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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23일 발발하여 1598년 12월 16일 종전된 것으로 기록된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의 영향은 조선의 역사를 임진왜란을 전. 후로 나눌 정도다. 실제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 변화는 부정적인 면이 강했다. 

7년 동안 전 국토를 황폐화시킨 전쟁은 조선 경제의 근간이었던 농업의 생산 기반을 무너뜨렸다. 조선은 이후 임진왜란 이전의 농업생산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조선은 서서히 상공업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양반 중심의 신분제에 균열이 발생하고 기존 사회 시스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조선의 집권층은 그들의 기득권을 다 공고히 하는데 집중하면서 조선 사회는 더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훗날 조선이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대응하기 못하고 뒤처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런 조선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임진왜란의 원인 중 하나는 15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있었던 일본의 전국시대와 통일을 거치면서 발생한 대외 변수도 있었다. 일본의 통일은 이전과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이전까지 조선에는 일본 정부 통제 밖의 왜구들의 노략질이 있었지만, 일본 정규군의 한반도 침략은 없었다.

조선은 이전과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조선은 일본 상황에 어두웠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군사력이 강화되고 넘치는 군사력을 대외 침략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알아야 할 세계사 속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설명함에 있어 중요한 세 인물이 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 영주였던 오다 노구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쓰다. 이들은 전국시대 일본을 지배한 권력자로 서로 다른 성향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 의해 일본은 긴 전국시대를 끝내고 메이지 유신까지 수백 년간 일본을 통치하는 새로운 막부시대가 열였다.

이 세 명의 인물을 특징하는 일화가 있다. 울지 않은 새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 세 인물을 다른 답을 내놨다. 오다는 울지 않고 쓸모 없어진 새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토요토미는 새를 울도록 한다고 했다. 도쿠가와는 그 새가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오다는 매우 강한 용장 스타일로 다혈질에 포악하고 급한 성격으로 묘사되곤 한다. 토요토미는 처세에 능하고 전략가적 이미지의 인물이다. 도쿠가와는 은근과 끈기를 가진 전략가로 표현된다.

이 세 인물 중 가장 먼저 권력의 중심에 자리한 이는 오다다. 그는 신 무기긴 조총, 화승총은 이용한 전술을 극대화하며 강한 군대를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여기에 자신 지배하는 지역의 높은 농업생산성을 더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실력자가 됐다. 오다는 그 힘을 바탕으로 일본을 통일해 나갔다. 

이 시기 일본에 들어온 화승총은 영주들의 세력 대결에 있어 큰 변수가 됐다. 당시 활발히 교류했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보급된 화승총은 일본 내에서 개량되고 성능이 향상되면서 전국으로 빠르게 보급됐다. 오다는 화승총의 위력을 파악하고 이를 자신의 군대에 적극 활용했다.

이후 화승총은 일본 군대의 중요한 무기가 됐고 임진왜란에서도 일본군이 개전 초기 큰 우위를 점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국시대 패권의 중요한 요소였던 군사력에 확실한 우위를 점한 오다가 가장 큰 실력자로 부상한 이유였다. 오다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철권통치로 권력을 강화했고 중앙정치에서도 그 역향력이 막강했다. 이런 오다의 부상과 함께 그의 측근 인사인 두 인물이 함께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귀족 출신의 측근 도쿠가와와 가신 출신의 토요토미가 그들이었다. 도쿠가와는 오다와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고 중요한 가신으로 어려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영역도 확대했다. 한때 그는 오다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는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스스로 죽이는 냉혹한 결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정치적 입지를 유지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무장 - 지후니



또 한편에 자리한 도요토미는 도쿠가와와 달리 하층민 출신으로 오다 수하로서 최 하단에서 충성심을 인정받으며 즉위를 상승시켰다. 도요토미는 최초에 오다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말직에서 시작해 장군으로 올라섰다. 전국시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측근 인사가 필요한 상황에서 도요토미는 오다에게 필요한 존재로 자리했다. 장군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는 특유의 전략으로 오다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전국시대 통일의 마지막 단계였던 서부지역 정벌 과정에서 지략을 발휘하며 대부분을 점령하기도 했다. 

오다가 주도하고 대척점에 있는 도쿠가와와 도요토미가 균형을 이루며 대립 견제하는 권력 구도는 오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1582년 오다가 또 다른 최측근 인사의 배신과 반란으로 사망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절대 권력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불러왔다.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도요토미와 도쿠가와는 권력을 놓고 맞서게 됐다. 

도요토미가 먼저 움직였다. 도요토미는 서부지역에서의 전쟁을 멈추고 급히 군대를 복귀시켰다. 이를 통해 권력투쟁의 주도권을 선점하고 우호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여기에 오다의 후계가 선정에 깊숙히 개입하며 자신의 영향력이 크게 미칠 수 있는 인물을 후계자로 옹립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에 도쿠가와와 지지세력일 맞서기 시작했다.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양 진영의 대결은 결국 도요토미가 주도권을 잡았고 도쿠가와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쿠가와의 세력까지 흡수한 도요토미는 일본의 남은 지역까지 장악하며 전국시대를 통일한 인물이 됐다. 토요토미는 명목상의 통치자인 일본이 천황으로 부르는 일왕 아래 총리 격인 관백 자리에 올랐다.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도요토미는 이후 가장 강력한 정적이라 할 수 있는 도쿠가와의 기존 영지를 몰수하고 일본의 관동지방인 에도 지역으로 추방했다. 도쿠가와로서는 정치,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었지만, 이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도쿠가와는 에도지역을 개발하고 농업생산력을 극대화했다. 이를 통해 경제적 부를 쌓은 도쿠가와는 다시 힘을 키울 수 있었고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이 에도 지역은 현 일본의 수도인 도쿄 지역이다. 이후 에도는 도쿠가와 정치적 기반이기도 했고 훗날 수백 년간 일본을 지배한 에도막부시대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지만, 긴 전쟁 과정에서 세력이 커진 지역 영주들의 무사 세력들의 권력의 큰 위협이었다. 이들을 모두 힘으로 제압하기는 무리였고 그들의 충족시킬 이익을 나눠주기도 무리가 있었다. 자칫, 도요토미의 권력이 흔들린다면 영주들과 무사들은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이에 도요토미는 국외로 눈을 돌렸다. 이는 대외 무역 활성화와 함께 대규모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영토 확장을 통해 봉건적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수도 있었다. 이는 도요토미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정복자로서의 야망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정복욕은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로 향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던 대동아 공영과 닮아 있었다. 

 

일본의 고성

 


이런 도요토미의 야욕을 주변국인 조선과 명나라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이전에 전쟁에 대비할 여력이 없었다. 조선은 긴 평화시기기 지속되면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됐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대비가 허술했다. 여기에 정치는 붕당정치가 극단적 대립 양상으로 발전하며 안정되지 못했고 사회 구조의 모순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리더십과 정치권의 움직임이 필요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명나라 역시 국력이 최정점에서 쇠퇴 조짐을 보였다. 황제는 무능했고 관료 조직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철저히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도요토미의 지휘 아래 일본은 나고야에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만들고 다수의 함선과 무기, 군사들을 준비했다.

이런 일본의 침략 가능성은 일본 내 전쟁 반대세력 등을 통해 조선에 전달됐고 일본의 신무기 조총, 화승총에 대한 정보도 전해졌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수백 년간 지속된 평화시기를 깨는 전쟁 준비를 하는 게 정권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역시 무시됐다. 조선은 사실상 전쟁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정규군 수가 크게 부족했다. 조선이 머뭇거리는 사이 전쟁을 향한 시계의 초침을 멈춤이 없었다. 

1592년 5월 23일 도요토미의 명령을 받은 일본의 전면 침공이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무려 수십만의 대군을 한반도로 상륙시켰다. 일본은 부산을 손쉽게 점령했고 고니시와 가토를 선봉장으로 내세워 두 방면으로 북진했다. 조선은 뒤늦게 대응했지만, 신무기 화승총 등 일본군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고 군대의 조직과 전력도 허술했다. 특히, 일본군의 화승총은 조선군에서 공포 그 자체였다. 여기에 일본군은 오랜 내전을 거치며 다수의 실전을 경험한 군대였다. 조선 최고의 장군 신립이 이끄는 중앙군이 충주에서 대패한 이후 조선은 더는 군사적 대응을 하기 어려웠다.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했다. 한 달여 만에 일본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왕 선조는 급히 몽진을 결정했고 개성, 평양을 거쳐 명나라 국경의 의주로 향했다. 여차하면 명나라로의 망명까지 계획했다.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눠 전쟁 발발 후 세자로 급히 책봉한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겼다. 광해군은 적진에서 분조를 이끌며 흐트러졌던 관군들의 전열을 정비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살폈다. 광해군의 지도력과 함께 조선은 점점 반격의 가능성을 만들어갔다. 

그 사이 한양을 점령한 도요토미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야망을 분명히 했다. 도요토미는 조선을 장악한 이후 명나라 진격을 꿈꿨고 종국에는 인도 정벌까지 계획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조선의 반격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열을 정비한 조선 관군이 반격에 나섰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며 바다의 재해권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애초 계획했던 육군과 해군이 함께 북상하는 수륙 병진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일본에서 조선으로의 보급도 어려움이 커졌다. 이에 더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육지 보급을 어렵게 했다. 일본군은 조선 영토 내 고립되는 상황에 몰렸다. 조선의 강력한 저항에 일본군의 현지 보급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곡창지대인 호남지역 장악에 실패하면서 보급은 더 어려워졌다. 점차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변해갔다. 이는 도요토미의 애초 계획과는 거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도요토미는 빠른 시일 내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왕을 잡아 항복을 받는 그림을 그렸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지역 영주의 항복은 그 지역의 장악을 의미했다. 전정에 패한 영주는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하거나 명예롭게 자결하는 게 그들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조선 임금 선조는 급히 몽진했고 그들의 전쟁계획이 어긋났다. 조선 백성들은 그들을 버리고 도망간 왕과 사회 지도층에 분노했고 분노의 표시로 궁궐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침략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강하에 저항했다. 이는 일본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도요토미는 전쟁에 나선 일본군의 사기 진작과 포상을 위해 병사들이 죽인 조선인들의 수를 그 기준으로 했다. 그들의 밴 조선인들의 수급은 일본으로 전해졌고 집계됐다. 이후 사람들의 수급은 코로 대체됐다. 일본군에게 조선인들은 그들의 전공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애초 수급으로 수를 헤아리다 코를 베어 그 숫자를 전공의 기준으로 삼았다. 수많은 조선인들의 코가 일본으로 향했다. 지금도 일본 곳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희생된 조선인들의 코 무덤이 남아있다. 

 

오사카 야경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도요토미는 한 편에서 강화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 전쟁에 참여한 영주들과 무사들이 불만이 커질 수 있고 도요토미의 권력 기반이 흔들릴 수 있었다. 최대 정적인 도쿠가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세력을 키워가는 상황이었다. 이 또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화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애초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조선을 배제한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 자체가 문제가 있었고 토요토미의 무리한 요구 조건도 문제였다. 도요토미는 명나라 황실 공주를 자신의 후궁으로 보낼 것과 조선 영토 일부는 일본에 넘겨줄 것 등을 요구했다. 명나라가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고 전쟁의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한편에서 일본은 전비 마련을 위해 또 다른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그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았다. 유럽의 본격적인 대외 진출이 이루어진 대항해 시대가 열린 이후 전개됐던 노예무역이 조선에서도 있었다. 약 10만여 명 그 이상으로 추산되는 조선인들이 노예선에 실려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 한편에서는 명나라를 통해 유입된 외국인 용병들의 활약도 있었다. 이들은 포르투갈을 통해 명나라로 들어온 아프리카 대륙의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생소한 흑인들이었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그림에도 그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용병들은 주로 해상 침투로 적전을 파괴하는 등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사람들을 그들을 해귀라고 불렀다. 

이렇게 국제전 양상으로 발전한 임진왜란은 강화협상이 결렬되면서 또다시 전면전에 돌입했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도요토미는 대군을 한반도에 파견하기에 앞서 그 정지작업으로 조선 조정을 흔드는 계략을 통해 조선 수군을 이끄는 이순신을 실각시켰다. 이순신이 모함으로 관직을 잃고 백의종군의 처지가 된 사이 일본 수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대파하며 조선 침략의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

일본군은 초기 전쟁에서 진출하지 못했던 호남지역도 장악하며 기세를 올렸다. 정유재란은 약탈 전쟁의 양상을 보였다. 일본군은 조선의 각종 문화재와 보물 등을 수탈했고 다수의 기술자들은 납치하는 등 인적, 물적 수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하고 있었다. 훈련도감 등 군사 양성을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 상비군을 다수 확보했다. 일본만의 무기였던 화승총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명나라 군 역시 개전 초기부터 함께 했다.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일본군의 기세는 사그라들었다. 조. 명 연합군에 밀려 일본군은 남해안 지역으로 밀렸다. 그사이 이순신이 복귀한 조선 수군이 다시 재해권을 장악했다. 

불리해진 전황 속에 전쟁의 원흉인 도요토미가 돌연 사망했다. 이전부터 병이 있었던 그였지만,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는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눈을 감았다. 오다에 이어 일본을 지배했던 절대 권력자가 역사에서 퇴장했다. 그의 사망 이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고 7년 전쟁을 막을 내렸다. 조선에는 엄청난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다. 일본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많은 인명이 죽고, 막대한 전비가 소모됐다. 영주들의 도요토미 세력에 대한 불만이 커지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오랜 세월 때를 기다렸던 도쿠가와의 세력을 확대했다. 도쿠가와는 에도를 중심으로 중앙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이는 도요토미 세력과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미 대세는 도쿠가와로 향했다. 도쿠가와는 다수 영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내전을 승리했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1603년 도쿠가와는 자신이 중심이 된 에도 막부 시대를 열었다.

 

 


도요토미 가문은 일개 영주로 전락했고 도쿠가와는 그들의 마지막 근거지 오사카성을 공략해 그 가문을 멸망시켰다. 이후 일본은 수백 년간 에도 막부가 통치했다. 결국, 에도 막부는 전후 수습에 주력했고 대외 전쟁을 지양하고 조선의 통신사를 받아들이는 등 인근 나라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평화시대를 열었다. 이 평화의 시대는 이후 수백 년간 지속됐다. 일본의 혼란기였던 전국시대 3인의 인물 중 도쿠가와는 마지막 승자로 기록됐다.

그는 실력을 쌓으며 때를 기다렸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그의 권력을 세습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전형적인 무장으로 힘의 정치를 했던 오다 노구나가, 치밀한 전략가였지만, 허황된 욕심으로 스스로 몰락을 자초한 도요토미와 달리 도쿠가와는 보다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어떤 이들은 도쿠가와가 오다와 도요토미를 제치고 권력을 잡았다면 임진왜란의 비극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전국시대를 통일했다 하더라도 사회적 문제가 없어진 건 아니었고 긴 분열의 세기 후 통일한 나라에서 내부 갈등은 불가피했다. 외부에서 해법을 찾는 노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이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고 명나라의 힘이 약해지는 상황인 건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침략 그 형태만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일본은 내부의 문제를 대외 강경책으로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와의 긴장관계를 고의적으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반한 정서를 정부 차원에서 자극하기도 한다. 과거사와 관련한 중요 인사들의 망언에 가까운 발언도 계산된 행동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와 달리 한국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가 됐고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높아졌다.

이제는 외침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 더 나아가 상대를 제대로 아는 노력이 더해질 필요가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몰랐고 그들의 침략 야욕을 과소평가하거나 외면했다. 이는 역사의 큰 후퇴로 이어졌다.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 일본 전국 시대는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세계사라 할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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