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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750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 지배 속에 있던 아일랜드는 독립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영국의 지배는 더 강화됐다. 영국 바로 옆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과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이 세계 질서는 선도하는 초강대국이 된 상황에서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기는 더 어려웠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마지막 식민지로 남아있어야 했다. 

아일랜드에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큰 기회가 됐다.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등과 함께 협상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과 맞서 싸웠다. 전쟁의 규모는 매우 컸고 그  피해도 막심했다. 영국은 그 영토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전비  부담을 해야 했다. 그에 비례해 국력 소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는 무장 독립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16년 2월 영국이 아일랜드 자치법 시행을 연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영국은 전쟁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일랜드 문제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백 년 세월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아일랜드 인들에게 이는 공분을 불러왔다. 이에 아일랜드 내에서 반 영국 분위기가 강해졌다.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강경 대응 여론이 커졌다. 

1916년 아일랜드 의용군은 수도 더블린에서 무장봉기를 감행했다. 부활절 봉기라고 기록된 봉기는 도시 중요 거점을 장악하는 등 상당한 성과가 있었고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서양에서는 최대 명절인 부활절에 전쟁 중인 상황에서 영국은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마이클 콜린스 - 위키백과

 



하지만 부활절 봉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아일랜드 의용군의 수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전투에 필요한 물자도 부족했다. 여기에 무장봉기 과정에서 발생한 인적, 물적 피해가 커지면서 아일랜드 내 의용군에 대한 여론도 악화됐다. 영국은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아일랜드 의용군을 진압했다. 문제는 그 대응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잔혹했다는 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담 정도가 약하거나 무고한 이들도 희생됐다. 이는 아이랜드의 여론을 다시 움직였다. 의용군은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계속적인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 1919년부터 본격화된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독립전쟁에서 영웅이 등장했다. 마이클 콜린스였다 그는 1916년 부활절 봉기 당시 20대 나이로 참여했다. 봉기 실패 후 투옥됐지만, 주동자로 분류되지 않아 사형을 면했고 그해 12월 출소했다. 이후 마이클 콜린스는 다시 의용군 활동을 지속했고 군사 단체인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조직했다. 최근 알고 있는 IRA는 과격 테러 단체 의미지가 강하지만, 당시 IRA는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단체였다.  최근까지도 활동하는 IRA는 기존 IRA에서 분리된 급진파 세력으로 다른 조직이다.

마이클 콜린스의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의회의 지지를 얻었고 국민적인 지지도 있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IRA의 지도자로 독립 전쟁의 전면에 나섰다. 병력이나 화력 면에서 영국군에 열세에 있었던  IRA의 전쟁 방식은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 전술이었다. 소규모 부대로 국지전을 펼치기도 하고 요인 암살이나 각종 첩보활동을 했다. 영국군을 직접 공격하기 위한 별동대로 운영했다.

IRA의 게릴라전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큰 성과가 있었다. 영국은 별도의 경찰 조직 등으로 대응했지만, IRA의 활동은 말 그대로 신출귀몰했고 영국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를 지휘하는 마이클 콜린스는 영국에는 공적이 됐고 아일랜드인들에게는 독립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때까지 마이클 콜린스는 존재를 감춘 베일 속 인물이었다. 과거 일제 강점이 일제가 그토록 잡고자 했던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의 무장 투쟁과 독립전쟁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이어졌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영국은 물론이고 아일랜드 공화국군 역시 피해가 컸다. 서서히 반전 여론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1921년 영국은 휴전협상을 제안했다. 영국 국왕의 발언이 있었고 당시 영국 야당에서 평화 협상을 주장했다. 로마교황의 협상 촉구 등 국제 여론도 영국에 불리했다. 

마침내 휴전협정을 위한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을 위해 아일랜드 대표단이 구성됐고 마이클 콜린스도 그 일원이 됐다. 무장독립단체의 수장이었던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마침 그 협상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이끌었던 수상이 처칠도 참여했다. 긴 협상 끝에 1921년 12월 영국 런던에서 협약이 맺어졌다. 영국 연방 지배하에 아일랜드가 자유국으로 자치권이 크게 확대되는 게 주 내용이었다. 

아일랜드로서는 독립을 보다 가시화할 수 있는 진전된 내용이었지만, 협상에 불만을 가지는 여론도 상당했다. 아일랜드는 이를 두고 국론이 양분됐다.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공화국을 설립하고자 하는 강경파와 단계적 독립을 주장하는 온건파가 대립했다. 여기에 영군 성공회 영향력이 큰 아일랜드 북부 6개 주가 영국에 남기를 원했고 협상에서 그 6개 주의 영국 잔류가 결정되면서 갈등이 더 깊어졌다. 아이랜드 의회에서 격론끝에 협상을 추인했지만, 갈등은 더 커졌다. 이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이클 콜린스는 온건파에 섰다. 그 누구보다 독립 열망이 강했고 강경 독립투쟁을 선도였던 그였다. 마이클 콜린스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의 무장투쟁의 한계점을 인정하기 않을 수 없었다. 게릴라전은 상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독립을 가져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지속적인 전쟁을 위한 병력 충원이나 물자 보급도 한계가 있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추후 독립전쟁이 조금만 더 이어졌다면 실패했을 거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다소 그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강대국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통한 독립이 어렵다는 점은 마이클 콜린스는 인정했다. 이에 그는 부족한 협상 내용에도 이를 수용하는 결정을 했다. 그는 아일랜드의 단계적 독립을 주장했다. 

이후 마이클 콜린스는 내전 상황에서 강경파를 설득하는 일일 지속했다. 하지만 내전은 격화됐고 마이클 콜린스는 1922년 8월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IRA 조직원들에게 암살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독립투사에서 정치인으로 아일랜드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젊은 영웅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는 그가 조직했던 IRA 조직원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에도 아일랜드 내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독립 영웅마저 적이 되게 하는 독립에 대한 가치와 신념의 차이는 협상과 타협으로 극복되지 못했다. 아일랜드 내전은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아일랜드인들을 양분하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도록 했다.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 상당수는 아일랜드 정부군이 됐고 일부는 강경파 IRA 조직으로 양분됐다.

결국,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내전 과정에서 정부군은 과거 영국이 아일랜드인들을 탄압하는 방식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압박했다. 함께 가야 할 독립의 길이 피로 물들고 말았다.그의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우리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 각각 이념과 그들의 신념에 따라 대립하고 적이되어 싸우는 모습과 너무 닮아있다.  

하지만 이런 비극에서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사랑과 애정이 식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아일랜드인들에게 독립영웅으로 남아있고 문화, 예술 전반에서 영감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의 일개기를 다룬 영화도 다수 제작됐다. 물론, 그와 적이 되어 싸운 영국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본의 평가를 연상하고 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콜린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영국에서 역사 왜곡 논란 속에 상영이 안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논란이 있지만, 아일랜드 독립사에서 마이클 콜린스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지금도 아일랜드는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30대 청년으로 모습으로 아일랜드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61회는 이 마이클 콜린스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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