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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봄의 절정에서 맞이하는 초록의 자연과 화창한 하늘 따뜻함과 화사함이다. 이에 사람들은 5월의 계절의 여왕이라 말한다.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요소 들로만 채워진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여러 기념일이 다수 있어 가족의 달이라고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5월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0년 광주의 5월은 우리가 알던 5월이 아니었다. 이제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광주 민주 항쟁으로 명령되고 불리는 당시 5월의 광주는 비극으로 얼룩졌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민주 정부의 수립과 5월 17일 전격 발표된 전국 비상계엄 철폐, 12.12 군사 반란 이후 5개월간, 국가 권력을 찬탈해 가는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를 진행하고 있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 운동으로 정의된다. 

5.18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연장 선상이었고 신군부 세력이 중심이 또 다른 군사정권인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광주가 아닌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왜 그때 광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광주 시민들은 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에 짓밟히고 살육을 당해야 했는지, 그런 피해를 당하고도 오랜 세월 광주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왔어야 하는지 등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구 전남도청

 

TBS는 5.18 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이해 그날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다큐와 달리 광주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때를 돌아봤다. 또한, 광주를 알지 못하는 10대 소녀들에게 1980년 5월의 광주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더 뜻깊었던 건 5월 광주의 비극과 진실을 알리는 데 있어 결정적 증거가 된 사진을 담았던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진 기자들이 함께했다. 그들은 당시 광주의 실상과 참상을 증언하고 사진으로 그 장면을 담았을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는 신군부의 엄청난 감시와 검열 속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언론이었지만, 이 기자들은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사진으로 현장을 담았고 그 사진을 소중한 보관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훗날 역사의 증거가 됐고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광주의 기록을 담은 영상과 사진이 외신 기자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알고 있다. 실제 외신기자들의 사진과 영상, 기사들은 전 세계에 전해져 광주의 비극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우리 언론은 신군부 세력에 의해 장악됐고 진실을 보도할 수 없었다. 양심의 목소리를 내는 건 엄청난 고초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언론의 중요한 의무인 사실 보도와 불의에 대한 저항 비판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됐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언론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검열에 막혀 보도가 통제되고 보도 역시 제한된 정보와 함께 왜곡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광주의 민주화 운동은 어느 순간 소요사태, 북한의 간첩이나 불순분자들에 의한 폭동 등으로 보도됐다. 이에 광주 민주화 운동은 광주사태로 변질됐고 5공화국 내내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광주사태라는 말이 상당 기간 사용됐다. 

당시 광주는 교통과 통신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고립됐다. 그들의 상황을 외부로 알릴 방법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인터넷이나 SNS 등 다양한 소통의 수단이 있지만, 당시는 언론의 보도나 전화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광주의 비참한 상황은 광주 외에는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같은 호남 지역 내에서도 광주 민주화 운동은 광주사태였다. 1980년 5월 나머지 지역은 찬란한 5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광주는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구 전남도청 광장

 


5.17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이후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전국 각지의 대학교에는 군인들이 배치됐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신군부 세력들 말로는 소요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함께 신군부 세력은 정치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상당수 정치인들이 체포되거나 구금됐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신군부 세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세력들이 사라지고 그들의 권력 찬탈을 막을 방법이 모두 사라졌다. 

프로그램에서는 신군부 세력을 등장을 과거 유신독재 체제의 연장이고 유신독재 체제에 부역한 이들 간 권력 다툼의 결과물이라는 시각으로 해석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를 구축하고 종신 대통령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대통령은 권력을 정점에서 행정, 입법, 사법을 사실상 모두 장악했다. 소위 말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야당이 저항했지만, 그 힘을 미약했다. 1970년 대 후반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대통령의 명으로 국회의원 제명이 되는 세상이었다. 

이런 절대 권력의 이면에는 그를 추종하고 부역하는 세력들이 존재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을 뒷받침하는 군 내부의 비밀 사조직이었다. 하나회로 불리는 이 조직은 강한 유대감으로 뭉쳐있었고 군 내부의 강력한 이너서클이었다. 이런 그들에게 절대 권력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큰 충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인 지금의 국정원, 안기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탄에 암살됐다. 이와 관련해 여러 분석들이 있지만, 대통령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함께 보좌하던 차지철과의 권력 다툼이 큰 원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공고하던 유신 체제는 내부에서 균열일 발생하며 붕괴됐다. 그렇게 절대 권력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유신 체제 속 만들어진 기득권 세력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군을 장악하고 있는 하나회에는 큰 기회였다.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 수사를 총괄하며 점점 권력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12.12 군사 반란으로 권력의 일인자로 올라섰다. 이후에는 보안사령관과 중앙 정보부장을 겸직하며 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권력을 핵심 기관을 장악한 그를 막아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그들의 권력 장악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다. 국민적 저항이 지속된다면 권력을 온전히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신군부 세력은 북한의 위협과 사회 혼란 수습을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다. 특히, 민주화 운동을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소요로 규정했다. 언론의 보도 역시 진행되지 못하는 민주화와 신군부 세력의 권력 찬탈 등의 문제보다는 민주화 운동의 폭력성을 집중 부각했다. 어느 순간 민주화 운동 세력을 소수가 됐다. 민주화 운동의 열망이 점점 사그러 들었다. 전국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군에 의해 민주화운동이 제압당하면서 저항의 열기도 함께 사라져갔다. 

 

방송링크

https://youtu.be/gsPxHwbrIqg

 

 

하지만 광주는 달랐다. 광주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전 광주의 민주화 운동은 평화적으로 전개됐다. 전남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시위는 폭력적이지 않았고 경찰 역시 강제 진압보다는 상황 유지에 주력했다. 그런 시위 양상은 비상계엄의 확대와 함께 각 지역에 군대가 파견되면서 달라졌다.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군부는 공격적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는 각 지역으로 파견했고 광주에도 공수부대가 파견됐다.

이들은 경찰과 달리 매우 폭력적인 방법으로 민주화 시위를 진압했다. 이를 통해 신군부는 그들에 대한 반대세력을 빠르게 진압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다. 하지만 광주는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상황이 전개됐다. 군의 폭력적인 대응은 시위대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의 희생으로 연결됐다. 급기야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로 진입한 후 5월 19일 새벽 일반 시민인 김경철이 공수부대의 집단 구타로 사망했다. 그는 청각 장애인이었다. 그는 공수부대의 멈춤 지시를 듣지 못했다. 이를 모르는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으로 그를 무차별 구타했다. 그 과정에서 머리를 심하게 다친 그는 병원에 이송됐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그날의 원통함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5월은 봄날의 화사함이 아닌 잿빛으로 물든 우울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어머니에게 5월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보낸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슬픔은 수많은 광주 어머니들의 마음속을 채우게 된다. 

공수부대의 폭력적인 진압은 곳곳에서 시민들의 인명피해를 불러왔다. 이에 시위 양상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넘어 광주시민들이 이에 참여하는 형태로 변했다. 광주시민들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들을 지켜야 할 군이 무고한 시민들에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죽고 다치게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분노는 점점 광주시민들을 결집하게 했고 공수부대에 대한 저항과 신군부 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했다. 

힘으로 누르면 금방 해결될 것 같았던 광주의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광주 시민들의 단결된 힘은 공수부대에도 큰 위협이었다. 그 시점에 폭력 진압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수습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군은 그렇지 않았고 힘으로 저항을 억누르기만 했다. 점점 광주의 색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광주시민들은 단결된 힘으로 강하게 저항했다. 광주 시민들은 그들이 이런 행동이 군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군에게 신군부 세력에게 광주 시민들의 모습은 폭도 이상도 아니었다. 권력을 위협하는 폭도들일 뿐이었다. 이는 점점 광주의 비극을 앞당겼다. 신군부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됐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군은 실탄을 난사했다. 그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을 입었다. 군이 비무장한 국민들에게 사격을 했다. 마침 그 시간은 시위대가 애국자를 함께 제창하는 상황이었다. 그 애국자가 끝나는 시점에 발표가 이루어졌다.

 

광주 도심 야경

 


그리고 그 순간 한 기자가 공수부대 틈에 있었다. 전남 매일신문 나경택 기자였다. 방송에 출연한 두 명의 기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그 장면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으로 담았다.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지만, 그는 사실을 담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 속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최초의 발포 현장에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발포 명령 하달을 독촉하는 장교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었고 상부의 발포 승인을 전달하는 통신병의 목소리를 들었다. 신군부는 시위대의 위협으로 부득이하게 급박한 상황에서 발포가 이루어졌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증언은 이와 크게 달랐다. 

이런 군을 광주 시민들을 더는 신뢰할 수 없었다. 광주시민들을 스스로 자신들을 지켜야 했다. 정당성 없는 신군부 세력의 폭력에 광주시민들을 맞섰다. 그들은 무장을 했고 시민군을 조직해 항전했다. 이런 광주시민들의 기세에 공수부대는 잠시 광주를 떠나 철수했다. 광주시민들로서는 짧은 순간 맛본 승리였다. 

하지만 시민군의 무장은 빈약했고 전투 경험이 없는 나이 어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정규군에 맞서 싸우는 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민군 내부에서는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하자는 이들과 마지막까지 항전하자는 세력이 맞섰다. 

그 사이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완전히 포위하고 인적 물적 교류를 완전히 차단했다. 광주의 소식을 일절 외부로 알려질 수 없었고 광주는 외로운 섬이 됐다. 한편에서는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 진압이 자행됐다. 무고한 이들이 희생됐다. 광주 시내는 물론, 시위 사실조차 잘 모르는 시 외각에서도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렇게 고립된 광주는 점점 더 큰 비극 속으로 빠져들었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을 상황에도 광주 시민들을 의연했다. 그들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다. 어머니들은 식당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과 시민들과 나눴고 부상자가 많아 수혈할 피가 부족한 상황이 되자 너 나 할 것 없이 병원으로 향해 헌혈했다. 폭도들이 장악한 광주의 일상은 평온했고 범죄도 없었다. 그렇게 광주는 불의에 맞서며 연대했다. 하지만 운명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었다.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를 포함한 계엄군은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광주 도청을 공격해 시민군의 마지막 거점을 장악했다. 시민군 다수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사로잡혔다. 그렇게 5.18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헬기 사격 흔적남은 전일빌딩 전시관

 


이후 광주 일대는 대대적인 체포 열풍이 불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군에 의해 구금되고 처벌됐다. 죄목 역시 내란죄 등으로 무시무시했다. 정통성 없는 권력의 폭력에 맞선 결과는 참혹했다. 폭도들이 된 이들에게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당시 참상을 보여준 전시관은 지금 광주에 남아있다. 그 밖에 당시 5월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적과 전시물, 각종 콘텐츠가 옛 광주 도청 건물과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빌딩 등에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은 광주와 호남 인들에게는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광주사태로 알려진 5.18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언급조차 잘되지 않았고 그나마 사실이 왜곡되고 폄하됐다. 광주시민들은 타지역 사람들에게 폭도가 됐다. 호남인들에게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가 더 공고했다. 광주, 호남인들은 그들의 출신지를 애써 감춰야 했다. 광주의 비극을 모르는 이들에게 광주, 호남지역 사람들은 위험하고 호전적이며 상종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경제발전과정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던 호남은 더 큰 차별과 혐오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5.18의 진실과 명예 회복을 주장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록들이 있었다. 방송에서 나온 나경택 기자, 정태원 기자의 사진이 있었다. 광주의 기록은 외신 기자들에 의해 알려지고 그 자료들이 다시 국내로 들어와 전해지는 과정이 있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은 해외에서 받은 자료를 보고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도 누군가에 알려지지 않도록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소수의 사람들이 몰래 자료를 봐야 했고 발설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그 자료들도 나경택, 정태권 기자의 노력이 없었다면 없었을 수도 있다. 두 기자들은 그에 앞서 외신 기자들이 광주의 참상을 인지하고 광주로 올 수 있도록 했다. 나경택 지역의 지역 신문사의 사진 기자로서 누구보다 광주의 참상을 사진으로 담았지만, 신군부의 언론 검열로 그 사진을 기사화할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사진을 외국으로 전달 토록 했고 해외 언론사 일을 하고 있었던 정태원 기자는 그 사진들을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역할을 했다. 그렇게 전달된 기록들은 전 세계 언론사들이 광주를 보도하도록 하도록 했다. 

그렇게 광주를 기억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남겨졌고 이를 바탕으로 광주의 진상을 알릴 수 있었다. 그중 광주의 참상을 영상으로 기록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즈펜터의 이야기는 크게 흥행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서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외 외에도 당시 광주에 있었던 외신 기자들의 기록과 수기, 증언들의 그때의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의 기록과 사실에 객관성과 신뢰를 높이고 이를 왜곡하고 심지어 부인하는 시도를 막아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전일빌딩 야경

 


두 기자의 노력은 이후에도 이어진다. 나경택 기자는 그가 담은 필름과 사진을 숨기도 보전했다. 언젠가 5.18 민주화운동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정태권 기자는 상대적으로 검열과 억압에서 자유로운 외신 기자의 신분을 이용해 민주화 운동의 장면들을 사진으로 담아 남겼다. 특히, 나경택 기자의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를 알리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방송에서 노년이 된 두 기자는 그때를 회상하며 크게 변한 5월 광주의 장소들을 찾았다. 이 기자들에게 그때를 회상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로 보였다. 불의에 저항하며 싸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점은 그들에게는 마음의 짐이 됐다. 인터뷰에 응했던 당시 시민군으로서 시민군과 시민들의 시신 운구를 담당했던 이의 마음과 같아 보였다. 당시 시민군은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시민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시민군에 가담했다. 그는 끔찍한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해 운구했다. 끔찍한 장면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큰 죄책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그는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공격하던 시민군을 공격하기 전 도청을 빠져나왔다. 얼마 안가 도청의 시민군은 계엄군에 제압당했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 중에는 다수의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고통이었다. 해마다 5월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옛 도청은 그가 갈 수 없었던 갈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장소였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큰 용기를 내 그때를 증언했다.

이 외에도 당시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던 이들이 증언이 담겼다. 그리고 그날 그곳에 있었던 이들이 증언이 더해졌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5.18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의 일로 보였다. 어쩌면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더 상처를 내는 사회의 분위기와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그들을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5.18은 여전히 광주사태고 광주 시민들을 폭도들이다. 민주화 운동의 실상과 원인,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알려졌고 알려지고 있지만, 단편적인 파편들만 전달되고 있다. 이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때의 진실이 일부분만 전해지고 5.18을 인정하지 않고 왜곡, 폄하하는 이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가 늘어나면서 광주의 진실은 왜곡되어 콘텐츠로 생산되기도 했다. 북한군이 광주 사태를 주도했고 그 증거가 있다는 식의 주장이 버젓이 SNS에 등장하고 공유되고 퍼졌다. 이를 퍼뜨리는 이들은 그로 인한 수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 사실을 밝히거나 잘못된 내용을 정정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을 퍼지고 퍼져 광주를 모르는 이들의 마음 한구석에 사실처럼 박혔다. 여전히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은 완전히 밝혀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발포 명령자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유력한 발포 명령자는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고 확인된 사실마저 부인한 채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

 

전일빌딩 전시관

 


그는 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사실을 확인하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그날의 가해자들도 입을 다물거나 부인하기 급급하다. 피해자는 다수인데 가해자가 없는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용서를 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해야 할지를 모른 채 가해자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사회 기득권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많은 피해자가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살고 있고 가해자들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당연하지만 중요한 해법을 제시했다. 과거를 기억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노력이 그것이었다. 강의를 통해 고교생들은 그날의 진실과 마주했고 깊이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이 아닌 그날의 사진과 영상,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였다.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이자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우리 군은 국민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헬기 사격 등 중화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폭도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구별하지 않았다. 남녀노소 구분도 없었다. 군인들에게 광주 시민은 싸워 이겨야 할 악랄한 적이었다. 군인들을 그 악랄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결과는 여전히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없는 사망자와 실종자 다수의 부상자 그리고 그 아픔을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가족들의 깊은 슬픔이었다. 

다만, 우리는 5.18 민주화 운동을 더는 비극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 비극은 결국, 민주화 운동의 흐름을 다시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1980년대 군사정권 치하에서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광주의 아픔에 공감했고 마음 가득 강한 부채의식을 가졌다. 광주는 그들의 하지 못했던 일을 하다 큰 비극 속으로 빠져들었다.

불의에 저항하고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는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의지는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광주의 명예 회복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중요한 목표였다. 광주의 정신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대통령 직선제로 대표되는 민주화로 이어졌다.

이후 우리는 더는 체육관 선거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고 국민의 손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권력을 비판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이 없었다면 그로 인한 6월 항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었을 지 상상하기 어렵다. 5.18 민주화 운동은 우리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고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했다. 광주정신은 결코 광주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5.18 민주화운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알리고 그때 광주에 있었던 이들이 결코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저항은 사상 이념의 문제가 아닌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42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보수정당 대통령은 광주정신을 수차례 이야기했고 이례적으로 그 보수정당의 국회의원들이 기념식에 참석해 얼마 전까지 운동권 노래라 폄하하면 '임의 행진곡'을 함께 제창했다.

 

5.18 민주 묘지

 


이를 두고 정치적 쇼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런 '쇼'조차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이런 발언과 행동이 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특별법의 보완과 광주정신의 헌법 명시 등 상응하는 조치에 나서야 한다. 광주 정신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 되고 더는 이 정신이 왜곡되고 폄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980년 5월 광주의 기록들과 사실을 더 알리고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다행히 당시를 증언하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광주의 기억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역사다. 그 역사가 더해지면 대한민국은 더 좋은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건 경제 발전만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니다. 개발도상국을 거치면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고도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있는 아랍 국가들이 선진국이라 부르지 못하는 건 정치적 후진성이 큰 원인이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뻬 놓을 수 없고 그 발전을 이뤄내는 큰 힘이 된 5.18 민주화 운동의 가치는 크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날, 그때 광주에서 함께 싸웠던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존경의 마음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용감했다. 그리고 고난의 시간을 견뎌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그 고통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들은 결코 특별한 이들이 아니었다. 광주 사람들이 별라서 그런 용기를 발휘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가족과 이웃을 지켜야 했고 싸워야 했다. 잘못된 권력의 횡포를 그들은 참을 수 없었다. 혹자는 공권력에 순응했다면 그런 비극이 없지 않았을 까 하는 반론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정당성 없는 권력이 폭력으로 국민들을 억압하지 않았다면 광주의 비극은 애초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런 물음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희생당하는 상황에 초연할 수 있을지 물어보고 싶다. 

5.18 민주화 운동은 행동한 시민들의 위대한 역사였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속에서 불의에 저항한 자랑스러운 국민들의 흔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담은 사진과 영상 각종 기록들은 더 없이 소중하고 잘 보존되어야 한다.

남은 사람들이 할 일은 명확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답이 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그들의 정신을 지키고 따르고 민주주의 발전으로 승화하는 노력이 희생자들을 위한 진정한 보답이다. TBS의 '오일팔 증명사진관'은 5.18 민주화 운동을 한층 더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5.18 민주화운동이 과거 비극으로만 남지 말고 더 나은 미래를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이를 위해 진정한 사과와 용서, 화해 그때 그 사람들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 광주광역시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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