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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대치하는 한반도와 함께 세계의 화약고로 무력 충돌이 일상인 중동 지역 갈등의 중심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대인들의 국가 수립 열망이 커졌고 1948년 이스라엘은 텔아비브에서 건국을 선포했고 UN이 이를 승인하면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염원하는 나라를 가지게 됐다. 

이는 오랜 세월 이스라엘이 건국된 곳에 살아온 아랍인들 팔레스타인 인들에게는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졸지에 그들의 땅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 UN은 영토의 분할을 결정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갈등은 무력 충돌도 번졌다 이스라엘은 세계 각지에서 돌아오는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필요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영역을 침범했다. 이스라엘과의 공존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고 당장 생존의 문제가 직결됐다. 이슬람 전체에도 전혀 다른 종교의 국가가 생기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갈등은 그들의 싸움이 아닌 이스라엘과 아랍 전체의 대결로 커졌고 이는 4차에 걸린 중동전쟁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했고 지금의 영토를 확정할 수 있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미국 등 서방과 가까운 아랍 일부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국교를 수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고 무력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피의 보복에 또 다른 피의 보복이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한때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평화의 가능성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평화협정을 이끌었던 이스라엘 총리가 암살되는 등의 사건을 거치며 평화 프로세스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중동에 전쟁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러 강대국들과 인근 아랍 국가들의 이해관계 등이 얽히면서 해결이 더 어려운 문제가 됐다. 이런 꼬인 실타래 같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테러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테러는 그들의 주장과 상황을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이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불러왔고 전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1970년까지는 테러의 시대라 불릴 정도로 이슬람 무장 테러단체의 대 이스라엘 테러가 빈번했다. 그중에서 항공기과 공항 테러는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전 테러단체들은 중요 요인 암살과 이스라엘 군 등을 타깃으로 삼았지만, 그 시절부터는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항공기와 공항은 그 테러를 하기에 아주 적절한 장소였고 강한 충격을 불러올 수 있었다. 

항공기 테러의 시작은 요르단이었다. 수차례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상당수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의 터전을 잃고 난민으로 전락했다. 그중 상당수가 요르단에 난민촌을 형성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승리하면 그들의 영토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이스라엘의 승전이 계속되면서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그 입지가 더 흔들렸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더는 아랍 국가들의 선의를 기대하기 보다 직접 대 이스라엘 항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기구와 무장단체 수립으로 연결됐다. 그 시작은 1964년 이슬람권 전체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집트의 민족주의 지도자 나세르가 주도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의 설립이었다. 1964년 카이로 아랍연맹 정상회담의 결의를 통해 PLO는 무장투쟁을 통한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설립 직후 민족의 자결권과 그들 영토의 회복을 주장했다. 이 조직은 이후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파트가 그중심이 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지속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애초 아랍 국가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강경파가 더 힘을 얻었고 조직을 장악했다. 이는 대 이스라엘 테러가 더 활발해지고 과격해지는 계기가 됐다. 항공기 공항 테러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내에서 초강파가 이를 주도했다. 

 

 

 



1970년 9월 이들에 의한 최악의 항공기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스카이 잭 선데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사흘 사이 무려 4대의 여객기가 납치되는 사상 유례없는 항공기 납치 사건이었다. 그 여객기는 미국과 스위스, 이스라엘 국적기로 서방의 사람들이 인질이 됐다. 그중 한 대는 납치범들이 제압되었지만, 나머지 3대는 요르단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했다. 

납치범들은 이미 서방 국가에 수감 중인 테러범들의 석방과 인질들의 교환을 요구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대치가 길어졌다. 이에 납치범들은 그들의 납치한 여객기 3대를 폭파시키며 그들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에 영국과 독일, 스위스는 테러범 석방에 동의하며 인질들은 구출됐다. 하지만, 테러범의 위협에 굴복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은 향후 테러를 더 활발히 하도록 하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한 건 요르단이었다. 요르단은 다수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항공기 납치, 테러 사건에 그들의 공항이 사용되면서 국제적인 비난 여론에 직면해야 했다. 

요르단은 대 이스라엘 항전이라는 공감대를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지역을 그들의 영토로 삼고자 하는 속마음이 있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그들 나름대로 요르단에서 그들의 입지를 더 공고히 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동상이몽의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분파의 항공기 납치, 테러 사건은 요르단에게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었다. 이는 양측의 잠재된 갈등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팔레스타인의 요르단 국왕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고 요르단 국왕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이는 양측의 무력충돌과 내전으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검은 9월 사건이라 불리는 이 내전은 1970년 9월 16일부터 9월 27일까지 이어졌다. 이 내전은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 국가들의 중재로 중단됐지만,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조직이 축출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그들의 본부를 레바논으로 옮겨야 했다. 이후 양측의 관계를 크게 악화됐다. 이는 대 이스라엘 전선에서 아랍 국가들이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검은 9월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내 강경파 중 일부가 검은 9월단이라는 강경 테러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요르단에 대한 복수를 실행에 옮겼다. 1971년 이들에 의해 요르단 총리가 암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검은 9월단의 테러는 계속됐다. 

1972년 5월에는 텔아비브로 향하는 여격기를 납치해 수감 중인 테러범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협상을 거부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고 테러범들이 사살되거나 체포됐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 텔아비브 국제공항에서 총기 난사사건을 일으켰고 24명이 사망했다. 이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로서 큰 충격을 불러왔고 테러범들이 일본의 공산주의 테러단체인 적군파 요원이었다는 점에서 그 충격이 더했다. 이는 어느 누구든 테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테러 조직들의 글로벌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잇따른 항공기 공한 테러로 인해 각국은 공항과 항공기에 대한 보안을 한층 강화했다. 지금의 철저한 보안 시스템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런 대응에도 검은 9월단이 주도하는 테러는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테러를 실행했다. 그 무대는 1972년 독일 뮌헨 하계 올림픽이었다. 그 올림픽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눈부신 경제성장과 함께 경제대국으로 거듭난 독일이 그들의 국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이벤트였지만,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테러와 함께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검은 9월단은 올림픽이 한창인 1972년 9월 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기습 침투해 이스라엘 선수와 임원, 심판까지 11명을 인질로 잡았다. 그 과정에서 저항한 이들은 무참히 살해하며 남은 인원들을 저항의식을 무력화했다. 이들은 담을 넘어 선수촌에 침투했고 이를 위해 선수촌 건설 과정에 요원들이 인부로 위장해 선수촌 구조를 사전에 익히는 등 치밀하게 테러를 준비했다.

또한, 테러범들이 담을 넘어 침투하는 과정에서 캐나다 선수단과 만나기도 했지만, 운동복을 입은 테러범들은 태연히 올림픽 참가 선수로 행세하며 의심을 피했다. 심지어 심야 음주 후 담을 넘어 선수촌에 복귀하는 캐나다 선수들도 함께 담을 넘는 대담함도 보였다. 당시 테러범과 만났던 캐나다 선수들은 평생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이렇게  선수촌에 침입한 테러범들은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고 수감된 테러범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인질 중 한 명은 급히 탈출해 인근에 있던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독일 경찰과 정부가 긴급 대응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뮌헨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최초로 위성 생중계가 실시된 올림픽이었다. 이 인질극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됐다. 

 

 

 



문제는 독일 정부의 대응이 미숙했다는 점이었다. 기존에 없었던 테러였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도 독일에는 없었다. 독일 경찰 수뇌부가 직접 나서 테러범과 협상을 했다. 한편으로는 테러의 직접 당사자인 이스라엘에도 협상 가능성을 타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테러범과의 협상 불가를 통보했다. 독일 정부는 막대한 보상금과 테러범들의 안전보장과 출국 약속, 심지어 독일 고위 인사로의 인질 교환까지 제시하며 테러범을 설득했다. 테러범들은 이를 거부했다. 

독일 정부로서는 다은 선택지가 없었다. 경찰을 중심으로 인질극이 벌어지는 장소로의 진입과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실시간 중계를 하는 언론들의 통제하지 못했고 진압 작전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며 테러범들에게 사전에 발각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테러범들은 그들과 인질들의 이집트로의 이동을 제안했다. 독일 정부는 이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공항에서 테러범들을 섬멸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공항으로의 이동과 탑승 과정에서 독일 경찰과 테러범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 경찰은 저격수를 배치하는 등 대비를 했지만, 작전 수행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고 테러범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등 실수를 범했다. 결국, 테러범들은 모두 사살되거나 채포됐지만, 남아있던 9명의 인질들도 모두 사망했다. 

이렇게 최악의 올림픽 테러를 진압이 됐지만, 뮌헨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올림픽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독일인 이후에도 올림픽을 강행했지만, 대내외의 비난 여론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이후 검은 9월단은 독일 여객기를 납치해 체포된 뮌헨 올림픽 테러범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독일정부는 이에 따르면서 3명의 테러범은 자유의 몸이 됐다. 

뮌헨 올림픽 테러로 팔레스타인 문제는 국제적인 현안으로 떠올랐다. 또한, 각국은 테러에 대한 경각심이 한층 커졌다. 이를 체계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에만 있던 대테러 부대가 곳곳에서 창설됐다. 이에 대응하는 시스템도 구축됐다. 테러에 대한 단호한 대처에 대한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테러 작전의 교범으로 불리는 1976년 엔테베 작전은 테러에 대한 단호한 대처의 예가 되고 있다. 당시 테러범들은 이스라엘 여격기를 납치했고 그들과 친분이 있는 우간다 공항에 여격기를 착륙시켰다. 그 안에는 다수의 이스라엘인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국제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도 특수부대를 몰래 우간다로 파견해 인질 구출작전을 진행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우간다 공항으로 잠입해 우간다 군과 테러범들을 제압하고 인질 전원을 구출했다. 빛나는 성과였다. 

 

 

 



이스라엘은 이후에도 테러에 대한 강경 대응을 이어갔다. 특히, 뮌헨올림픽 테러와 관계되었거나 추정되는 인사들에 대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모사드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전 세계에서 암살작전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테러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하며 국제적 비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멈추지 않았고 1979년 1월 뮌헨 올림픽 테러 주모자로 파악된 인물에 대한 암살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국제적인 항공기 테러는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관련한 테러는 끊지 않고 있다. 더 다양하고 무차별적인 양상으로 테러가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역시 무력으로 강하게 응징하면서 보복전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사라진 것으로 보였던 항공기 테러가 2001년 미국 본토를 공격하는 9.11테러라는 큰 비극으로 부활했다. 이 테러는 항공기를 납치해 그 항공기를 테러 무기로 활용하는 이전에 없었던 테러였다. 그 결과 미국 경제 중심시 뉴욕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이 피습당해 화재와 함께 붕괴되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미국 국방부 건물 역시 납치된 여객기의 충돌로 피습당하며 다수의 사상자와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미국 사회는 이슬람인들을 포함해 외국인들에 대한 경계와 혐오가 커지는 등 이전과 전혀 다른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만큼 테러의 폐해는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는 이들에게도 큰마음의 상처가 된다. 테러를 저지리는 이들이 아무리 정당한 목적을 주장한다 해도 무고한 희생이 따른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이런 극단적인 갈등을 해결할 노력도 지속될 필요가 있다. 해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여전히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더 깊어지고 있다. 각국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해결은 더 힘들어지고 있다. 이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테러의 역사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 사이 무고한 이들만 더 큰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고 귀한 건 사람이다. 이를 위해 중동에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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