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크게 4곳으로 구분된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지금의 중동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중국 황하강 유역의 황하문명, 인도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을 4대 문명 발상지로 교과서 등에서 배웠다. 이 문명 발상지의 공통점은 나일강 유역을 제외하면 동양에 있었고 현대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유럽 등 서양과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문명의 발달에서 서양은 그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근 간극은 역사의 발전과 함께 빠르게 좁혀졌다. 그 과정에서 동. 서양 문명은 상호 교류와 소통도 있었지만, 힘 대 힘이 맞서는 충돌도 있었다.
전쟁까지 발전한 동. 서양 문명 충돌은 근대 중국 역사의 시작을 알린 영국과 청나라의 아편전쟁, 그전 유라시아 전역을 장악한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오스만 제국의 비잔틴 제국 수도 이스탄불 점령 등의 사건이 있다. 그보다 앞선 기원전에도 동. 서양의 충돌이 있었다. 지금도 서양 문화의 본류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문명과 중동 지역의 최 강자였던 페르시아 왕국의 전쟁이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또는 페르시아 전쟁이라 불리는 두 문명 간의 대결은 기원전 490년 경 시작되어 450년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 역사에 남을 전쟁들도 다수 있었고 그 전쟁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 있어 먼저 살펴야 할 부분은 페르시아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페르시아는 매우 호전적이고 탐욕스러운, 악의 화신으로 그려지는 일이 많다. 서구인들의 세계관이 크게 반영될 결과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매우 앞선 문명과 경제력의 부유한 국가였고 군사 강국이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제를 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건 기원전 550년경이었다. 지금의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르시아는 이후 기원전 500년 경 중동 지역과 지중해 연안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다레이오스 왕 시기 페르시아는 최고의 전성기로 넓어진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광역 교통망과 이를 통한 정보 전달 루트를 마련했다. 왕이 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정보 전달의 기능과 함께 중앙집권 체제 유지에 있어 중요한 바탕이 됐다.
다레이오스 치세 때 페르시아는 상업이 발전하고 대외 무역도 활발했다. 나라의 부는 쌓였고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페르시아는 화폐제도가 발달했고 세공 기술 등 첨단 기술과 문화도 발전했다. 고도의 문명을 갖춘 세계 질서는 선도하는 강대국이 페르시아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모습은 여러 부분에서 왜곡됐다.
페르시아의 영토 확장은 그리스 연안으로 그 힘이 미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달라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아닌 각 도시들이 독립성을 가지는 도시 국가 연합이었다. 그 도시의 수는 1,000여 개에 이르렀다. 도시 국가들은 전쟁 등 중요한 현안 발생 시 상호 협력하기도 했지만, 통합된 국가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내부 통치 방식 역시 시민들의 참여를 전제로 한 민주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물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수는 극히 제한되고 있었고 상당수의 노예들이 체제 유지의 기반이었지만, 왕 중심으로 전제 군주정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페르시아와는 크게 대조적이었다.
이런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페르시아가 세력을 뻗쳐왔다. 상당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그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 최 강대국 페르시아와 맞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기류에 변화가 생겼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반란 세력은 그리스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중 아테나가 개입했다. 하지만 반란은 페르시아에 쉽게 제압당했다.
페르시아는 반란 진압과 함께 그리스 침공의 명분을 얻었다. 다레이오스 왕이 지휘하는 페르시아의 대군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그리스로 침공했다. 이중 해군이 폭풍으로 궤멸되는 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의 대군은 그리스를 위협했다. 전체적인 국력이나 전쟁을 치를 군사력 등을 고려하면 페르시아 우세한 상황이었다.
페르시아는 우선 유화책으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굴복을 강요했다. 페르시아는 항복의 징표로 도시의 흙과 물을 바칠 것으로 명했다. 상당수 도시들이 이에 응했다. 하지만 아터네와 스파르타는 이에 반발했고 항복을 받기 위해 방문한 페르시아 사절단을 처형했다. 이 페르시아는 군사적 침공을 재개했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연한의 에게해 지역의 섬을 잇따라 점령했고 아테네에 우호적인 도시 국가를 점령하며 그리스 전체를 압박했다.
그 사이 페르시아의 주력 부대는 아테네 인근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 군과 대치했다. 군사의 수 등에서 페르시아는 아테네 중심으로 그리스 군을 압도했다. 아테네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육군이 강했던 도시 국가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병력 파견에는 동의했지만, 그들의 전통에 따라 보름달이 뜨는 시기에는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다. 아테네로서는 황망한 순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테네를 지킨 영웅이 등장했다. 아테네의 장군 밀티아데스가 있었다. 그는 뛰어난 장군이기도 했고 페르시아군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풍부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 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페르시아군의 단점을 파고들 전술과 전략을 사용했다.
두 나라 군대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테네군은 산지가 많은 지역 지형의 특성에 맞게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전력의 중심이었다. 이에 맞선 페르시아군은 넓은 평야지대에서 전투를 주로 해왔던 탓에 활과 속도감 있는 무기로 무장한 경보명이 주력 부대였다. 밀티아데스는 중 보병의 강점을 이용한 부대 배치와 대형으로 페르시아군에 맞섰다. 페르시아 궁수 부대를 무력화했고 포위 작전을 통해 페르시아군을 강하게 압박했다. 예상과 달리 아테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에 대승을 거뒀다. 그렇게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은 실패했다.
이 마라톤 전쟁과 관련해 마라톤 경기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스 연합군의 전령, 연락병이었던 페이디피네스가 전쟁의 승리를 전하려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숨을 거뒀다는 전설이 있다. 마라톤 경기는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렸던 페이디피네스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생겼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페이디피네스가 전쟁 승리 소식을 전하고 사망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페이디피네스가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전장에서 스파르타로 보내진 전령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는 무장을 한 채로 거의 200킬로의 거리를 이틀에 걸쳐 달렸다. 초인적인 질주였지만, 이 임무를 하고 그가 사망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마라톤과 관련한 이야기는 후대에 승전의 역사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마라톤 전쟁의 승리는 그리스 전체를 지켜낸 빛나는 결과였다. 이는 근대 올림픽이 열리는 시점에 더 드라마틱 하게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졌고 마라톤 종목의 탄생으로 연결됐다.
큰 패배를 당했지만,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이 끝난 건 아니었다. 페르시아는 다레이오스 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크세르 크세스가 즉위한 한 이후 다시 그리스 침공을 본격화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 크세스는 그리스 원정군을 직접 지휘하며 그리스 침공을 이끌었다. 역사 기록에 따라 그 규모는 엇갈리지만, 수십만의 대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페르시아군의 기세에 그리스도 강하게 맞섰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중 육지에서 페르시아 군을 상대한 그리스 연합군은 스파르타가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와 다른 국가 운영 시스템이었다. 민주정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엘리트가 권력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였다. 그 엘리트들의 상당수는 언제든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전사들이었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를 시조로 여기는 나라답게 용맹한 전사들을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전사로서의 자질을 파악하고 부족한 아이들은 바로 살해하기도 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7세부터 20세까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강력한 통제 속에 진행되는 교육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이렇게 육성된 전사들은 스파르타 군의 주축이었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추세력을 이뤘다. 집권층의 강력한 무력은 급증하는 노예들을 통제하는 데도 필요했다.
이런 스파르타군이 그리스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페르시아 군과 맞섰다. 스파르타군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끌었다. 레오니다스왕은 스파르타 전사 중 최정예 300인을 선발해 전장에 나섰다. 그는 전쟁에 나서기 전 신탁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예언 받았다. 압도적인 페르시아군의 전력을 고려하면 분명 힘든 싸움이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할 전사들을 선발함에 있어 자신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이 있는 이들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300인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와 인근 그리스 도시들의 병력을 포함해 약 7,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과 수십만의 페르시아 대군이 테르모퓔라이 협곡에서 마주했다. 과거 흥행했던 영화 300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1주일간 항전을 이어갔다. 통로가 비좁은 협곡의 지형을 이용해 전면전을 피하고 1대 1의 대결 구도를 만들게 적중했다. 페르시아 군은 수적 우세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쉽게 그리스 연합군을 넘어 아테네로 진군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전투가 길어졌다.
스파르타의 300인 전사들은 전장의 가장 앞선에서 근접전에 유리한 팔랑크스 대형을 구축하며 페르시아 군과 대결했다. 페르시아군은 왕의 친위부대 등을 앞세워 전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스파르타군의 용맹함을 이겨낼 수 없었다. 팽팽한 대결은 그리스 내부의 배신자가 등장하면서 급격히 페르시아로 승세가 기울어졌다.
그리스의 배신자는 협곡을 우회해 지날 수 있는 통로를 알렸고 페르시아군은 그 길을 지나 그리스 연합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었다. 포위 상태에 빠진 그리스 연합군은 죽음을 각오한 결사 항전과 항복 중 선택해야 했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그리스 연합군 상당수를 후퇴시켜 후방을 방비토록 하고 300인의 전사들과 함께 최후의 항전을 이어갔다. 결국,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모두 전사했다.
하지만 이들의 항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로 진격했을 때 아테네는 시민들과 군을 모두 인근 섬으로 피신토록 했다. 아테네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했지만, 항복을 받지 못했다.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한편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이 반격을 준비했다. 아테네는 이전부터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를 중심으로 해군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그 결과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다. 아테네는 해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페르시아 왕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거짓 항복 의사를 보이며 페르시아 군을 아테네 해군이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하려 했다. 아테네의 기만술에 속은 페르시아 왕 크세르 크세스는 진격을 명령했다.
세계사에서 3대 해전으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까지 4대 해전은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해상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칼레 해전과,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을 막아낸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이 이에 속한다.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향방을 엇갈리게 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수적으로 크게 우세했지만, 해전이 벌어진 살라미스 섬 인근 해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반대로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해군은 지형에 능숙했고 그에 맞는 전략으로 나섰다. 또한, 앞선 조선 기술을 활용해 더 기동력 있고 강한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한 차원 앞선 대표 화력과 판옥선, 거북선 등 앞선 기술과 함선을 활용해 일본 해군을 이겨낸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미리 준비한 아테네의 완승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완전 정복에 실패했고 내부 반란 등으로 인해 일부 병력을 남기고 철수해야 했다. 이후에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을 주도했던 왕 크세르 크세스가 암살당하기도 했지만, 양측의 적대 관계는 여전했다. 하지만 긴 전쟁은 양측 모두에 큰 부담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굴복시킬 수 없었고 그리스 연합 역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있어 모든 도시들의 단결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타협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양국의 전쟁은 기원전 450년 경 양국의 평화조약을 통해 종식됐다. 하지만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리시는 전쟁 과정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대립했다.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양측으로 나뉘어 싸웠다. 초기 델로스 동맹이 우세했지만, 이후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스파르타가 그리스 연합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전쟁을 통해 그리스는 피폐해졌고 과거 찬란했던 번영의 시대가 지워지고 말았다. 그리스 연합에서 주도권을 잃은 아테네는 급격히 쇠퇴했다. 이후에도 그리스는 내전이 빈번했고 분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최 강대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성기를 누려야 할 그리스였지만, 상황은 계속된 분열과 쇠락으로 연결됐다. 이는 문명충돌에서 승리라는 거대한 전쟁 승리의 명분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었다.
이후 그리스는 기원전 4세 경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등장과 함께 통일 국가를 이뤘고 세계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복 군주 중 한 명이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를 넘어 숙적이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 정복에 이어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 전쟁을 통해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인지하고 파괴하기보다는 융합하고 조화를 이루려 했다. 동서양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알렉산드로스의 사망과 함께 그의 제국이 분열되면서 계승되지 못했다. 이후 그리스는 로마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그리스 신화와 철학 등 그들의 문화와 문명만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동서양 전쟁의 승리자였던 그리스였지만, 그들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대로 패자인 페르시아는 왕국의 이름이 변화하며 왕조의 명맥을 1979년 이란 혁명 때까지 이어갔다. 역사에서 페르시아는 패자로 기록됐지만, 페르시아는 더 강한 생명력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는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을 보는 시선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서양이 동양과의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후 동양에는 오스만과 몽골, 중국, 인도의 왕조 등이 들어서며 번영을 구가했다. 서양은 오히려 동.서 문화가 조화를 이뤘던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종교적 가치가 최우선에 있는 중세 시대로 접어들며 문화 역사적인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서양이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한 건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과 대항해 시대, 산업혁명이라는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친 이후였다. 그 과정에서 서양인들은 그리스 로마 문명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느끼고 이를 발전의 원동력을 삼았다.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는 어쩌면 서양이 동양을 앞서는 시점에 더 각색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은 전혀 다른 문명의 만남과 대결이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흥미가 있고 극적인 장면들이 많았다. 문화 예술의 소재로도 실제 많이 사용됐다. 이 전쟁의 역사는 누구가 승리했다가 중요하기보다는 당시 시대상과 역사의 흐름을 파악한 데 더 큰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문화 > 미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TBS 역사스테이 흔적] 인천 부평구, 일제 강제 징용의 역사, 일본군 조병창과 지하호 (4) | 2022.07.02 |
---|---|
[벌거벗은 세계사] 뿌리 깊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그리고 테러의 시대 (8) | 2022.06.28 |
[벌거벗은 세계사] 러시아 제국의 몰락 재촉한 괴승 라스푸틴, 황실의 비극 (10) | 2022.06.15 |
[리뷰] 민주주의자 그리고 인간 김근태의 삶 재조명한 'TBS 역사스테이 흔적' (5) | 2022.06.09 |
[벌거벗은 세계사] 임진왜란의 비극과 연결된 일본의 전국시대, 3인의 권력자들 (10) | 2022.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