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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가져 먼저 손꼽히는 건 단연 산업혁명이다. 물론, 그 전 채집과 수렵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인류가 정착을 하고 농경사회로의 전환을 가능토록 한 신석기 혁명의 파급력도 엄청났지만,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은 매우 빠른 시간에 사람들의 삶과 사회 질서, 시대 흐름을 바꾸어 놓은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이에 산업혁명을 정의하면 통상적으로 1760년 경부터 1820년 사이 영국에서 시작한 기술혁명과 새로운 제조공정으로 전환, 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인 큰 변화를 말하기도 한다. 이후 영국을 포함한 서구 사회는 급속한 산업회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는 동. 서양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서양이 세계질서를 주도하게 됐다.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는 지금도 유효하다. 서구사회의 각종 시스템과 사상, 문화가 일종의 인류의 표준이 됐다. 산업혁명은 세계를 변화시켰고 그 변화는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서구 국가들이었다. 물론, 세계가 전체적으로 발전하고 근대화되면서 인류의 삶이 보다 윤택해지고 편안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가 근대화에 혜택을 받은 건 아니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의 역사. 그 속에서 밝은 면을 함께 대비하며 산업혁명의 여러 면을 입체적으로 살폈다. 

산업혁명의 시작은 면직물 산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영국에 면직물이 전해지기 전까지 옷감은 모두 양털을 재료로 한 모직물이었다. 그에 따라 양모 모직물 산업은 영국에서 그 비중이 매우 컸다. 이 모직물 산업을 위해 농촌지역은 양의 사육을 모두 대규모화 하고 효율화하기 위한 소규모 농장을 대규모 농장에 병합하는 인클로저 운동이 오랜 세월 활발히 전개됐다. 이를 통해 농업은 대규모화 집약화됐고 양의 사육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에 농지를 잃은 농민들은 인클로저 농장 안에 편입되거나 땅을 잃고 도시 노동자로 전락했다. 

 

초창기 증기기관

 


이렇게 중요한 영국의 양모산업은 면직물이 인도로부터 본격 수입되고 유통되면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과거 대항해 시대 당시 유럽에서 선호하는 향신료의 주 수입처였던 인도 캘리컷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면직물은 모직물에 비해 가볍고 세탁도 훨씬 용이했다. 가격 역시 모직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면직물은 귀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당연히 수입 물량도 급속히 늘어났다. 돈이 되는 면직물을 무역업자들이 마다할 리 없었다. 이는 기존 모직물 산업에 큰 위협이었다. 

이에 대하 모직물 산업 종사자와 양모 업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는 인도한 면제품에 대한 극심한 반감으로 이어졌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도 했다. 이에 영국 의회는 양모 업자들의 압력에 면제품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면직물 제품의 사용을 강제로 막는 건 불가능했다. 변화한 흐름을 영국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 의회는 1736년 맨체스터 법을 제정해 면직물 수입을 자유화했다. 

이런 변화가 영국 산업계는 빠르게 대응했다. 인도산 면직물의 수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영국에서 면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에 면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과거 사람의 손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수력을 이용해 생산성을 높여 나갔다. 

이런 면직물 산업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건 새로운 동력 기관은 증기기관의 발명이었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석탄을 원료로 증기를 발생해 동력을 얻는 장치로 기존 동력 장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제임스 와트는 기존의 증기기관을 개량하고 상용화했다. 1776년 마침내 증기기관 제품이 등장했다. 이런 동력 기관의 등장은 방적기계의 성능을 크게 발전시켰고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방적기의 생산성을 크게 늘었고 이는 면제품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새로운 기술에 의한 제조공정의 큰 변화,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방적공장에서 적용된 증기기관은 이후 그 사용 범위를 넓혔다. 사업 전반에 증기기관의 사용됐고 산업 생산력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였다. 이는 경제 전반에 변화를 촉진했다. 공장의 생산성 향상과 함께 대량생산 제품의 운송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운송 기술 발전으로 불러왔다. 이는 증기기관차로 발명과 실용화로 이어졌다. 영국의 교통수단은 철도를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됐다. 

증기기관의 중요 동력원인 석탄의 생산지와 공장이 맨체스터 등의 공업 도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 런던의 시장을 연결하는 철도 교통망은 대량 생산 시대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대량 소비시대를 현실화했다. 물류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철도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고 사람들이 이를 소비했다. 또한, 철도는 제품의 이동뿐만 아니라 사람의 이동도 보다 원활하게 했다.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지역의 역사, 문화를 연결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은 일정하게 정해진 기차 시간에 맞게 생활 패턴을 변화시켰고 이는 일상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자리 잡게 했다.

 

증기기관

 


그동안 멀게만 느껴지던 내륙과 해안지역의 교류는 식문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영국 노동자들의 대표적 음식은 피시 앤 칩스 생선과 감자가 결합한 요리의 탄생과 연결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증기관을 이용한 증기선은 국내는 물론이고 대외 교류를 원활하게 하면서 영국의 해외 진출과 교류, 식민지 지배 확대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통해 영국의 경제는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급속히 그 중심이 이동했다. 대 자본가가 출현했고 대형 공장이 생산을 주도했다. 도시인들은 보다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강력한 반발도 있었다. 이는 러다이트 운동 등으로 표출됐다. 러다이트 운동은 대형 공장이 발전하면서 자본가들에게 제품을 공급하던 소규모 수공업자들과 노동자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벌인 저항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때 영국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량 생산의 대표적 산물인 섬유기계를 파괴하는 등의 행동도 일어났다. 이에 영국 정부는 강력히 대응했고 주동자들이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이후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화와 자동화, 신기술에 대해 저항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본가들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노동운동 성격이 강했다. 

이런 부작용에도 영국의 산업혁명은 영국 경제를 급속히 성장토록 했고 영국의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최강국이 되도록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국민소득은 급증했고 생활수준도 향상됐다. 이를 바탕으로 공장 등을 경영하는 대 자본가가 등장했고 그들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영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자본가들은 영국의 상류사회의 새로운 귀족, 신흥 상류층 세력을 형성했다.

노동자들 역시 소득의 증가와 여가 시간이 늘어나면서 취미생활을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이는 영국의 대표적인 구기 경기는 축구의 대중화로 연결됐다. 노동자들은 지역에서 축구 클럽을 결정하고 이 축구클럽들은 리그를 형성했다. 세계 최대 프로 축구 리그를 대표하는 팀들 상당수는 이런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축구 클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외에도 막대한 자금이 경제 발전 속에 흐르게 되면서 금융업이 발달하고 대형 은행들이 속속 등장했다. 지금도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국 금융업의 시작이 이 시점이었다. 또한, 그 소비층으로 등장한 자본가들을 위한 고급 쇼핑장소인 백화점이 등장하는 가 하면, 제3의 운송수단인 지하철도 영국 런던에 최초로 건설되어 운영됐다. 

말 그대로 눈부신 발전이자 변화였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매우 빠르고 혁신적이었다. 런던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혁신적인 도시가 됐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는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의 부와 번영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보유한 초 강국으로 그 입지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이런 영국의 발전은 소수  자본가와 일부 노동자들에게 밝은 빛으로 작용했다. 노동자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층 노동자들은 극한의 노동 환경과 저임금,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빈곤한 삶을 살아야 했다. 지금 많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독특한 장소가 된 런던의 이스트엔드 지역은 산업혁명 시기 하층 노동자들과 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영국의 대표적 슬럼가였다. 

 

면직 공장

 


하층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농촌에서 농지를 잃고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상경한 농민들이었다. 이는 도시의 집중화로 이어졌다. 인구는 급속히 늘었지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주택이나 각정 사회기반시설은 턱 없이 부족했다. 무한 공급이 가능한 노동시장의 상황은 노동환경을 더 열악하게 만들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주 80시간 이상의 중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근무환경을 강요했다. 노동자들은 당장 생계를 위해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노동자들은 어느새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그런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항시 산업재해에 노출되어 있었고 상당수는 사고로 피해를 입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도 어려웠다. 열악한 근무환경은 각종 직업병으로 이어졌다. 특히 방직공장이나 면직물 공장 근로자들은 상당수가 결핵 등 폐 질환에 시달렸다. 한때 결핵은 영국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호흡기 질환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근로 환경을 규정하는 공장법이 있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자가 풍부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건 직장을 잃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됐다. 노동자들에게는 열악하지만, 공장에서 일하고 얼마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게 소중했다. 철저히 자본가 우위의 노동환경과 노동시장이었다. 

이는 과거 197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해 농어촌에서 무장성 서울로 공장이 있는 도시로 상경한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게 공장에 취직한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상황에도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수출 대한민국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하여 산업역군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지만, 그들에 대한 임금이나 노동환경 등을 열악하기만 했다. 이후 각성한 노동자들이 의해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노동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사회는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를 누르기만 했다. 이는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하여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항거로 이어졌다. 영국 역시 다르지 않았다. 

 

증기 기관차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직업도 있었다. 일명 인간 자명종, 인간 알람, 일종의 모닝콜 서비스라 할 수 있는 노커어퍼가 그들이었다. 노커어퍼는 이른 새벽 노동자들이 집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이었다. 이들은 긴 장대를 가지고 다니며 그들과 계약한 노동자들 집 창문을 두드리거나 소리를 내는 방법으로 그들을 깨웠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매일 잠에서 깨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자명종은 가격도 비싸고 정확하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얼마간의 돈을 주고 잠을 깨워주는 사람을 고용하는 편이 더 편리했다. 지각이 해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웃픈 현실을 반영하는 일이었다. 실제 노커어퍼는 산업혁명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꽤 오랜 세월 전문직으로 자리했었다.

힘겨운 노동자들의 삶에서 어린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린이들은 더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었지만, 산업혁명 시대 어린이들은 더 가혹한 착취 구조의 가장 밑단에 있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살았다. 하층 노동자들의 가정에서 어린이들은 마음껏 공부할 수 없었고 얼마라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중 많은 어린이들은 작은 체구에 적합한 굴뚝 청소부로 일했다.

하지만 이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고 실제 굴뚝 청소 중 사망하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 해도 발암물질 및 유해 물질 가득한 작업환경에서 폐 질환과 암 등 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고생하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굴뚝 청소가 남자 어린이들이 일이었다면 여자 어린이들은 성냥 공장 등에서 일했다.

문제는 이 성냥공장 역시 불이 붙는 재료가 발암물질이었다는 점이었다. 소녀들 상당수가 암으로 사망했다. 공장주들은 이들에게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암 발발은 공장을 그만둬야 함을 의미했다. 안데르센의 비극적인 소설 성냥팔이 소녀는 당시 어린이들, 성냥공장에서 소모되고 버려지는 소녀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산업혁명 시기 이런 어린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린이들은 자본가들이 더 쉽게 더 싸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었다. 당연히 어린이들의 노동문제를 규제할 법규도 미비했다. 이후 맨체스터의 면직 공장의 대형화재로 인한 다수의 소녀들의 사망 사고가 발생한 후 이에 대한 여론이 일어났고 1883년에 가서야 공장법이 개정되어 어린이들의 노동을 금지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힘없는 어른들 여성들 역시 열악한 노동환경은 다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 강도 높은 노동강도는 물론이고 상당수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또는 강제로 납치되어 매춘 등 일에 종사했다. 그런 여성들 상당수는 살인, 강도 등 흉악범죄의 표적이 됐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영국은 세계 최강국이 되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지만, 그런 영국 경제의 중요한 기반인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의 거주지의 생활환경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비위생적인 환경은 감염병의 위험을 높였고 많은 이들이 각종 장티푸스 등 수인성 질환으로 사망했다. 더 큰 문제는 주거환경이었다. 그나마도 집에서 살 수 있는 이들은 다행이었다.

 

굴뚝 청소부

 


많은 이들은 급조된 집에서 살거나 하루하루를 보냈다. 심지어 죽은 이가 써야 할 관을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여관과 밧줄에 의지해 자야 하는 숙소가 성업했다. 그마저도 어려운 이들은 빈민 구호시설에서 누워 쉬지 못하고 앉아서 밤을 지세워야 했다. 

이런 하층 노동자, 빈민들을 삶은 한 편에서는 특이하고 색다른 유희의 수단이 됐다. 1880년대 영국 상류층에서는 슬럼지역을 관광하는 상품이 유행했다. 상류사회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체험 삼아 방문했다. 그들에게는 신세계였고 신기한 체험 일지 몰랐지만, 그 순간 슬럼 지역 사람들은 상류층들에게 동물원에 있는 동물일 뿐이었다. 그만큼 빈부 격차는 극심했고 상류층과 하층민의 삶은 크게 분리되고 사회 계층적 차별은 신분 외에 사회적 부의 기준으로 크게 구분되고 차별됐다. 

이런 빈부 격차 외에도 사회 공통의 문제도 발생했다. 무 분별한 석탄의 사용은 엄청난 매연의 발생을 초래했다. 이는 심각한 대기오염과 함께 강력한 스모그 발생으로 이어졌다. 지금 인도나 중국 등에서 볼 수 있는 앞이 보이지 않는 스모그가 영국 런던을 수시로 뒤덮었다. 이런 대기 오염을 다수 국민들에게 폐 질환을 일으키게 했고 그로 인한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한때 영국 국민들의 사망 원인 1위가 결핵이었다. 그 사망자들의 상당수는 노동자들이었다. 또한, 공장과 거주지 등에서 나오는 각종 오폐수는 강을 오염시키고 런던 템스 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들었다. 오염된 물은 다시 전염병의 창궐을 불러왔다. 경제는 나날이 발전했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이 더 떨어지는 역설이 발생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노동자들은 점점 현실에 눈을 뜨고 이를 개선하고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자본가들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 파업 등 단체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정치권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투표권을 확대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의 정당이 창당되기도 했다.

현재 영국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진보 정당인 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해 1900년 창당됐다. 이런 노력들이 더해지며 선거법이 개정되고 투표권의 확대가 현실이 됐다. 또한,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인 공장법이 지속 개정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빈구 격차와 사회 양극화는 지금도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여전히 상당수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이는 지금의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의 문제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도 발전했지만, 그 혜택을 소수 사람들의 독점하는 불평등 구조는 산업혁명 이후 지속된 인류 발전이 과연 모두를 행복하게 한 것인지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한다. 

 

 


현재 우리는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에 이어 전기 에너지 사용과 컨베이어 벨트로 요약되는 공장 자동화, 대량 생산으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전자 기술과 IT 기술 발전에 근거한 3차 산업혁명, 각종 사물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현세와 사이버 세상이 통합되어 경계가 모호해지는 ICT,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보편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발전의 속도는 산업혁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그 변화도 빠르게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모든 이들이 행복을 느끼는 건 아니다. 각종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사회 발전과 긍정의 변화를 말하지만 과연 우리 삶이 나아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사람들은 그런 문제들을 제기할 여유도 없이 그저 변화 속에 휩쓸리고 그 속에서 빠르게 적응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한층 고착화되고 있고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은 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도 이런 사회 문제를 애써 외면하거나 강한 자들이 모든 걸 가지는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을 지향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면 살수록 우리는 산업혁명 시대의 하층 노동자들처럼 쓰고 버려지는 부속품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어느새 우리는 산업혁명 시대 인간 모닝콜에 의해 깨워지는 노동자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는 사회 발전이 나의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사회 현상과 관심을 가지고 함께 연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시대 노동자들은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조직된 힘은 사회를 보다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는 나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살핌에 있어 그 빛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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