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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보는 세계지도에서 아일랜드는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거리만 먼 나라다. 섬나라 영국의 서편에 자리한 또 다른 섬나라 아일랜드는 물리적 거리는 우리와 멀지만,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아픈 역사는 공유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영국에 의한 피 식민 지배의 역사는 무려 750여 년에 이른다. 그 기간 아일랜드는 수많은 고난의 역사를 쌓았고 그렇게 생긴 응어리는 지금도 영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으로 국민들의 마음 한 편에 남아있다. 

2022년은 1922년 아일랜드가 자유국으로서 독립을 선포한지 100년이 되는 해다. 유럽의 마지막 식민자였던 아일랜드는 이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아일랜드는 긴 고난의 역사를 견뎠고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렇게 독립한 아일랜드는 1970년대까지 농업과 축산이 주 산업이 유럽의 빈국이었지만, 적극적인 외국자본 유치와 금융업 육성, 이를 위한 과감한 감세 정책을 바탕으로 가파른 경제성장을 이뤘다.

2020년 기준 국민 1인당 GDP가 세계 3위에 이르며 과거 그들의 지배했던 영국을 능가한 부국으로 변신했다. 지금도 아일랜드에는 아일랜드의 과감한 법인세 감면 등 정책적 지원 등에 힘입어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화이자 등 세계 유수의 다국적 기업들이 유럽 본사를 세우는 등 유럽 경제의 중요 포스트로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반전의 역사를 쓰고 있는 아일랜드의 역사 기원은 기원전 5세기 경 프랑스 갈리아인들이 북서 유럽인인게일인과 함께 자리하면서 시작했다. 이후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에 밀린 브리튼인들이 아일랜드에 넘어왔고 5세기 경 기독교가 이곳에 전파되어 정착했다. 현재로 아일랜드는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다. 

 

 

아일랜드 지도

 


이런 아일랜드에 영국의 침략이 본격화된 건 12세기 경이다. 1066년 노르만족이 잉글랜드 침공 후 정복했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1171년 헨리 2세가 아일랜드는 침공한 이후 그 영향력을 키워가던 영국은 1534년 헨리 8세 시기 아일랜드를 정복한 이후 영국에 복속했다. 본격적인 영국 식민지 시대의 시작이었다. 영국의 아일랜드 정복은 한 편으로는 개신교 국가인 영국을 둘러싼 가톨릭 국가의 프랑스,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연합을 사전에 차단하는 전략적인 측면도 있었다.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를 더 큰 비극으로 몰고 간 인물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주역인 크롬웰이다. 청교도 혁명 성공 후 왕정을 없애고 영국 유일의 공화정 국가를 이끈 절대 권력자인 호국경에 올랐다. 그는 매우 강경한 대외 정책을 밀고 나갔다. 아일랜드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아일랜드가 가톨릭 국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고 완전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않고 있는 아일랜드의 문명화라는 목표도 크롬웰의 침략 이유 중 하나였다.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침공해 대학살을 자행했고 아일랜드 국민들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또는 그들에게 협력하는 대지주 아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크롬웰은 이를 통해 아일랜드의 지배계급을 완전히 바꾸고 영국의 영향력을 더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는 영국의 이익에는 매우 부합하는 일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생산되는 밀과 보리, 귀리 등 각종 곡물들은 모두 영국으로 수탈당했다. 아일랜드인에게 남겨진 먹거리는 감자 정도밖에 없었다. 당시 감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작물로 생소하기도 했고 영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작물이 아니었다. 이후 감자는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이 됐고 이에 따른 다양한 감자요리가 발달했다. 그 이면에는 슬픈 역사가 담겨있다. 

이런  상황을 이끈 크롬웰은 왕정이 다시 복구됐지만, 이후에도 영국에서 추앙받는 인물로 남아있다. 그는 시민의 자유, 의회의 권리를 상징하는 인물로 영국에 남아있지만, 아일랜드인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아일랜드 대기근 스캐치 - 워키백과

 


실제 아일랜드와 영국 총리 간의 회담 시 회담장 한편에 걸려있는 크롬웰의 초상화를 보고 아일랜드 총리가 바로 회담장을 박차가 나갔다는 일화는 아이랜드인들의 크롬웰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해프닝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임진왜란을 초래한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1905년 을사늑약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국민들의 원한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는 지금도 일본에서 영웅이다. 

이렇게 감자 하나만을 남기도 모든 걸 빼앗긴 아일랜드인들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1800년대 중반 전 세계에 닥친 감자 역병이 아일랜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일랜드의 감자 수확량이 급감했고 주식이 사라진 아일랜드인들은 심각한 빈곤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런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1845년부터 1852년까지 아일랜드인들의 삶을 파괴했다. 다수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영양 상태가 부족은 다수의 전염병 창궐로 이어졌다. 이에 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의 기아와 병으로 사망했다. 

아일랜드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영국의 미온족인 대처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영국의 구호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 규모도 미미했다. 그에 반해 대지주들은 소작농들에게 세금을 계속 걷어들였고 세금을 내지 못한 이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감자 외에는 여전히 곡물 수확인 이루어지고 식량은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충분히 굶주림에 고통받는 아일랜드인들을 구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대기근에 대한 대처는 상식 밖이었다. 아일랜드 지역을 통치하는 영국은 마땅히 기근에 시달리는 이들을 구호해야 했지만, 더 억압하고 사람들을 더 궁지로 내몰았다. 심지어 영국은 다른 나라의 아일랜드 구호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오스만 제국이 금전과 물자 지원을 원했지만, 영국은 그 규모마저 크게 제한했다. 이런 영국의 대응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영국에 대한 강한 원한을 가지도록 했다. 현재는 과거와 다르지만,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 기류가 강하다. 우리와 일본과 같이 가깝고도 먼 나라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 아일랜드인들은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100만 여명이 사망했고 100만명 넘게 고국을 떠밀리 듯 탈출해 이민길에 올랐다. 아일랜드인들의 대규모 이민 역사의 시작이었다. 과거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들인 빈곤을 탈출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이민을 떠났던 모습과 너무 닮아있는 아일랜드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아일랜드인들의 가장 많이 정착한 땅은 미국이었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다. 이를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험난한 항해 길도 그들은 마다하지 않았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의 가장 밑바닥 3등 칸의 승객들은 당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아일랜드인들 그 자체였다. 

 

성 패트릭 데이 이미지

 


그렇게 미국으로 향한 아일랜드인들은 뉴욕과 보스턴, 미국 동부지역 도시에 모여들었다. 한때 뉴욕 인구의 25% 이상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꽃길은 절대 아니었다. 이전에 미국에 자리를 잡은 이민자들의 텃세는 강했고 강력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일랜드인들이 할 수 있을 제한적이었대 이민 초기 아일랜드인들은 대부분 하층 노동자로 일했다. 또한, 일상에서 식민지 국민으로서 상당한 차별에 시달리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아일랜드인들의 미국 이민사는 점점 반전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아일랜드인들은 다른 미국인들이 꺼리는 직종인 소방, 경찰, 군에 진출해 역량을 키웠고 사회적 기반을 다졌다. 이민 1세대의 기반 위해 2세, 3세들의 사회 진출이 늘었고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하나 둘 들어갔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지위가 세력이 점점 커졌다. 가장 많은 이민자의 숫자는 어느새 큰 힘이 됐다. 이는 미국 정취권에서도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더 나아가 아일랜드계 정치가들이 다수 등장했다. 대표적인 케네디 가문이 있고 미국 최근 미국 대통령이었고 레이건과 빌 클린턴, 현 대통령인 조 바이든도 아일랜드계다. 바이든은 그 스스로가 아일랜드계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다.

정계는 물론이고 경제계에도 아일랜드인들의 진출이 활발했다. 대표적인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날드의 창업자 맥도널드 형제, 미디어 부분에서 큰 영향력이 있는 기업 월트 디즈니의 창업자 디즈니도 아일랜드계다. 문화계에서는 비틀즈의 멤버이자 팝 음악계에서 여전히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존 레넌이 있었다. 이민자 출신은 아니지만, 아일랜드의 록 그룹 U2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문화계의 아이콘이다. 

이렇게 아일랜드 이민자 후세대들은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다수 자리르 했고 미국에서 아일랜드계의 힘은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아일랜드는 해외에서도 그들만의 네트워크는 구성했고 훗날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후원하며 독립에 큰 힘이 됐다. 이는 아일랜드인들의 중요한 행사인 성 패트릭 데이를 전 세계적인 행사로 만들었다.

성 패트릭 데이는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도하고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성 파트리치를 기념하는 날이다. 3월 17일은 그가 선종한 날로 아일랜드에서는 그를 기념하기 성대한 행사를 연다. 그날 아일랜드인들은 초록의 옷이나 모자를 모두 착용하고 강물도 초록의 물감을 타는 등 온 일상을 초록의 빛으로 물들이게 된다.

 

 


이 행사는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아일랜드 이민자가 많이 진출한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등에서도 행사가 열린다. 이제는 아일랜드인들만의 행사가 아닌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즐기는 행사가 됐다. 이를 통해 아일랜드는 그들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단합하는 시간을 가진다. 특히, 식민 지배를 당하는 상황에서 이 행사의 의미는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이민자들에게도 각별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일랜드는 대표하는 또 하나는 세계의 최고 기록들을 모아 기록하는 기네스북이라는 책을 편찬하는 아일랜드 맥주 회사 기네스다. 유럽의 대표적 흑맥주인 기네스 맥주는 1759년부터 제조되어 지금은 전 세계 수출된다. 기네스는 맥주 회사 이전에 아일랜드의 역사이기도 했다. 이 맥주를 생산하는 가문은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하는 등 선행을 베풀기도 했고 이를 통해 국민 맥주로서의 위상을 더 높일 수 있었다. 지금은 국제적인 브랜드로 자리했다. 

이렇게 아일랜드는 수백 년에 걸친 피 지배의 역사 속에서도 그들의 문화적 역사적 전통을 지키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아일랜드인들은 긴 식민 지배 속에서도 영국에 동화되지 않았다. 이는 훗날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원천이 됐다. 해외에 있는 아일랜드인들의 단합된 힘도 아일랜드 독립에 또 다른 지렛대가 됐다. 

아일랜드의 독립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긴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아일랜드인들의 끈기와 의지의 산물이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국. 내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일제에 맞선 우리 민족과 닮아 있다. 해방 후 어려움을 이겨내고 경제 발전을 이뤄낸 점도 공통점이 있다. 먼 곳에 있는 아일랜드지만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진다. 앞으로 방송에서 다루게 될 그들의 독립투쟁사가 기대된다. 



사진 : 프로그램/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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