 지원을 하긴 했지만, 군사적인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었다. 일본은 그 팀을 노려 영국과 프랑스가 지배하던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을 침공해 점령했다. 이를 통해 석유 등 그 지역의 막대한 자원을 확보해 중. 일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지역과 태평양 섬으로 세력을 확대했고 1941년 인도네시아까지 장악했다. 

이에 미국은 더 강도 높은 경제제제로 일본을 압박했다. 또한, 일본이 점령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권 인정을 일본에 요구하는 한편 1941년에는 하와이, 진주만에 아시아 태평양 해군 함대를 배치하며 일본을 긴장하게 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군대의 참전에는 소극적이었다. 일본과의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리가 없었다. 양측의 긴장은 점점 더 고조됐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준비했다.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 함대를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은밀히 이를 준비했다. 일본은 다양한 첩보전으로 미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경계가 가장 취약한 날짜와 시간을 사전에 파악했다. 하와이의 지형과 비슷한 곳에서 공격 훈련을 진행하는 용이 주도함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움직임을 미국은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일본군이 그들의 태평양 함대를 직접 타격할 것이라는 생각은 더 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기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다수의 전투기를 실은 수 척의 항공모함과 호위함과 전함을 이끌고 은밀히 하와이에 접근했다. 그들은 일본에서 출발할 때 고위 장성을 제외하면 그들의 목표지점을 알 수 없었고 미국의 추격에 대비해 통신마저 하지 않으면서 하와이를 향했다. 일본군은 일요일 아침 미군이 전혀 대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습을 단행했다. 일본군은 미국 태평양 함대의 괴멸과 공군 전력 파괴를 목표로 기습전을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의 공습과 함선의 어뢰 공격에 3척의 미 해군 전함이 침몰했다. 18척의 전함이 피해를 입었다. 100여 대 가 넘는 전투기도 파괴됐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반대로 일본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미국은 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본토는 아니지만 그들의 영토가 외국군에 직접 타격을 입은 건 그들 역사상 처음이었고 다수의 사상자 발생도 처음이었다. 일본으로서는 기선 제압과 함께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미 태평양 함대의 핵심인 항공모함을 파괴하지 못했다. 마침 그 시점에 미 해군 항공모함을 훈련을 위해 타지역에 있었다. 또한, 미군의 정유시설 등 병참 시설 파괴도 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이 태평양 함대를 복원하는 데 있어 큰 힘이 됐다. 결정적으로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 내 반전 여론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의 의도와 달리 미국 내 전쟁 여론이 급속히 확산됐다.

12월 8일 미국은 일본의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공습을 규탄함과 동시에 참전을 공식 선언했다. 이는 미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본과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군대를 투입했다. 일본의 의도와 전혀 다른 전개였다.

미국은 막대한 공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함선과 무기, 군사물자를 생산했고 물량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급변했다. 유럽 전선은 연합군이 독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고 태평양 전쟁 역시 일본이 밀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미 태평한 함대가 완전히 복원되기 전에 대결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유지할 기회를 있었지만, 미군은 정보전과 작전에서 일본군에 앞서며 불리한 흐름을 극복했고 일본 해군에 결정적 패배를 안겼다. 1942년 6월 4일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그 흐름들 주도하도록 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필리핀과 인도양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일본군의 기세는 금세 꺾이고 말았다. 미군은 태평양의 섬들을 잇따라 장악했고 일본군은 점점 밀려났다. 미국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일본을 몰아붙였다. 다수의 항공모함 전력은 일본 도쿄 등 일본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가능하게 했다. 고려 시대 몽골의 일본 공격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외국 군대의 본토 공격을 받은 적 없었던 일본에 큰 충격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전투기

 



결국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물론이고 중. 일 전쟁에서도 점점 불리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1945년 5월 29일 미군이 일본 본토 바로 앞 오키나와 섬을 장악하면서 일본의 패망은 기정사실화됐다. 더 이상의 항전은 일본에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포기하지 않았고 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났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은 다수의 자살 비행대인 가미카제 전투기를 동원해 미 군함에 자살 공격을 감행하게 했다. 또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민간인들을 인간 방패로 삼는가 하면 항복을 못하도록 강요하고 자살을 종용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의 무의미한 항전에 무고한 민간인들이 다수 희생됐다. 

이런 희생에는 조선인들도 다수 포함됐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을 당해 전투에 나섰고 강제 노력에 시달렸다. 여성들은 위안부로서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중 상당수는 이름 모를 태평양의 섬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수십만 명 중 다수의 조선인들이 포함됐다. 일본군은 한반도를 그들의 최후 항전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고 곳곳에 군사 요새를 만들고 지하호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 흔적인 제주는 물론이고 인천에도 남아있다. 

일본의 항전에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 대신 더 큰 피해를 줄이기 위한 선택을 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개발된 핵폭탄을 실전에 사용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일류 최초로 핵무기기 사용된 순간이었다. 원자폭탄의 위력 앞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에 앞서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전 세계를 전쟁의 비극 속으로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미 군정을 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전범국의 멍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도래한 냉전체제와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너무 쉽게 벗겨졌다. 일본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병참 기지로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빠르게 전후 복구와 함께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1960년대 고도성장 과정을 거쳐 경제 대국으로 거듭났다. 전범국으로서의 전후 배상과 과거사 반성 등의 문제는 어느 순간 뒷전으로 밀려났다. 일본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침략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은 물론이고 아시아에게 영향력을 키웠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구 경제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커진 국력에 걸맞은 역사인식을 보여주지 않았다. 

 

 

 



전후 일본은 전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제대로 단죄 받지 못했다. 상당수는 정계와 재계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했고 그 힘을 세습했다. 단전으로 전쟁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 할 수 있는 천황, 일본왕도 그 지위를 유지했다. 그들은 현재 일본 우익 세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과거사를 반성하고 전후 배상과 보상에 적극 나서기를 기대하는 건 애초 무리였다. 오히려 알려진 역사 사실마저 왜곡하거나 은폐하며 그들의 과거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있다.

최근에는 과거 군국주의 일본은 연상시키는 군사 대국화와 함께 패권 국가로 발전하려는 시도를 노골화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들과의 갈등을 불러오고 있지만, 일본 우익세력은 이를 그들의 권력기반을 단단히 하는 수단으로 삼으며 군국주의 부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제는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제어할 마지막 수단인 평화 헌법마저 개정하며 전쟁 가능 국가로 자리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 태평양 전쟁과 중. 일 전쟁 식민 지배의 역사 속에서 가해자였지만, 그런 과거를 반성하기보다는 재현해야 하는 과거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지역의 또 다른 갈등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일본에 대한 과거가 문제 제기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막는 수단으로서 멈추지 말아야 할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본 우익의 주장에 동조하고 심지어 앞장서 역사 왜곡 주장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 내 자칭 보수세력들의 존재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들은 사실상 식민 지배 시절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들과 같다 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정의와 선을 거부한 역사의 긍정적 발전에 역행하는 이들은 단죄를 받았다는 점이다. 일본 역시 과거 태평양 전쟁을 통해 패전국으로 전범국으로 자리했다. 잘못된 역사는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만, 일본은 아직 그 역사에서 교훈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피해자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인권을 유린단하고 피해를 입은 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그 역사가 증명되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의 잘못된 역사 인식은 절대 지지를 얻을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일본이 또다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그 결과는 정해져 있다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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