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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러 역사 관련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있다. 다큐 형식도 있고 예능 형식을 빌려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TBS의 역사스테이 흔적은 어느 특정 사건이나 인물의 발자취, 즉 흔적을 따라가는 프로그램이다.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하고 있는 역사학자 심용환과 매 회 나오는 패널이 미션을 가지고 어느 장소를 걸어서 탐방하고 그 느낌을 대담 형식으로 풀어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역사스테이 흔적이 시즌 2를 맞이했다. 

시즌 2의 첫 번째 이야기 그 주인공은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의 대부이기도 했고 정치가였던 김근태였다. 김근태는 정치인으로 사람들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박정희 유신시대부터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에 이르기까지 군부독재 시기 기간 정권에 맞서며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47년 경기 부천에서 태어났고 2011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에서 정치인의 이력은 그리 길지 않다. 그의 생에 상당 부분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하고 있다. 

그의 민주화운동 여정의 시작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5년 서울에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근태는 이후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다. 1967년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제6대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강제 입대를 당했다. 

1970년 8월 군에서 만기 제대한 김근태는 반독재 학생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군사정권 시절에는 언론과 사회활동 전반이 통제되던 시절이었다. 제도권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건 많은 제약이 있었다. 대학교는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상대적으로 관계 기관의 감시와 통제를 덜 받았고 지식인들이 함께 하는 환경은 ㅂ민주화운동을 위한 유리한 환경이었다. 이런 대학생들 중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리더가 되어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김근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대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고 전국 각 대학이 연대하여 함께 투쟁했다. 관계 당국은 이런 학생운동을 좌익 용공세력들의 반정부 활동으로 매도했다. 언론의 보도 역시 학생운동에 대한 부정적 보도가 대부분이었다. 이를 통해 학생운동 세력과 일반 국민들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하고 그들을 탄압할 구실로 삼았다. 공안 당국은 학생운동 세력과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들에 대한 간첩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김근태는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도한 혐의로 수배당했고 긴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1975년에는 유신헌법 비방과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 없는 학생시위와 집회를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가 더해지며 긴 수배자 생활을 했다. 그 기간 김근태는 많은 자격증을 취득하고 노동 현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서민들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김근태는 당시 그의 전공과 학장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지지는 직접 행동하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함께 하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 기간 김근태는 대학생으로 봉제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던 배우자 인재근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민주화운동의 동지로서 정치적 동지로서 함께했다. 그들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한 10.26 사건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시기 결혼했다. 두 사람은 연애 기간 민주화운동에 나쁜 영향을 줄 것으로 염려해 그 사실을 숨겼고 측근들도 그들의 관계를 몰랐다고 전해진다. 

유신정권을 몰락과 함께 찾아온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았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을 장악한데 이어 보안사와 지금의 국정원인 안기부를 장악하며 정보기관을 장악했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통해 국가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쿠데타로도 알려진 신군부의 권력 찬탈과 그들에 의해 대통령 간선제, 일명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5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과거 박정희 못지않은 절대권력자로 등장했다. 우리 민주주의는 다시 크게 뒷걸음질 쳤다. 

김근태의 민주화운동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들 규합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청련을 초대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민청련은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활동을 했고 광주 민주화운동의 추모활동을 했다. 아울러 각종 저작물을 발간하며 권력의  통제 속에서 제 기능을 못하는 언론 기능을 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전두환 정권에는 달가울 리 없었다. 이전 박정희 정권 때와 같이 제야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좌익, 용공 프레임이 씌워졌다. 민주화운동 조직의 와해를 위해 공안 기관이 대거 동원했다. 지금의 국정원인 안기부, 군 정보기관인 지금의 기무사인 보안사, 경찰의 공안업무를 담당하는 치안본부가 나섰다.

그중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에게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남영동이라 불렸던 그곳에는 외부와 차단된 대공분실이 만들어져 있었고 다수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대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김근태 역시 이곳에서 큰 고초를 겪었다. 1985년 김근태는 서울대 민주화운동 조직을 배후 조정하는 혐의로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그때까지 김근태는 그가 가는 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인지 몰랐다. 또한, 영장도 없는 임의동행으로 그를 체포 구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다. 고문기술자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근안이 주도하는 고문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고문은 기본이었고 사람을 알몸 상태로 눕게 하고 전기를 흐르게 하는 전기고문, 관절을 일부러 빼는 관절 빼기, 그밖에 수많은 고문이 23일간이나 이어졌다. 대공분실에서는 고문을 통해 사람의 저항의지를 잃게 하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원하는 자백을 강요했다. 자신이 좌익 용공분자이고 그들 조직원들과 협력자들이 누구인지 진술하도록 했다. 

당시 김근태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기억을 남영동이라는 저서를 통해 밝혔다. 고문기술자들은 극한의 고통을 주고 원하는 답을 얻는데만 주력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딸의 생일날에는 고문을 하지 않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고문기술자들은 군사정권의 부역자였지만, 그의 집에서는 평범하고 성실한 가장이었다. 마치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자들이 평소에는 매우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것과 유사했다. 그렇게 김근태는 외부와 통제된 곳에서 신체적 고통,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이후 김근태는 평생 고문 후유증과 그와 관련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통받았다. 

김근태의 고문 사실은 그의 아내 인재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인재근은 김근태의 연행 이후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인재근은 언젠가는 김근태가 검차로 송치될 것으로 확신했고 검찰청사에서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를 만난 인재근은 고문 사실을 인지했고 그 사실을 국. 내외 인권단체에 알렸다. 이는 미국에서 전해졌다. 

 

 


마침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정치인 김대중도 이 사실을 알았다. 김대중은 서울의 봄 당시 김영삼, 김종필 등과 함께 유력 대권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미국 등 서방세계의 구명 운동을 통해 죽음의 위기를 벗아난 그는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김근태의 상황을 미국 의회 의원 등을 통해 알렸고 미국 내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이미 김대중의 활동 등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상황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미국 내 움직임 속에서 김근태, 인재근 부부는 1987년 제3세계 인권 운동가에게 수여되는 대표적인 상인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와 동시에 김근태는 세계의 양심수로도 선정됐다. 이는 김근태는 물론이고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부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근태는 수감 중이었고 인재근 역시 수상을 위해 미국행이 정부에 의해 거부당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민주화가 진전됐지만, 이후 등장한 노태우 정부는 이들 부부의 수상을 막았다. 심지어 시상을 위해 방한하려는 미국 인사들을 막기도 했다. 결국, 국제 외교 문제로 사안이 비화되면서 시상식은 이듬해인 1988년 5월 4일 가톨릭 강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때도 김근태는 수감 중이었다. 이를 통해 김근태는 우리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했다. 

그의 민주화운동은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된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계속됐다. 1988년 6월 감옥에서 석방된 김근태는 전국민족민주주의운동연합, 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중요 역할을 했다. 특히,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과 김영삼의 통일 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며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지는 3당 합당이 이루어진 이후 강해진 반대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후 전민련은 노태우 정부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김근태 역시 또다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김근태는 제야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권 정치 참여를 결정했다. 당시 많은 제야 인사들이 정치에 참여했다. 하지만 모두 한곳에서 함께 하지 못했고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여러 상황에 따른 정당을 달리했다. 김근태는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해 정치가의 길을 시작했다.

김근태는 1996년 서울 도봉구에서 새정치 국민회의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김근태는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고 대권 후보로서 더 큰 도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김근태는 제야 민주화운동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정치인으로 자리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복지부 장관을 역임했고 2006년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당 의장을 지냈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김근태는 재기를 모색했지만, 건강 악화로 더는 정치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 2007년 고문 후유증에 의한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지속했고 2011년 12월 30일 뇌 정맥 혈전증 치료 중 패혈증이 더해지며 세상을 떠났다. 국회의원 선거 낙선 이후 찾아온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이미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몸을 더 쇠약하게 했다. 민주화 운동의 여정 속 극한의 고통과 죽을 고비를 넘겨온 그였지만, 인생의 또 다른 고비를 끝내 넘지 못했다. 그의 나이 64세 때였다.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는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졌고 불의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몸은 망가졌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식지 않았다. 물론, 정치인으로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이는 정치인의 숙명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었고 상징이었다. 또한, 국가 권력의 가장 큰 희생자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민주주의 발전사와 맞닿아 있다. 진영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민주화운동의 여정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그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도봉구에서 최근 문을 연 김근태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도서관에는 김근태의 유품과 저서, 관련 자료를 살필 수 있다. 이 도서관은 각종 행사와 공연이 함께 하는 지역의 커뮤니티로도 기능하고 있다. 

 

방송링크

https://youtu.be/uwfqULcUI94

 

 


김근태는 생전에서 국민들의 참여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긴 민주화운동 역시 그들의 가치와 철학에 공감하는 다수의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이 결합되어 성공할 수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화운동 세력과 국민들의 교감과 연대가 이뤄낸 성과였다.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개발도상국 중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제는 정권과 권력을 비판해도 불이익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없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물론, 아직 민주주의 가치가 완전히 구현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군사정권 시절 외면 받았던 인권과 국민의 기본권의 신장은 분명히 이루어졌다. 이는 민주화운동의 긴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온 힘을 다한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인간 김근태는 민주주의를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했다. 이 점만으로도 인간 김근태의 삶은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는 2001년 저서의 제목에서 '희망은 힘이 세다' 하는 말을 했다. 끝의 보이지 않는 민주화운동의 여정을 속에서 그가 가졌던 마음을 함축한 말이었다. 민주화가 구현된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하다. 정치가 썩었다고 말하지만, 정치는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는 환경은 국민들이 만들어야 한다.

국민들의 정치에서 관심이 멀어질수록 권력은 더 부패하고 국민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파괴한다. 정치에 결코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국민들은 열린 마음과 자세로 권력과 정치권을 감시하고 그들의 주장과 의견을 말해야 한다. 또한, 옳은 일에는 힘을 모아야 한다. 이는 더 나은 세상을 위에 필요한 일이고 현재와 미래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희망의 힘이 모이면 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미 그 증명된 일이기도 하다. 

 

사진 : 김근태 도서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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